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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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3 주일오전예배 설교(눅 17:1-10 /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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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4-11-03 13:35 조회106회 댓글0건

본문

유튜브 동영상 링크 : https://youtu.be/fqNzJoz53Rk?si=ot_vCztF2wnNLGGV


본문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교훈하신 내용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꼭 필요한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실족하게 하지 말라. 형제를 용서하라. 믿음을 더하는 법. 그리고 종이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1. 실족하게 하지 말라

1절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실족하게 하는 것이란 새나 짐승을 잡기 위해서 덫을 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실족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을 유혹하거나 시험에 빠지게 하거나 신앙의 길에서 넘어지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나도 모르게 실수로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할 수도 있지만 고의로 죄를 짓도록 유혹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특히 진리를 잘못 가르쳐서 다른 사람을 탈선하게 만들거나 넘어지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없을 수는 없으나”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세상에는 죄짓게 만드는 요소들이 많습니다. 실족할 일이 없는 곳은 없습니다. 가정도, 교회도, 회사도, 나라도, 그런 공동체는 세상에 없습니다.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로다” 남을 실족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조심해야 합니다. 나도 실족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실족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내가 실족하지 않으려면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내가 영적으로 더 강해져야 합니다. 정신적으로 더 건강해야 합니다. 내 믿음이 약하고, 기도에 깨어 있지 못하고, 말씀에 든든히 서 있지 못할 때 넘어지기 쉽습니다.

2절에 “그가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할진대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예수님 믿는 작은 자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하나님이 노하셔서 벌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연자 맷돌은 방앗간에서 사용하는 맷돌로 엄청나게 크고 무겁기 때문에 소나 말을 이용해서 맷돌을 돌립니다. 사람이 그런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던져지면 살아 나올 가망이 없습니다.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일이 얼마나 큰 죄인가 알려줍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라도 실족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고기 먹는 것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을 실족하게 한다면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고린도전서 8:13에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바울은 남을 실족하게 하지 않으려고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습니다. 내가 음식 먹는 것, 나의 당연한 생활이 누군가에게 시험 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바울은 자신이 희생하고 손해보는 것을 택했습니다. 


2.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3절에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형제가 죄를 지으면 그 죄를 용납하지 말고 경고하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는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경고해 줄 때 회개하거든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실족하지 않는 법은 용서하는 것입니다. 서로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넘어지기 쉬운 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은 누구도 완벽하지 않고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면 용서해야 합니다. 

4절에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는 용서의 횟수를 제한하지 말고 끝까지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18:22에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부족하고 연약하기 때문에 실수도 자주 하고 사과도 자주합니다. 그렇게 반복된 실수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실족하여 스스로 삶을 포기하고 망가지기도 합니다. 정직하게 살아봐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하면서 아무렇게나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라도 바로 살아야 이 세상에 희망이 있다는 생각으로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실족할 일이 많은 세상에서 누군가가 실족하지 않도록 조심할 뿐 아니라 나도 실족하지 않도록 용서해야 합니다.


3. 믿음을 더하는 법

5절에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예수님 말씀을 듣던 제자들은 믿음을 더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사도들이 주님께 요구한 것은 믿음입니다. 사도들은 다른 사람에 비하여 믿음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들에게 믿음이 더 필요함을 알았습니다. 이들은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에게 모자란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더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께 믿음을 더해 달라고 했습니다. 주님만이 더해주실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주님이 주십니다. 믿음도 주님이 주십니다.

6절에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믿음을 더해달라는 제자들에게 겨자씨를 가지고 설명하십니다. 겨자씨는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작아도 그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겨자씨를 심으면 싹이 나고 자라나서 새들이 와서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됩니다. 우리 믿음이 작아도 생명이 있다면 자라날 것이고 큰 역사를 일으킬 것입니다. 문제는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크고 멋지게 생겼어도 생명이 없으면 거기에서는 싹이 나지도 않고 자라지도 않고 열매가 맺히지도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작아도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겨자씨 한 알 같은 작은 믿음이라도 생명력이 있으면 뽕나무가 뽑혀 바다에 심기기도 합니다. 움직이지 않는 것을 움직일 수 있고, 변화되지 않을 것 같은 것도 바꿉니다. 뽕나무는 번식력이 강해서 뿌리를 넓고 깊게 뻗어갑니다. 이 뽕나무 뿌리와 같이 우리 속에 깊이 박혀 있는 우리의 죄악성과 못된 습관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 뽑아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더하려면 뽑을 것을 뽑아내야 합니다. 내 속에 있는 죄성과 옛사람의 부패성을 빼내야 합니다. 죄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4. 종이 가져야 할 태도

7-9절에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간청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신앙생활의 기본적인 자세를 교훈합니다. 믿음을 더하려면 종의 자세를 가지고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은 주인이 밭에 가라면 밭에 가고 양을 치라면 양을 치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입니다. 밭에서 돌아와서도 주님을 위해 음식을 준비해야 합니다. 주인이 먹고 마시는 동안 계속 수종 들어야 합니다. 주인이 음식을 다 먹은 후에 먹을 수 있습니다. 종이 명령한 대로 다 했다고 주인이 감사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종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종은 자기를 위해서 살 수 없습니다. 온전히 주인만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종은 철저히 순종하는 자입니다. 그것이 종이 복 받는 길입니다. 만약 ‘내가 주인이다. 내가 왕이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나는 내 맘대로 하겠다’는 자세로 살아간다면 믿음이 좋아지기 어렵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종의 마음을 갖지 않으면 순종이 되지 않습니다. 종의 마음으로 순종할 때 믿음이 자랍니다.

열왕기하 5장에 보면 아람 나라의 군대 장관 나아만이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나아만 장군이 나병을 고치려고 엘리사 선지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왕의 편지를 가지고 장군의 옷을 입고 장군의 모습을 하고 신하들을 거느리고 찾아갔습니다. 나아만은 이스라엘로 가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가면 선지자가 자기를 환영하며 반갑게 맞아 주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상처 위에 손을 대고 안수해 주면서 병을 고쳐줄 것으로 기대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는 나와 보지도 않고 심부름꾼을 시켜서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으라.’ 했습니다. 나아만은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났습니다.

나아만은 그냥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병 고칠 길이 있고, 살 길이 있고, 복 받을 길이 있음에도 자존심 때문에 그냥 돌아갑니다. 그때 나아만의 종들이 온유한 말로 권면했습니다. 종들은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자인 것을 깨우쳐 주고, 장군이 이스라엘에 온 것은 병 고치러 온 것이지 대접받으러 온 것이 아님을 깨우쳐 주고, 병만 고칠 수 있다면 좀 낮아지고 멸시받고 무시당해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쳐 주었습니다.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씻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깨우쳐 주었습니다. 그때 나아만은 종들의 충고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고 문둥병이 깨끗이 나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할 때 기적도 체험하고 큰 은혜도 받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함에도 왜 순종을 못합니까? 말씀 자체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종의 마음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순종하려면 종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나아만이 병 고친 다음 엘리사를 찾아가서 한 말이 무엇입니까? “당신의 종에게서 예물을 받으소서” 자기를 종이라고 말합니다. 나아만이 선지자의 말을 순종할 때 종의 마음을 가진 것입니다. 그 순종을 통해 병을 고치고 믿음이 생겼습니다. 믿음을 더하고 싶습니까?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십시오. 말씀을 순종하면 진리를 깨닫게 되고 믿음의 눈이 열리고 영적인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10절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주인이 명령한 일을 열심히 감당하고도 스스로 무익한 종이라고 말하는 종이야말로 진정한 종입니다. 참된 종의 특징은 일을 잘하고도 자기를 드러내거나 교만해지지 않습니다. 스스로 무익하다고 말하지만 주인은 그런 종을 유익하게 여기고 귀하게 쓸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종이 되어야 합니다. 주인에게 유익한 종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우리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종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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