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15 수요저녁예배 설교 (이사야 32:1-20 / 그리스도의 공의로운 통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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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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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링크 : https://youtu.be/7bU7P967tc8?si=ibdpPbllgar9d2s6
(설교 요약)
본문은 “보라”(32:1)라는 명령으로 시작하여, 죄로 혼탁한 현실에서 눈을 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보게 합니다. “장차 한 왕이 공의로 통치하시고 방백들이 정의로 다스릴 것”이라는 예언은 역사적으로 히스기야의 개혁에서 부분적으로 드러났고, 궁극적으로는 약속의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과 재림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본문을 세 부분으로 살피며, (1) 공의로운 통치의 은혜, (2) 남유다에 대한 징계의 경고, (3) 성령에 의한 회복의 약속을 통해, 우리가 피해야 할 자리와 버려야 할 안일, 그리고 심어야 할 화평을 분명히 하겠습니다.
1. 공의로운 통치의 은혜가 임함 (1-8절)
32장 1절은 왕의 통치와 방백들의 다스림을 “공의/정의”로 규정합니다. 여기서 공의(체데크)는 하나님의 변치 않는 기준 자체이며, 정의(미쉬파트)는 그 기준이 삶 속에서 구현되는 질서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기준으로 다스리시고, 그분의 통치 아래 세워진 지도자들과 공동체는 그 기준을 실제로 집행합니다. 교회가 주님의 통치에 순종할 때, 세상과는 다른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우리 가운데 드러납니다.
2절은 메시아의 통치를 네 가지 상징으로 체감하게 합니다. 주님은 광풍을 피하는 곳, 폭우를 가리는 곳, 마른 땅의 냇물, 곤비한 땅의 큰 바위 그늘이 되십니다. 이는 추상적 위로가 아니라 현실 속 피난처이며,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의 심령을 보호하고 소생시키는 실제적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시험과 환난 앞에서 우리는 말씀과 기도, 성도의 교제 안으로 피해야 합니다. 주께서 약속하신 대로 그늘과 생명수와 방패가 되어 주십니다.
3-4절은 통치의 내적 열매를 보여 줍니다. 닫힌 눈과 귀가 열리고, 조급한 마음이 지식을 깨닫고, 더듬는 혀가 분명히 고백합니다. 참된 변화는 외적 형편 이전에 시선·마음·입술의 새로움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말씀 앞에서 경청과 분별, 분명한 신앙고백으로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5-8절은 왜곡된 가치 평가가 바로 서는 모습을 증언합니다. “어리석은 자”(나발)는 지적 결핍이 아니라 도덕적 반역을 뜻하며, 그들은 불의와 간사로 약자를 해칩니다(6–7절). 반면 “존귀한 자”(나디브)는 너그럽고 선을 ‘계획’하며 그 선에 ‘서’ 있습니다(8절).
적용하면, 우리는 (1) 그리스도의 평가 기준을 우리의 기준으로 삼아 불의를 존귀라 부르지 않을 용기를 갖고, (2) 선을 기도로 계획하여 작더라도 지속하며, (3) 교회 직분과 질서를 사람의 권세가 아니라 주의 공의·정의를 구현하는 통로로 세워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주님 안으로 피하고(피난), 말씀·진리·복음을 분명히 하고(내적 조명), ‘존귀한 일’을 계획해 그 일에 서는 결단(실천)이 필요합니다.
2. 남유다에 대한 징계 예언 (9-14절)
9절의 “안일한 여인들아, 염려 없는 딸들아”라는 호명은 특정 성별이 아니라 영적 무감각에 빠진 공동체 전체에 대한 소환입니다. ‘안일’(샤아난)은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괜찮다 여기는 위험한 자기확신입니다. 10절의 “일 년 남짓”은 임박함을 뜻하며, 언약을 떠난 자에게 가장 먼저 꺼지는 등불은 ‘열매’임을 경고합니다.
11-12절은 회개의 표지를 명령합니다. 겉옷을 벗고 베로 허리를 동이는 행위는 체면을 내려놓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벌거벗기는 자복의 상징입니다. 풍요가 은혜의 감사보다 안일의 토양이 되었다면, 바로 그 풍요가 통곡의 이유가 됩니다. 회개는 감정의 일렁임이 아니라 방향의 전환이며, 요엘 2:13의 “옷이 아니라 마음을 찢고” 돌아옴입니다.
13-14절은 징계의 범위를 보여 줍니다. “가시와 찔레”는 타락의 저주 표징이며, “희락의 성읍”과 “오벨과 망대”까지 적막과 붕괴가 미칩니다. 사람이 의지하던 자랑과 안전의 상징이 무너짐으로, 하나님 없는 번영의 허망함이 드러납니다.
적용하면, (1) 영적 안일을 죄로 인식하여 말씀의 경고에 응답하고, (2) 체면을 벗는 애통의 회개를 회복하며, (3) 공동체적 죄는 공동체적 회개로 돌이키며, (4) “일 년 남짓”의 긴박함 속에 지금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책망하시는 까닭은 미워하심이 아니라 사랑하심이며, 그 손길로 은혜의 길로 다시 이끄십니다.
3. 남유다를 향한 회복 약속 (15-20절)
15절은 소망의 전환점입니다. “마침내 위에서부터 영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리니.” 회복의 시발점은 인간의 결심이 아니라 성령의 은혜입니다. 성령의 부으심은 광야→밭→숲으로 이어지는 점층적 변화를 일으키며, 하나님의 회복은 번쩍임이 아니라 뿌리내림, 성장, 결실의 과정으로 나타납니다.
이 변환은 물질 풍요로 끝나지 않습니다. 16절은 정의와 공의가 삶의 질서로 자리잡는다고 선언합니다. 17절은 “공의의 열매는 화평, 공의의 결과는 영원한 평안과 안전”이라 증언하며, 18절은 화평한 집·안전한 거처·조용히 쉬는 곳이라는 구체적 실재로 약속합니다. 동시에 19절은 완성 이전의 흔들림(우박과 파괴)을 현실적으로 직면하게 하고, 20절은 소극적 평온이 아니라 능동적 사명으로 부릅니다. “모든 물가에 씨를 뿌리고”—성도는 은혜의 수로를 따라 복음·화해·공의·자비의 씨를 아낌없이 심고, 방황하는 자들을 생명의 물가로 인도합니다.
적용하면, (1) 성령을 간구하고 오늘 의롭고 정직한 선택으로 순종하며, (2) 화평을 결과가 아닌 씨앗으로 심고, (3) 흔들림 속에서도 뿌리는 일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
오늘 말씀은 세 길을 제시합니다.
첫째, 공의로 다스리시는 한 왕 아래로 피하는 길: 주님은 우리의 피난처요 냇물이시며 바위 그늘이십니다.
둘째, 안일을 평안으로 오해하지 말고 베옷 입은 마음으로 회개하는 길: 회개는 방향의 전환입니다.
셋째, 성령의 부으심으로 화평을 심는 길: 공의와 정의가 자리를 잡을 때 화평과 영원한 평안이 열매 맺습니다. 완성 이전의 흔들림이 있어도 우리는 약속을 따라 오늘도 씨를 뿌립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주 안으로 숨겠습니다. 안일을 버리고 회개하겠습니다. 성령의 은혜를 구하며 공의와 진실을 따라 오늘 가능한 선을 심겠습니다.”
“존귀한 자는 존귀한 일을 계획하나니 그는 항상 존귀한 일에 서리라”(8절).
이 말씀이 우리 삶의 표지가 되어, 주의 공의와 정의를 따라 선을 행함으로 화평과 안전의 복을 누리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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