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22 수요예배 설교(고린도후서 4장 8-18절/겉사람과 속사람, 김희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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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2 수요저녁예배 고린도후서 4장 8-18절 겉사람과 속사람
지난주에 우리는 질그릇에 담긴 보배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7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질그릇은 보기에 아름답지 못하고 깨지기 쉬운 약하고 하찮은 그릇입니다. 당시에도 금그릇, 은그릇, 사기그릇, 옥그릇 등 다양한 그릇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질그릇은 가장 저렴한 그릇이었기 때문에, 일상생활 중에 깨지면 고쳐 쓰기 보다 그냥 버리고 새로 사면 되는 그릇이었습니다.
그런 질그릇에 보배가 들어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질그릇과 같이 보잘것 없고 하찮고 연약한 존재이지만 보배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보배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세워 맡겨주신 복음의 직분이 보배이고, 성도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보배이고, 성령 하나님이 보배입니다.
왜 하나님은 금그릇, 은그릇과 같이 아름답고 귀한 존재들에게 보배를 맡기시지 않고 질그릇과 같이 보잘 것 없는 자들에게 보배를 맡기신 것일까요?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은 질그릇과 같은 인생을 사용하시므로 하나님의 큰 능력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멋지고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하나님께서 쓰실만한 자들을 선택하셔서 그들을 사용하시므로 하나님의 능력이 더 잘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바울이 자신을 가리켜 질그릇이라고 표현했는데 우리는 바울과 비교할 때 얼마나 더 연약하고 어리석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또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도구로 사용하시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질그릇들입니다. 하지만 보배를 담은 질그릇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데 있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해, 주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충성하고 헌신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 더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맡겨주신 직분을 잘 감당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능력이 더 강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9)
우리는 질그릇이기 때문에 참 약합니다. 겉으로 내세울만한 것도 없습니다. 다른 그릇들, 다른 사람들에 비해 부족하고, 연약한 면이 많습니다. 그래서 많은 어려움과 고난을 겪기도 합니다.
8-9절 보겠습니다.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8~9)
우리는 질그릇이기 때문에, 연약하기 때문에,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박해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험이 있으십니까? 그냥 일반적으로 세상 살면서 겪게 되는 일들 말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로,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그리고 맡겨주신 직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다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신적 있으십니까?
성도는 세상을 살아가지만 세상에는 속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세상과 구별된 자들이기 때문에 세상과의 갈등이 안생길 수 없습니다. 사탄도 이 부분을 집요하게 공격해서 성도를 넘어뜨리고 좌절시키려고 할 것입니다. 어떻게든 하나님과 교회와 멀어지게 하고, 말씀을 지키지 못하게 만들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받은 성도요 복음의 직분을 맡은 자는 반드시 세상에서 바울이 언급한 일들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이 일이 없을 수 없고, 싫다고 해서 피해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했고, 답답한 일을 당했고, 박해를 받았고, 거꾸러뜨림을 당했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환난 속에서 바울은 어떻게 했다고 했습니까? 아무리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않았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박해를 받더라도 버린 바 되지 않았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다시 7절로 돌아갑니다.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능력으로, 자기의 힘과 의지로 이 모든 박해와 환난을 견뎌낸 것이 아닙니다. 물론 바울이 이 모든 일들을 이겨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참고 견디고 인내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이 모든 시험 가운데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심히 큰 능력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믿음을 주시고, 큰 확신을 주시고, 인내할 마음을 주시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하셨기 때문에 바울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에게 감당할 능력과 은사를 주셔서 온갖 시련과 환난과 박해 가운데서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큰 능력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질그릇이지만 우리 안에 보배가 있다는 것은 이미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고, 하나님께서 승리하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승리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비결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10절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자신이 보배를 담은 질그릇으로서 세상 속에서 여러가지 환난과 핍박과 어려움을 당한 것을 가리켜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피흘려 죽어주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사랑하는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이러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셔야 했습니까? 이 방법이 아니고서는 죄인들을 구속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십자가가 구원의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구원이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이 없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직분을 감당하다가 우겨쌈과 답답한 일과 박해와 거꾸러뜨림을 당했습니다. 이는 복음을 전하는 자가 당연히 겪어야 되는 일들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이 고난을 피할 수 없습니다. 나는 박해가 싫고, 괴로운 것이 싫고, 욕먹는 것이 싫고, 갈등이 싫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아도 됩니다. 세상이 요구하는대로 다 들어주고, 내 욕심이 하라는대로 다 하면 이런 어려운 일 전혀 겪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을 지키려면, 말씀을 순종하려면, 복음을 전하려면, 맡겨주신 직분을 감당하려면 이 일을 겪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에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주님이 겪으신 십자가 고난의 과정을 거쳐야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고난이 다른 이의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겪는 고난은 주님이 겪으신 고난과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대속의 고난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의 고난은 대속의 의미를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대속은 오직 완전히 의롭고 완전히 무죄하신 예수님만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난은 주님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를 감사하면서, 주님께서 이루어놓으신 부활을 소망하면서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연합한 자로서 주님의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는 제자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루어놓으신 십자가와 부활의 대속의 원리가 예수의 죽음을 짊어진 우리의 고난을 통해 또 다른 이들에게 복음의 도구로 쓰임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구원받은 자를 복음의 일꾼으로 사용하셔서 택하신 자들을 구원해 나가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을 전하며 고난받는 삶이 다른 사람의 생명의 수단이 됩니다.
이것이 본문 10-12절까지의 말씀 속에 담겨진 의미입니다.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이런 면에서 성도의 삶은 다른 이를 위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기꺼이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보는 삶, 핍박과 조롱을 감수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삶을 이미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 세상에 무수한 질그릇들이 보배 없이 무가치하게 버려져 있음을 바라보고 긍휼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무가치한 질그릇에 보화를 담는 일에 관심을 갖고 그 일에 쓰임받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13절 보겠습니다.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이 말씀은 시편 116편 10절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내가 크게 고통을 당하였다고 말할 때에도 나는 믿었도다" 다윗은 원수의 핍박 속에서 죽을 것 같은 위기를 여러 번 맞이했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 이 고백을 했습니다.
바울 또한 복음의 직분을 감당하다가 수많은 위험과 죽음의 위기를 만났습니다. 바울에게는 다윗이 겪은 것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을 정도의 많은 고난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의 과정들을 통해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능력이 심히 큰 것을 확실하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고백한 것처럼 자기도 같은 믿음으로 이 말을 하고 있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믿음은 14-15절과 같은 위대한 신앙고백으로 연결됩니다.
“[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15]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마귀와 세상의 핍박은 성도를 망하게 하지 못합니다. 원수가 다윗과 바울을 죽이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해주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려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겪게 되는 육체적 환난 가운데서 건져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영광을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다윗과 바울과 함께 우리도 주님 앞에 서게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받게 될 것입니다.
벧전 1: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그리고 이 모든 수고와 노력이 헛되지 않도록, 반드시 우리의 충성과 희생과 헌신을 사용하셔서 택하신 많은 자들을 구원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자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므로 영광을 올려드리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 일에 우리를 사용해주실 것이고,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16절 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인간적인 시각과 세상적인 견해에서 바울은 낙심하거나 좌절하고 포기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박해와 고난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낙심하지 않는다고 힘주어서 말합니다.
왜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까? 질그릇과 같이 보잘것 없는 자신을 복음의 일꾼으로 사용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므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고후 4:1)
죽음에서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승리에 동참하게 될 소망으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고후 4:14)
자신의 수고가 헛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용하셔서 택한 자들을 구원하시고, 그들이 하나님께 감사로 영광을 돌려드릴 것이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습니다.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5)
우리도 바울과 같은 이유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질그릇과 같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복음의 일꾼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아무리 심한 고난과 핍박이 닥쳐 온다할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주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승리를 쟁취하시고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시고 택한 자들을 구원해주실 것입니다.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는 질그릇과 같이 연약하기 때문에 점점 낡아지게 됩니다.
우겨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박해를 당하고 거꾸러뜨림을 당할 때마다 상처가 나고 아프고 괴롭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날마다 죽어가고 있고, 결국 죽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집니다. 우리 안에 있는 보배가 날마다 우리를 새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나가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점점 자라나고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성품을 이루어나가고 죄의 습성은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리는 일을 점점 늘려나가야 합니다.
우리 안에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날마다 성령께서 주시는 인도와 주장을 잘 받아서 성령충만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뒷걸음질 치면 안되겠습니다. 예배 드리는 자세가 점점 좋아지고, 말씀 묵상이 점점 깊어지고, 삶에 적용하는 것이 점점 풍성해져야 하겠습니다. 퇴보하는 믿음이 되지 말고 성장하는 믿음, 날로 새로워지는 믿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17절 같이 읽겠습니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바울이 당한 환난은 작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왠만한 사람은 경험해보지 못한 심각하고 괴로운 고난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23-27절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그러나 바울은 이 환난을 가리켜 잠시 받는 환난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낡아져가는, 결국 죽게되는 육신이 받는 환난이기 때문입니다. 믿는 일 때문에, 복음의 직분을 감당하느라 이러한 환난과 핍박을 받았지만 이것은 바울의 겉사람을 상하게 할 뿐이었습니다. 아무리 잔인하고 괴롭고 힘든 고난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바울의 믿음을 쓰러뜨리지 못했고, 그의 속사람을 공격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러면 그럴수록 바울의 속사람은 더 강해지고 날로 새로워졌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이 당한 환난을 가리켜 경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별 것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감당할만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당한 고난을 우리가 겪는다고 생각할 때 아무렇지 않게 기꺼이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당한 환난은 결코 가벼운 것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환난 뒤에 있을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과 비교하면 "경하다", "가볍다", "별 것 아니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지게 될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깨달은 자는 어떤 고난과 핍박이라도 다 견뎌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모르니까 두려워하고 괴로워하고 고민하고 도망가게 되는 것입니다.
18절 같이 읽습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보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질그릇과 같은 우리의 겉사람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직분을 감당하다가 이 세상에서 받게 되는 환난과 핍박이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보이는 것은 잠깐 일뿐입니다.
질그릇 안에 담긴 보배는 눈으로 보이지는 않지만 영원한 가치를 가집니다. 우리 안에 있는 복음의 능력,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성령님의 인도와 주장은 영원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서 이루신 영원한 생명과 천국 안식과 부활 소망은 영원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보배를 담은 질그릇들입니다. 질그릇과 같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은 심히 큰 능력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질그릇이기 때문에 여러가지 환난과 핍박을 당하기도 하지만
우리에게 보배를 맡기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 모든 환난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과 믿음을 주실 것이니다.
우리가 복음의 직분을 감당하다가 당하는 고난들은 예수의 죽음을 짊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 뒤에 부활의 영광이 있듯이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택한 자들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가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통해 구원하신 사람들이 하나님께 감사로 영광 올려드리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집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은 경한 것이지만 우리를 통해 이루실 하나님의 영광은 지극히 크고 영원합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질그릇과 같은 우리를 사용하셔서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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