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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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2 주일오전예배 설교(이사야 42장 1-4절/이 사람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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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3-04-02 18:39 조회60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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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링크: https://youtu.be/yWnoJYjONTM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한 사람을 소개하십니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하셨습니다. “보라” 이 사람을 보라고 하십니다. 이 사람을 관찰하여 보고, 이 사람을 믿고, 이 사람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마태복음 12:18절에 이분은 장차 오실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오시기 수백 년 전부터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구원자로 오실 메시야를 소개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그 메시야에게 향하게 만들고 사모하며 기다리게 만드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마음에 기뻐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이 종의 위치에서 온전히 순종하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복종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셨고 구속 사역을 완성하셨습니다.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이 사람은 하나님이 택한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나선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가장 합당한 자로 여기셔서 부르셨고 하나님이 신임하여 세운 자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가 어떤 자인지, 하나님께서 붙들고 쓰는 종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고 배워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런 모습을 갖추면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 붙드는 종. 

1절에 “내가 붙드는 나의 종,” 하나님께서 붙들고 쓰는 종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하나님 뜻대로 쓰임 받는 종입니다. 사람의 손에 휘둘리지 않고 세상의 권세와 풍파에 흔들리지 않는 종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께 순종했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하나님의 손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일생동안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과 동등한 능력, 하나님과 동등한 지혜, 하나님과 동등한 영광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낮아지셔서 종의 위치로 내려가 철저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순종하여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는 종이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되려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야 합니다. 요한복음 15:5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포도나무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야 합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있으면 능력 있는 도구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을 떠나면 비참해집니다. 사울 왕을 보십시오. 그가 처음 왕이 되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렸을 때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쓰임 받았는데, 하나님의 손에서 떠나니까 날마다 마귀에게 시달리는 바보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그릇입니다. 도구입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면 마른 막대기도 하나님의 능력의 지팡이가 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요한복음 8:29에 보면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만 행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혼자 두지 아니하시고 항상 함께 해주셨습니다. 마태복음 3장에 보면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받고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 소리가 났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그것이 은혜이고 복입니다.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성령을 부어주실 것을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를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성령을 기름 붓듯 부어주실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종의 가장 큰 임무는 온 세상에 정의를 베푸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종을 세운 목적입니다. 정의를 세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에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고 진리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진리 운동이고 천국 운동이고 생명 운동입니다.


2. 자신은 낮추는 겸손한 종.

2절에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예수님은 이 세상의 왕들처럼 자기를 과시하며 인기를 얻으려고 하는 교만한 종이 아니고 참으로 온유하고 겸손한 종입니다. 그리스도는 조용하게 일하셨습니다. 크게 외치고 떠들썩한 방법으로 일하지 않고 아주 조용하게 일하셨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실 때에도 베들레헴 마구간에 조용히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하신 일은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신 일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할 수 없는 큰 이적과 능력을 셀 수도 없이 많이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렇게 좋은 일을 많이 하시고 선한 일을 많이 하시면서도 자기를 자랑하거나 자기를 나타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만드시고, 해와 달과 별들을 운행하시면서, 이 지구를 돌아가게 하시면서도 아무 소리 없이 조용히 일하십니다. 너무나 조용히 일하시니까 하나님이 계신지 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도 이것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얼마나 자기를 나타내려고 하는지 모릅니다.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자랑하면서, 광고하고, 선전하고 떠벌립니다. 작은 일을 하고서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섭섭하다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소리 없이 일하는 법을 배웁시다. 하나님은 그런 종을 기뻐하십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히 섬기고 봉사는 사람들이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누가 알아주든지 알아주지 않든지 변함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숨어서 헌신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내가 죽고 낮아질수록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이름이 높아집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참된 구제가 무엇이냐, 참된 기도가 무엇이냐, 참된 금식이 무엇이냐를 말씀하시면서 은밀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남이 모르게 은밀하게 하는 것이 참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자기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모습,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겠다는 기본적인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종입니다. 종에게 자기 이름이 어디 있고, 종에게 영광이 무슨 영광입니까?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나팔을 부는 것입니다. 자기를 높이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문제가 됩니다. 암탉이 알 하나 낳고는 온 집안을 다니며 꼬꼬댁거립니다. 시끄러워서 쫓아버립니다. 


3. 긍휼의 마음을 가진 종 

3절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 갈대는 식물 중에서 가장 연약한 식물입니다.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고 넘어지는 식물입니다. 그런 갈대 중에서도 상한 갈대입니다. 꺼져가는 심지는 바람이 불면 스러질 것 같은 나약한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상한 갈대 같은 연약한 자를 붙들어주고, 꺼져가는 심지 같은 불쌍한 인생들을 일으켜 세우는 분입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죄인과 병자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죄 많은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서 구원하셨습니다.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를 구원하셨고, 동족에게 버림받은 삭개오를 찾아가서 구원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던 한쪽 강도를 구원하셨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에게 못 박힌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시며 부활을 믿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보거나 가난한 사람을 보거나 병든 사람을 볼 때면 마음으로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마태복음 9:36에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하기 때문입니다. 목자가 없는 양을 생각해보십시오. 온 들과 산을 헤매고 다니는 양을 생각해보십시오. 계속 방황하다가 결국은 죽는 길 뿐입니다. 주님이 사람들을 보실 때 목자 잃은 양처럼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양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고, 양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고, 양의 눈물을 자신의 눈물로 느꼈습니다. 그들의 방황, 그들의 두려움, 그들의 아픔, 그들의 좌절을 자기의 것처럼 느끼면서 아파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마음으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면서 가르치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모든 병과 약한 것들을 고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도 이런 마음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고, 이런 마음으로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기 원한다면 우리에게도 이 예수님의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합니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어려움 당하는 사람을 보면 비난부터 합니다. 정죄부터 합니다. 저주부터 합니다. 무슨 죄를 많이 지어서 저렇게 되었을까 생각합니다. 마음이 다르고 사람을 대하는 자세가 달랐습니다.


4. 낙담하지 않는 종

4절에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실 때 어려움이 참으로 많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낙심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번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쇠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세상에 정의를 세워나갔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까지 일평생 동안 환난과 핍박과 시험의 연속이었습니다. 예수님처럼 많은 반대에 부딪히고, 예수님처럼 많은 핍박을 당하고, 예수님처럼 많은 시련을 겪은 사람은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쇠해지지 않고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마귀가 방해하는 방법은 낙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낙심시키는 것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고 오해할 때 낙심하게 되고, 열심히 일하는데 알아주지 않고 비방할 때 낙심하게 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하다가 고난이 오고 박해가 올 때 낙심하기도 합니다. 이유가 어떻든 간에 우리가 낙심하면 마귀에게 지는 것입니다. 낙심될 때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 앞에 가서 엎드리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참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시고 소망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믿음의 사람 다윗에게도 낙심될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즉시 낙심하는 마음을 물리치고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시편 42:5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낙심하는 자신을 스스로 꾸짖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타나 도우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랬더니 평안이 오고 감사가 생기고 찬송하게 됩니다. 돌에 맞아 죽어가던 스데반이 눈을 들어 하늘을 보았습니다. 그는 성령이 충만한 상태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며 힘을 얻었습니다. 우리도 고난 중에 하나님을 바라보면 슬픔과 낙심은 사라지고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로마서 15:13에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 소망을 주시고 기쁨과 평강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도 주변 사람들에게 소망을 심어주는 사람이 됩시다. 

오늘이 종려주일입니다. 오늘부터 한 주간이 고난 주간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고난받으신 주님을 묵상하며 고난 주간을 경건하게 보냅시다. 히브리서 12:2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따라갑시다. 그러면 주님을 닮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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