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03 수요예배 설교(고린도후서 10장 1-18절/바울이 선한 싸움을 싸움, 강우용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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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바울이 성도들을 대하는 태도(1-2)
2. 싸움의 대상(3-11)
3. 자랑과 칭찬(12-18)
1절,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너희를 대면하면 유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에 대하여 담대하다”. 쉽게 말해서, 만나면 약하고, 편지로는 강하다는 뜻입니다. 만났을 땐 아무 말도 못하다가, 떠난 후, 즉 편지로는 으름장을 놓는다는 것이지요. 일부 교인들 중에 이런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런 오해는 대적자들의 영향에 따른 것으로 보입니다. 10절에,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말이 시원치 않다는 것은 언변이 좋지 않다, 웅변술이 형편없다는 이야깁니다.
행 18:24,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유쾌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술 더 떠서 누구는 이렇게 잘하는데 넌 왜 이 모양이냐? 하면 어떠시겠습니까? 분위기가 급냉할 겁니다. 사이가 안 좋아질 게 뻔합니다. 얼굴 붉히고 당장 그 자리에서 화를 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떻게 응대합니까? “온유와 관용”으로 권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요? 이것은 세상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바울 자신의 온유와 관용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입니다. 그가 비방과 공격, 고난 속에서 내세운 것은 그리스도였습니다.
바울은 이 세상에 살면서 언제나 주님을 본받고자 했습니다. 자신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자 했습니다. 주님을 닮아가며 그분의 성품을 삶에서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지금 이 상황 역시, 비록 억울하고 화가 나지만, 복음을 증거하는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권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대적자들은 바울이 육신을 따라 행한다고 비난했습니다.
2절, 또한 우리를 육신에 따라 행하는 자로 여기는 자들에 대하여 내가 담대히 대하는 것 같이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나로 하여금 이 담대한 태도로 대하지 않게 하기를 구하노라
대적자들은 바울을 세상 기준, 세상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런 자들을 향한 바울의 태도는 분명합니다. 담대히 대하는 것입니다. 강경하게 대처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앞서 온유와 관용과는 전혀 다른 태도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비방에 동요하지 않는 바울을 봅니다. 이러한 공격과 비난은 사도 권위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다는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습니다. 교인들입니다. 그는 장차 고린도 교회를 방문할 때, 담대하게 대할 대상에 고린도 교인들이 포함되지 않길 바라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고린도 교인들이 잘못된 것들을 회개하고 믿음에 서길 소망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다시 대면하게 될 때 사랑과 온유로 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돌이키지 않으면 대적자들을 대하는 것처럼 강경하게 책망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온유와 관용으로 대할는지, 강하게 대할는지는 교인도 교인들이 돌이키느냐 그렇지 않느냐 여부에 따라 달라집니다. 뒤집어 말하면, 바울이 자기 마음대로, 자기 내키는 대로 태도를 바꾸는 게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이런 의미를 이미 고린도 전서에서 밝혔습니다.
고전 4:21,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바울의 태도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온유와 관용, 둘째, 담대함. 이 둘은 짝입니다. 동전의 양면입니다. 그러나 동전은 하나입니다. 따라서 온유와 관용의 태도를 보고 약하다고 하고, 담대함을 보고 강하다고 하면서 바울은 이중적인 사람이다, 일관성이 없는 사람이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걸 깨우치고 있는 것입니다.
【적용】
우리도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대하길 힘써야 합니다. 이때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한편, 무작정, 언제까지나 온유와 관용으로만 대할 수는 없습니다. 때가 되면 강경한 태도도 필요합니다. 이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충분히 기도할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징계를 위한 징계가 아니라 바로 세우기 위함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어서 싸움의 대상(3-11)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3절, 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육신”은 연약한 인간성과 부패성을 가진 육체를 말합니다. 바울도 사람입니다. 육체를 입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육신에 따라 싸우지는 않습니다.
4-5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싸움”, “전쟁”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이 떠오릅니다. 1년여 이상 지속되는 가운데 수십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전쟁의 참혹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전쟁 무기가 강력해진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성도의 무기는 세상의 강력한 무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무기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인간의 수단이나 방법 또는 동기를 따라 싸우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을 의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들고 선한 싸움에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견고한 진”은 마귀의 전(성, 요새)를 가리킵니다. 우리의 싸움은 영적 싸움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싸움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영적 전쟁인 것입니다.
“모든 이론”과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이란 철학과 자율주의적인 종교, 인본주주의 모든 사상 및 복음을 반대하는 모든 운동을 말합니다. 바울은 복음의 능력과 하나님의 만능의 역사로 이것들을 파괴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케 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바로 세우는 것입니다.
마귀는 간교합니다. 사탄의 세력은 인간의 이성과 이론에 맞도록 교묘하게 말합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보통 인본주의, 세상 철학을 잘 따라갑니다. 하지만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만 전했습니다. 이 복음에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이 능력으로 무너뜨린 것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복음이 처음에는 약하고 미련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택한 백성을 사로잡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만듭니다. 이것이 복음의 승리입니다.
6절,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
사도는 “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를 내다봅니다. 교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믿음에 굳게 서 있는 모습을 기대합니다. 교린들을 향한 소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온유와 관용의 실상입니다. 그렇지만 겉으로 드러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대적자들은 이걸 보지 못했습니다.
7절,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
눈앞에 있는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 믿는 사람은 바울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해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오해했습니다. 이것은 이미 예언된 일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예언했었습니다.
(사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겉모습만 보지 마십시오. 외모만 보고 섣불리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혹시 내가 정죄하거나 비판한다는 생각이 들면 얼른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F5 키(새로고침)를 누르듯.
8-9절, 주께서 주신 권세는 너희를 무너뜨리려고 하신 것이 아니요 세우려고 하신 것이니 내가 이에 대하여 지나치게 자랑하여도 부끄럽지 아니하리라 이는 내가 편지들로 너희를 놀라게 하려는 것 같이 생각하지 않게 함이라
“주께서 주신 권세”는 사도권을 뜻합니다. 사도에게는 교인들을 인도하고 다스리는 권세가 있습니다. 사도의 권세로 해야 할 일은 교회와 성도들의 믿음과 신앙을 바르게 세워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온유와 관용으로 때로는 담대함으로.
반면에 거짓 스승들은 자기 권세를 갖고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을 파괴합니다. 오히려 바벨탑을 쌓아 올립니다. 바울은 편지들로 놀라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겁을 주려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로서 바벨탑을 쌓아 올리는 일에 동조하는 교인들을 돌이키도록 만들면서 교회를 바르게 세우려고 합니다. 사실 이 사역이야말로 지나치게 자랑해도 부끄러울 것이 없는 사역인 것입니다.
10-11절,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 이런 사람은 우리가 떠나 있을 때에 편지들로 말하는 것과 함께 있을 때에 행하는 일이 같은 것임을 알지라
앞에서 말한 내용을 정리합니다. 대적자들의 비난을 언급하면서 “같은 것임을 알지라”라고 말씀합니다. “같다”고 말할 때 중요한 것은 기준입니다. 바울은 언제나 하나님이 표준이었습니다. 항상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의 잣대였던 것입니다. 이런 기준으로 볼 때 바울에게도 자랑할 것이 있었습니다.
이어서 자랑과 칭찬입니다(12-18).
12절,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어떤 자와 더불어 감히 짝하며 비교할 수 없노라 그러나 그들이 자기로써 자기를 헤아리고 자기로써 자기를 비교하니 지혜가 없도다
자기를 칭찬하는 자와 비교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은 자기 스스로 칭찬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자기가 기준이 되어 남들과 비교합니다. 이렇게 자랑하는 말을 하는 자들을 가리켜 성경은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유다서 16절,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왜 이렇게 자랑하려는 걸까요? 사람들이 주위에 몰려들기 때문입니다.
【예시】
“과장 광고” 들어보셨지요? 길거리 지나가다가 간혹 광고에 ‘혹’할 때가 있으시지요? 혹해서 가보면 조건이 너무 까다로워서 나에게 해당되는 건 거의 없습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결국 시간 낭비만 한 꼴이 되고 말지요. ‘혹’한 걸 후회합니다. 스스로 칭찬하는 자들은 지혜가 없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을 따라가면 자신도 망하고 따라간 사람도 망합니다.
이와 달리 바울은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습니다.
13-14절, 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분수 이상”.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나누어주신 분량이 있습니다. 간장 종지에 국을 담으면 넘치기 마련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범주 안에서 그 한계를 따라 일했고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또한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에 이른 것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고린도에 간 것도 스스로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누어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나아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다 보면 필히 고난이 뒤따릅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멸시 천대 받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은 세상 기준으로 볼 때 가장 완벽한 패배를 맛보게 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내려오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십자가에서 조롱과 모욕, 멸시와 천대를 몸소 친히 받으셨습니다.
(마 27:38)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마 27: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마 27: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마 27: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마 27: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마 27: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마 27: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이스라엘의 관습으로 보아 머리를 흔드는 것은 상대방을 심히 멸시하고 조롱하는 상징적인 행동이었습니다(시109:25, 애2:15).
(마 27: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만 예수님의 고통을 자기 고통으로, 예수님의 수난을 자기 수난으로 이해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신 포도주는 고통 경감과 마취 기능이 있습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기꺼이 동참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고난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쁘고 영광스러운 일로 여겼던 것입니다. 진정한 사도의 모습입니다.
바울이 이처럼 자신의 정당성을 밝히는 이유는 대적자들은 남의 수고를 자기 것으로 여기며 분수 이상으로 자랑했기 때문입니다.
15-16절, 우리는 남의 수고를 가지고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믿음이 자랄수록 우리의 규범을 따라 너희 가운데서 더욱 풍성하여지기를 바라노라 이는 남의 규범으로 이루어 놓은 것으로 자랑하지 아니하고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 함이라
바울에겐 “너희 지역을 넘어 복음을 전하려”는 계획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바울은 땅끝까지, 즉 이방에 선교하도록 하나님께부터 보냄 받은 사도였습니다. 이 위대한 사역에 고린도 교회가 동참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려면 믿음이 자라나고 더욱 풍성해져야 했습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소망과 염원이었습니다. 세계 선교사역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교회. 이 교회야말로 참으로 귀하고 영광스러운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복용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면 좋겠습니다.
바울은 결론과 같은 말씀을 전합니다.
17-18절,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주 안에서 자랑한다는 것은
첫째, 주님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둘째, 주께서 주신 모든 은혜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말씀만 말하는 것입니다.
넷째, 주님이 하시는 모든 일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이 하시는 생명의 역사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주어는 그리스도이시고 목적어는 교회입니다.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자랑은 무엇이어야 하겠습니까? 뭘 자랑하면서 살고 계십니까? 부한 자는 자기 부를 자랑합니다. 힘 있는 자는 자기 힘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자랑은 오직 주님입니다. 주님을 자랑하면서 선한 싸움을 끝까지 싸워나가는 우리 복용교회 되길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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