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04 주일오전예배 설교(빌레몬서 1장 8-16절/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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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2-12-04 15:43
조회57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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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빌레몬서를 기록한 것은 오네시모 때문입니다. 오네시모는 원래 빌레몬의 종이었는데 오네시모가 자기 주인 빌레몬을 배반하고 도망쳤습니다. 그냥 도망만 친 것이 아니라 주인 빌레몬의 돈을 훔쳐가지고 도망쳤습니다. 그 오네시모가 사도 바울을 만나서 예수님을 믿고 새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바울은 그 오네시모를 옛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돌아가면 오네시모는 죽임을 당할 수 있습니다. 당시 법으로는 종이 도망치다 붙잡히면 재판없이 즉결 처형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오네시모를 받아주라고 부탁합니다.
1. 명령 대신 간구
8절에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바울과 빌레몬은 아주 특별한 사이입니다. 형제처럼 사랑하는 사람이고, 동역자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명령할 수도 있는 관계이고, 바울이 명령하면 빌레몬은 따라야 하는 관계입니다. 더욱이 빌레몬에게 그의 종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달라고 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우리 관계가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시면 우리는 무조건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강제적으로 하지 않으시고 자율적으로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주님이 문밖에 서서 두드린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문을 열면 들오시고 문을 열지 않으면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양을 인도할 때 주님이 앞서가면 양들이 그 음성을 듣고 따라간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에는 명령이 많습니다. 그러나 부탁도 있고 권면도 많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따라야 할 명령임에도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9절에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바울은 나이가 많았습니다. 젊은 빌레몬에게 마땅한 일을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이 많은 바울이 간구하고 있습니다. “간구”라는 표현이 두 번 나옵니다(9절, 10절). 꼭 해야 할 일이고 아 일을 하면 빌레몬은 자기 종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사랑으로 간구했습니다. 바울의 겸손을 보여줍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자신을 낮춥니다. 바울이 간구는 오네시모를 위한 것입니다.
10절에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바울은 오네시모는 로마 옥중에서 만났습니다. 어떻게 만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네시모가 그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바울은 이 오메시모를 가리켜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도 믿음으로 생명을 낳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낳고, 낳고”라는 말씀이 계속 나옵니다. 믿음의 사람이 믿음의 사람을 낳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은 태어납니다. 낳을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낳았습니다. 처녀인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님을 낳았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결혼도 안 하고 오직 주님만을 위해서 살면서 믿음의 자녀를 많이 낳았습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새 생명이 태어나고 기쁨을 얻습니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바울의 간구는 오네시모를 위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주님께서도 제자들을 위해서 간구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로마서 8:34에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우리도 전도 대상자를 놓고 기도하고 믿지 않는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2. 오네시모의 변화
11절에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중요한 것은 “전에는”이라는 말과 “이제는”이라는 말입니다. 오네시모는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닙니다.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만난 성도는 예전과 다른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1:13에 바울의 유명한 고백이 나옵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에베소서 5:8에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우리도 주님을 만난 이후 달라져야 합니다.
1) 전혀 변화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항상 그 모습 그대로 인 사람입니다. 2) 점점 나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점점 믿음이 약해지고, 점점 악해지고, 점점 타락하는 것입니다. 3) 변화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착하고 선한 사람이 되고 믿음이 자라고 삶이 달라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전보다 지금이 더 좋아야 합니다. 주님은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문제는 “지금”입니다. 과거에 아무리 잘못하고, 큰 죄를 지었을지라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용서하고 구원하십니다. 문제는 지금은 어떠냐는 것입니다. 예수 믿은 지 오래되었는데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나부터 변해야 합니다. 내가 변하면 가정도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면 오네시모는 어떻게 변했습니까?
첫째, 유익한 사람이 됨. 11절에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오네시모는 전에 무익한 자였습니다. 자기 주인에게 아무런 유익을 끼치지 못하는 자였습니다. 주인의 속만 상하게 하고 주인에게 큰 해를 끼치고 도망쳤던 사람이고, 종 구실도 제대로 못하던 쓸모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낭비하고, 자기 자신을 망치고, 자기 자신에게 쓸모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런 오네시모가 이제는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에게도 유익한 자가 되었고, 빌레몬에게도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가든지 유익한 자가 되고, 누구에게나 유익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일에 유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족에게도, 이웃에게도, 세상에도, 교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바울의 심복이 됨. 12절에 “그는 내 심복이라” 심복이란 ‘내장, 중심, 심장, 핵심’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전적으로 믿고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을 위해 생사고락을 같이할 사람입니다. 10절에서는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오네시모를 아들처럼 믿고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무익하던 오네시모가 유익한 사람이 되었을 뿐 아니라 바울의 심복이라고 할 만큼 소중하고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의 입장에서는 오네시모가 옆에서 도와주면 큰 도움이 되고 유익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인 빌레몬의 허락이 없이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13-14절). 바울이 오네시모를 얼마나 깊이 신뢰하고 사랑하고 있는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셋째, 곁에 두고 싶은 사람. 13-14절에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항상 곁에 두고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인인 빌레몬의 허락을 받아야 할 문제입니다. 그리고 빌레몬 스스로 결정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래야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갔다가 큰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감사해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넷째. 사랑받는 형제가 됨. 16절에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바울은 오네시모를 그냥 종으로 대할 사람이 아니라 사랑받는 형제로 대해야 할 자라고 말합니다. 과거에는 종노릇도 제대로 못한 오네시모였지만 이제는 형제의 대접을 받을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4:7-9에 보면 바울을 두기고를 보내면서 오네시모를 함께 보냅니다. 그러면서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왜 오네시모를 보내려고 애쓸까요? 오네시모가 변화되었고 바울과 곁에서 귀한 일을 하고 있는데 왜 보내려고 할까요?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빌레몬을 만나서 회개하고 용서를 받고 두 사람의 모든 관계가 회복되어야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회복입니다.
3. 오네시모가 변한 이유
오네시모가 변화된 것은 교육 때문도 아니고, 징벌 때문도 아닙니다. 공부 많이 한다고 사람이 변하는 것 아닙니다. 야단치고 때린다고 변하는 것 아닙니다. 잔소리 많이 한다고 변하는 것 아닙니다. 오네시모가 변한 것은 바로 복음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고 영혼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울을 변화시켜 바울이 되게 한 것도 복음이었습니다. 시몬을 변화시켜 베드로 되게 한 것도 복음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을 성자로 변화시킨 것도 복음입니다. 도망자이고 무익한 자를 유익한 자로 변화시킨 것도 복음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야 변합니다.
오네시모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 누굽니까? 바울입니다. 오네시모가 사도 바울을 만난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그가 바울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쩔 뻔했습니까? 우리도 바울처럼 만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합시다.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칩시다. 여러분을 만나는 사람들이 여러분들 때문에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오네시모가 변화된 것처럼 우리도 변하여 새로워져야 하겠습니다. 오네시모가 유익한 사람이 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일에 유익하고, 이 세상에 유익한 사람이 됩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변화되게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쓰임을 받으면 좋겠습니다.
바울이 빌레몬서를 기록한 것은 오네시모 때문입니다. 오네시모는 원래 빌레몬의 종이었는데 오네시모가 자기 주인 빌레몬을 배반하고 도망쳤습니다. 그냥 도망만 친 것이 아니라 주인 빌레몬의 돈을 훔쳐가지고 도망쳤습니다. 그 오네시모가 사도 바울을 만나서 예수님을 믿고 새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바울은 그 오네시모를 옛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기로 마음을 먹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돌아가면 오네시모는 죽임을 당할 수 있습니다. 당시 법으로는 종이 도망치다 붙잡히면 재판없이 즉결 처형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오네시모를 받아주라고 부탁합니다.
1. 명령 대신 간구
8절에 “마땅한 일로 명할 수도 있으나” 바울과 빌레몬은 아주 특별한 사이입니다. 형제처럼 사랑하는 사람이고, 동역자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명령할 수도 있는 관계이고, 바울이 명령하면 빌레몬은 따라야 하는 관계입니다. 더욱이 빌레몬에게 그의 종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달라고 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우리 관계가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시면 우리는 무조건 따라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강제적으로 하지 않으시고 자율적으로 따르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에 보면 주님이 문밖에 서서 두드린다고 말씀합니다. 내가 문을 열면 들오시고 문을 열지 않으면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양을 인도할 때 주님이 앞서가면 양들이 그 음성을 듣고 따라간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에는 명령이 많습니다. 그러나 부탁도 있고 권면도 많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따라야 할 명령임에도 따르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9절에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바울은 나이가 많았습니다. 젊은 빌레몬에게 마땅한 일을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이 많은 바울이 간구하고 있습니다. “간구”라는 표현이 두 번 나옵니다(9절, 10절). 꼭 해야 할 일이고 아 일을 하면 빌레몬은 자기 종을 얻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사랑으로 간구했습니다. 바울의 겸손을 보여줍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면 자신을 낮춥니다. 바울이 간구는 오네시모를 위한 것입니다.
10절에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바울은 오네시모는 로마 옥중에서 만났습니다. 어떻게 만났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네시모가 그 말씀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바울은 이 오메시모를 가리켜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도 믿음으로 생명을 낳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낳고, 낳고”라는 말씀이 계속 나옵니다. 믿음의 사람이 믿음의 사람을 낳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은 태어납니다. 낳을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낳았습니다. 처녀인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님을 낳았습니다. 우리는 성령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결혼도 안 하고 오직 주님만을 위해서 살면서 믿음의 자녀를 많이 낳았습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는 것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새 생명이 태어나고 기쁨을 얻습니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바울의 간구는 오네시모를 위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주님께서도 제자들을 위해서 간구했습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간구하십니다. 로마서 8:34에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우리도 전도 대상자를 놓고 기도하고 믿지 않는 가족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2. 오네시모의 변화
11절에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중요한 것은 “전에는”이라는 말과 “이제는”이라는 말입니다. 오네시모는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닙니다. 변하여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만난 성도는 예전과 다른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1:13에 바울의 유명한 고백이 나옵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에베소서 5:8에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우리도 주님을 만난 이후 달라져야 합니다.
1) 전혀 변화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항상 그 모습 그대로 인 사람입니다. 2) 점점 나빠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점점 믿음이 약해지고, 점점 악해지고, 점점 타락하는 것입니다. 3) 변화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착하고 선한 사람이 되고 믿음이 자라고 삶이 달라지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전보다 지금이 더 좋아야 합니다. 주님은 과거를 묻지 않으십니다. 문제는 “지금”입니다. 과거에 아무리 잘못하고, 큰 죄를 지었을지라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용서하고 구원하십니다. 문제는 지금은 어떠냐는 것입니다. 예수 믿은 지 오래되었는데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문제입니다. 나부터 변해야 합니다. 내가 변하면 가정도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면 오네시모는 어떻게 변했습니까?
첫째, 유익한 사람이 됨. 11절에 “그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오네시모는 전에 무익한 자였습니다. 자기 주인에게 아무런 유익을 끼치지 못하는 자였습니다. 주인의 속만 상하게 하고 주인에게 큰 해를 끼치고 도망쳤던 사람이고, 종 구실도 제대로 못하던 쓸모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낭비하고, 자기 자신을 망치고, 자기 자신에게 쓸모없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런 오네시모가 이제는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에게도 유익한 자가 되었고, 빌레몬에게도 유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가든지 유익한 자가 되고, 누구에게나 유익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일에 유익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가족에게도, 이웃에게도, 세상에도, 교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바울의 심복이 됨. 12절에 “그는 내 심복이라” 심복이란 ‘내장, 중심, 심장, 핵심’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전적으로 믿고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주님을 위해 생사고락을 같이할 사람입니다. 10절에서는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오네시모를 아들처럼 믿고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무익하던 오네시모가 유익한 사람이 되었을 뿐 아니라 바울의 심복이라고 할 만큼 소중하고 필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의 입장에서는 오네시모가 옆에서 도와주면 큰 도움이 되고 유익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인인 빌레몬의 허락이 없이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13-14절). 바울이 오네시모를 얼마나 깊이 신뢰하고 사랑하고 있는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셋째, 곁에 두고 싶은 사람. 13-14절에 “그를 내게 머물러 있게 하여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것도 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항상 곁에 두고 함께 일하고 싶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인인 빌레몬의 허락을 받아야 할 문제입니다. 그리고 빌레몬 스스로 결정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래야 선한 일이 억지 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그것이 복입니다. 구레네 시몬은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갔다가 큰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감사해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넷째. 사랑받는 형제가 됨. 16절에 “이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바울은 오네시모를 그냥 종으로 대할 사람이 아니라 사랑받는 형제로 대해야 할 자라고 말합니다. 과거에는 종노릇도 제대로 못한 오네시모였지만 이제는 형제의 대접을 받을만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4:7-9에 보면 바울을 두기고를 보내면서 오네시모를 함께 보냅니다. 그러면서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왜 오네시모를 보내려고 애쓸까요? 오네시모가 변화되었고 바울과 곁에서 귀한 일을 하고 있는데 왜 보내려고 할까요?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빌레몬을 만나서 회개하고 용서를 받고 두 사람의 모든 관계가 회복되어야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름다운 회복입니다.
3. 오네시모가 변한 이유
오네시모가 변화된 것은 교육 때문도 아니고, 징벌 때문도 아닙니다. 공부 많이 한다고 사람이 변하는 것 아닙니다. 야단치고 때린다고 변하는 것 아닙니다. 잔소리 많이 한다고 변하는 것 아닙니다. 오네시모가 변한 것은 바로 복음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고 영혼을 구원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울을 변화시켜 바울이 되게 한 것도 복음이었습니다. 시몬을 변화시켜 베드로 되게 한 것도 복음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을 성자로 변화시킨 것도 복음입니다. 도망자이고 무익한 자를 유익한 자로 변화시킨 것도 복음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만나야 변합니다.
오네시모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 누굽니까? 바울입니다. 오네시모가 사도 바울을 만난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그가 바울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쩔 뻔했습니까? 우리도 바울처럼 만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합시다. 자녀들에게 말씀을 가르칩시다. 여러분을 만나는 사람들이 여러분들 때문에 변화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오네시모가 변화된 것처럼 우리도 변하여 새로워져야 하겠습니다. 오네시모가 유익한 사람이 된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일에 유익하고, 이 세상에 유익한 사람이 됩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변화되게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쓰임을 받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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