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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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18 수요예배 설교(고린도후서 1장 12-24절/바울의 전도와 성령의 보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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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3-01-18 21:12 조회60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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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 https://youtu.be/I_fBlOuuslI


고린도후서 1장 12-24절 바울의 전도와 성령의 보증 


1. 바울이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복음을 전함(12-19)

2. 하나님의 약속을 성령께서 보증하심(20-22)

3. 바울이 고린도에 다시 가지 아니한 이유(23-24) 


바울은 자기가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 어떤 마음으로 교인들을 대하고 있는지, 어떤 태도와 자세로 행하고 있는지 그 내용을 자세하게 밝히고 있다. 


12절

우리가 너희에 대해서 이렇게 행하고 있다면서 세가지를 말한다.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진실함으로,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양심이 증언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행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욕심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신령하고 거룩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고, 진실한 마음으로 행하고, 인간의 꾀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인도를 따라서 모든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한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참되고 진실하게 교인들을 대하면서 모든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 양심이 증언하는 바니" 바울은 범사에 양심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다. 양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울의 자랑이고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살고 있는 삶의 모습이다. 세상은 이렇지 않다. 권모술수를 쓰고 지략을 쓰고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해서 이기기만 하면 성공이라고 생각하고 높아지기만 하면 출세라고 자랑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다. 진실하고 거룩하고 참되게 사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고 있다. 아름다운 믿음의 자세이다. 


13절

바울은 자기의 심정을 편지로 다 표현을 해서 전했다. 고린도전서를 통해 다 보냈다. 고린도 교인들이 읽고 아는 것이 전부라는 것이다. 숨겨진 다른 마음이나 의도나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겉과 속이 같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편지를 읽으면 바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일을 하려고 하고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다 알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면서 "너희가 완전히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바울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의 마음과 자세를 모른다. 그래서 더 잘 알기를 원한다고 했다. 


14절

바울에 대해서 안다고 하지만 부분적으로 알 뿐이다. 우리도 어떤 사람을 잘 안다고 하지만 사실 얼마나 잘 아는가?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모르는 것이 더 많다. 가족 간에도 모르는 것이 있다. 

"주 예수의 날" 바울이 전도를 하고 말씀을 잘 가르쳐서 고린도 교인들이 믿음 생활을 잘 하면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자랑이 된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보면서 자랑스럽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에게는 바울이 자랑이다. 어떻게 말씀을 잘 배웠는가? 라고 물으면 바울이 전도해주었고 바울에게 말씀을 배워서 믿음 생활 잘하게 되었다고 하면 바울이 자랑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가면 다 드러난다. 우리가 전도한 것, 구원 이룬 것, 믿음 생활 잘했는지, 못했는지, 충성했는지 다 드러날 것이다. 누구 때문에, 누구를 통해서 도움을 얻었는지도 드러날 것이다. 상호간에 자랑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 서로에게 자랑이 되고 기쁨이 되는 관계를 맺기를 소원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빌 4:1)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서 나의 기쁨, 나의 자랑, 나의 면류관이라고 했다. 빌립보 교인들도 바울을 고맙게 여기고 자랑거리로 여길 것이다.

우리는 어떤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는가? 세상 것 말고. 주님 앞에 갔을 때 내가 자랑거리로 내놓을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그런 것이 많으면 좋겠다. "내가 전도한 사람이 50명은 됩니다" 그러면 얼마나 기쁘겠나? 그런데 자랑거리가 하나도 없다면 얼마나 안타깝고 아쉽겠나? 


15-17절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려고 했던 계획을 변경한 이유를 설명한다.

너희에게 이른다는 것은 고린도 교회로 간다는 의미이고, 고린도를 지나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고린도로 갔다가 그 다음 유대 예루살렘으로 가려고 계획을 세웠었다.

그런데 계획을 변경하게 되었다. 고린도에 다시 가지 않고 마게도냐에 가서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자 바울을 거짓말 했다고 비방하는 일이 생겼다. 거기에 대해서 바울이 하는 말이다.

"어찌 경솔히 하였으리요" 처음 계획을 하고 계획을 변경했을 때 경솔히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혹 계획하기를 육체의 이익을 따라 계획한 것도 아니라고 했다. 충동적으로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 예, 아니라 아니라" 이랬다가 저랬다가 가볍게 한 일이 아니라고 했다. 바울은 처음 계획을 세울 때 진실하게 세웠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바르게 계획을 세웠다. 계획을 바꿀 때에도 진실하게 참되게 하나님의 뜻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한 것이다.

세상 살면서 계획은 바꿀 수 있는 것인가? 바꾸면 안되는 것인가? 사람은 완전한가? 불완전한가?

불완전하다. 사람은 완전하지 않은 존재이다. 그래서 계획도, 하는 일도, 했던 말도 다 지키지 못할 때가 있다. 사람이 진실되지 않고 거짓되서가 아니라 불완전하고 연약해서 그럴 수 있다.

에스더서에 보면 메대 바사의 법 중에 고칠 수 없고 취소할 수 없는 법이 있었다. 왕이 유다 백성들을 다 죽이라고 조서를 내렸었다. 이 법을 고칠 수 없으니 유다 백성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을 죽이라는 법을 다시 만들어 내렸다. 

법도 고칠 수 있어야 되는 것이다. 계획도 바꿀 수 있어야 된다. 우리는 완전한 자가 아니다. 그래서 바꿀 수 있고, 고칠 수 있다. 헌법도 개정할 수 있다. '이 법은 완전하니까 절대 못바꾼다' 사람이 만든 것 중에는 이런 것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쉽게 계획을 바꾸면 안된다. 처음부터 참되고 진실되게 하나님의 뜻을 찾아 바르게 하려고 애를 써야 한다. 그래도 문제가 생기면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바울이 처음 세운 계획이 잘못 세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참되게 세운 것이다. 고린도에 두번 방문해서 말씀을 잘 가르쳐야 되겠다고 계획을 세웠지만 나중에 계획이 바뀌었다. 생각 없이 한 것이 아니다. 진실하고 참되고 믿음으로 했는데도 바꾸게 되었다. 


마태복음 14장에 헤롯이 생일날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는 것을 보고 기뻐서 무엇이든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했더니 그 딸이 헤로디아의 말을 듣고 세례요한의 목을 달라고 했다. 왕이 자기 체면 때문에 그 약속을 어길 수 가 없어서 세례요한을 죽여서 그 목을 주었다. 약속은 지켰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지은 것이다. 맹세하고 약속했어도 안된다고 했어야 한다. 


바울은 형편에 따라서 예 예 하고 아니라 아니라 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바울은 그런 기회주의자, 인본주의자가 아니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양심을 쓰고 진실하고 바로 하려고 했다. 


18절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미쁘신 것처럼 바울 자신도 진실하게 살려고 한다고 자신에 대해서 변호하고 있다. 만약에 바울이 자기 마음대로, 욕심대로 이랬다가 저랬다가 했다면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지 못하고 바울의 이런 변론이 성경에 기록되지 못했을 것이다. 성령께서 거짓이 성경에 기록되도록 감동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19절

이번에는 예수님을 예로 든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고린도 교회에 가서 예수님을 전했다. 예수님은 예 만 되시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않으신다. "예"는 순종하시고 성취하셨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한번도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한적이 없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일을 하셨다. 십자가의 죽음까지 순종하셨다. 그처럼 바울도 계획을 세우고 하나님의 일을 할 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하는 차원에서 했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진실하게 한 것이라고 했다. 


“[1]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매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그에게 나아와서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이 너는 집을 정리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2] 히스기야가 낯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3]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진실과 전심으로 주 앞에 행하며 주께서 보시기에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더라 [4] 이사야가 성읍 가운데까지도 이르기 전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5] 너는 돌아가서 내 백성의 주권자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왕의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너를 낫게 하리니 네가 삼 일 만에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겠고 [6] 내가 네 날에 십오 년을 더할 것이며 내가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구원하고 내가 나를 위하고 또 내 종 다윗을 위하므로 이 성을 보호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셨더라” (왕하 20:1~6)

하나님이 처음에는 히스기야가 죽을 것이라고 했는데, 두번째에는 죽지 않고 15년을 더 살게 해주시겠다고 하셨다. 무엇이 맞는 말인가? 둘 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시는 하나님인가? 아니다. 참되고 진실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계획이 바뀌고 말 내용이 달라졌지만 거짓이 아니고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요나에게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하라고 하셨는데, 요나의 말을 듣고 니느웨 성 전체가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셨다. 하나님이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신 것인가? 아니다. 


바울이 모든 것을 진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르게 했다. 하나님이 미쁘시고 예수님이 예만 되신 것처럼 자신도 그렇게 했다고 말하고 있다. 


20절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구약의 약속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우리는 "아멘" 하여 말씀대로 순종해야 한다. 


21-22절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셨다. 믿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항상 붙들어주시고 함께 하신다. 보증으로 기름을 부어주셨다. 성령충만하게 하시고 은혜를 주셨다. 우리에게도 성령이 임재해 계신다.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순종하면서, 성령의 인도와 감동을 따라가면서 "아멘" 하면서 가야 한다. 


23-24절

바울이 고린도에 가지 않은 이유가 뭔가?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내가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고후 1:23)

이유를 밝히기 전에 "내 목숨을 걸고" 말한다고 했다. "하나님을 불러 증언하시게 하노니" 하나님이 증인이라는 것이다. 이런 말은 함부로 하면 안된다. 그만큼 자신이 진실하고 참되고 바르게 모든 일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고린도에 가지 않은 이유 첫째는,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이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가지 않으므로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다. 스스로 고치고 회개하고 바로 설 수 있는 기회를 주어서 그들에게 은혜 받고 유익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처음 계획대로 바울이 갔다면 회개하지 않은 자들을 징계했을 것이다. 그러면 서로 상처받고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그러나 계획을 변경하여 가지 않으므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유익이 되었다.

둘째는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다. 기쁨을 돕는 자가 무엇인가? 만약에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이 하라는대로 끌려가고, 억지로 회개하고, 억지로 책망했다면 기쁘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에 가지 않고 기회를 주어서 스스로 회개하고 자정하면서 믿음으로 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고린도 교인들이 기쁘고 대견했다. 그 기쁨을 도왔다는 것이다. 억지로 믿도록 강요하고 끌고 가는 자세를 보이지 않고 스스로 하도록 만들어 주므로 기쁨을 얻도록 했다. 

나를 기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바울이 더 행복했을 것이다.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잘 하는 모습을 보면서 바울도 기뻤을 것이다. 

셋째는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이다. 바울이 볼 때 고린도전서 편지를 받아보고 고린도 교인들이 많이 깨닫고 고치고 믿음에 섰다고 보여졌다. 그래서 바울이 가지 않아도 되는 판단이 섰기 때문에 가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이 계획을 바꾼 것이 유익한 결과를 낳았다. 바울이 한 모든 일들은 교회 중심이다. 어떻게든지 교회를 잘 되게 하고 교회에 유익이 되게 하고 교인들이 믿음 생활을 잘 해서 천국에서 자랑이 되게 하려는 것에 초점이 있다. 바울 자신의 체면이나 욕심으로 한 일이 아니다.

우리도 언제나 교회를 위하고 교회만 생각하고 교회가 잘 되도록 행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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