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25 수요예배 설교(고린도후서 2장 1-17절/근심과 그리스도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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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랑의 근심(1-4)
2. 바울의 용서(5-11)
3. 그리스도의 향기(12-17)
바울은 약속대로 왜 고린도에 방문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계속 설명한다. 고린도 교인들을 근심하게 하거나 또 그들에 의해서 근심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1절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복음을 전해서 세운 교회이다. 해산하는 수고를 했고, 참으로 사랑하는 교회이다. 또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렇게 사랑하는 고린도 교회를 다시 방문하려고 준비하는 가운데 바울의 마음에 고민이 많았음을 엿보게 된다. 지금 방문하는 것이 유익할까? 조금 미루었다가 나중에 방문하는 것이 유익할까? 그러다가 나중에 방문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을 했다. 왜냐하면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로 바울이 방문하게 되면 엄하게 책망을 하게 되고 상처 입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다. 지금 가기 보다는 고린도 교회 자체적으로 회개하고 문제를 해결한 다음에 바울이 가면 기쁨으로 모든 일을 수습하고 성도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했다.
바울의 이런 결정은 자신의 유익과 편의를 위함이 아니고 어떻게 하는 것이 더 교회에 유익이 될까? 교회를 더 사랑하는 것일까? 고민하다가 그같이 결정을 한 것이다.
"결심하였노니" 고민하고 갈등하다가 그렇게 결심을 했다는 것이다.
2절
만약에 바울이 그들을 근심하게 한다면 바울이 그들을 만날 때 누가 기쁘게 할 수 있겠는가? 라고 했다. 바울이 방문해서 엄하게 책망해서 다 근심하게 만들면 바울을 기쁘게 할 자가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고린도 교인들을 만날 때 기쁨과 은혜 가운데 만나고 말씀으로 서로 권면하고 권면 받으면서 힘을 얻는 모습을 기대하고 있다.
3절
"내가 이같이 쓴 것은" 고린도 전서를 가리키는 것 같다. 고린도전서 5장에 나오는 범죄자를 징계하는 부분을 염두해두고 말하는 것으로 생각이 든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을 기쁘게 해야 한다. 바울이 복음을 전해서 교회를 세웠고 바울이 말씀을 가르쳐서 믿음이 자라났다. 그러므로 바울을 기쁘게 해야 한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가 문제를 처리하지 않고 가만히 두면 바울이 근심을 얻을 수 밖에 없다.
바울이 근심하게 되면 바울 혼자만의 근심이 아니고 교회 전체의 근심이 된다.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을 확신함이로라" 바울의 기쁨은 교회의 기쁨이고, 교회의 기쁨은 바울의 기쁨이다. 바울과 교회는 한마음이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를 기쁘게 하고 유익하게 하려고 한다.
4절
바울이 자신의 마음에 대해서 세가지를 기록했다. 아주 중요한 것이다. 교역자가 꼭 가져야 하고, 반사님들이 꼭 가져야 하는 마음이다.
첫째,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바울의 마음에 무거운 짐을 지는 것처럼 큰 눌림과 걱정이 있었다. 교회를 염려하는 마음이다. 어디를 가 있어도 고린도 교회가 생각이 난다. 무슨 일을 해도 고린도 교회가 잊혀지지 않는다. 교회 걱정, 염려, 성도 한사람 한사람 형편 사정을 돌아보니 무거운 짐에 눌려 있는 것 같다. 부모가 자식 걱정 하는 것처럼 교역자는 성도에 대해서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에 대해서 그런 마음을 갖고자 하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고민이 된 적이 있다. 그때 '내가 믿음 생활을 잘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고민을 했었는데, 바울도 이런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읽고 조금 위로를 받았었다. '걱정, 염려가 잘못된 것만은 아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제사장이 어깨에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짊어지고 가슴에 열두지파를 품고 제사장 역할을 했다. 그와같이 바울에게는 큰 눌림이 있었다. 교회에 대한 걱정과 염려였다. 교인 한사람 한사람을 품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바울은 이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권면과 책망을 하는 것이다.
둘째,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고린도전서를 보면 여러가지 문제들을 다 지적하고 바로 잡으라고 권면과 책망을 했다. 그때 바울이 눈물을 많이 흘렸다는 것이다. 이것이 교역자와 반사들에게 있어야 하는 마음이다. 이 마음이 없으면 안된다.
셋째,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바울에게는 고린도 교회를 향한 넘치는 사랑이 있었다. 그래서 바울이 위대한 참 사도이다. 바울은 성령의 감동으로 이 말씀을 기록했다. 진짜 그런 마음이 있었고 그런 자세로 목회를 했고 그런 자세로 편지를 쓰고 있는 것이다.
마음의 큰 눌림과 걱정. 교회 걱정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교회에 유익이 될까? 교인들이 잘될까?
많은 눈물을 흘렸다. 이것이 쉽게 잘 안되니까, 어렵고 힘든 일이 많으니까 하나님 앞에 가서 울었다.
넘치는 사랑이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바울이 이렇게 고린도 교인들을 생각하고 걱정하면서 고린도 교회에 빨리 가는 것이 유익할까? 나중에 가는 것이 유익할까? 고민하다가 지금 가지 않고 나중에 가기로 결정을 했다. 이런 바울에게 누가 비난을 할 수 있겠나? 바울은 거짓말쟁이, 변덕쟁이가 아니었다.
5절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범죄자를 말하는 것이다. 범죄자 때문에 바울이 사실 근심을 많이 했다. 그러나 자기가 근심한 것은 언급하지 않는다.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성도가 범죄하면 성도 모두가 근심하게 된다. 어느 정도라고 한 것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너무 부담갖지 않도록 권면하는 것이다.
어느 잘못을 했을 때 너무 가혹하게 처벌하면 낙심하기 쉽다. 아주 낙망하고 주저앉게 하면 안된다. 물론 이단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해야 한다.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모두에게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니고 정도에 따라 하고, 중요한 것은 낙심하지 않게 해야 한다. 아주 실망하고 낙담해서 믿음을 잃어버리면 징계의 목적에 합당하지 않다. 징계의 목적은 믿음에 바로 서게 하려는 것이다.
7절
바울이 편지를 보냈고, 고린도 교인들이 그것에 대해서 어떤 조치를 했으면 회개했을 것인데 그러면 용서하고 위로해 주라고 했다. 징계의 목적은 회개 시키고 바로 세우는데 있다. 낙심 시키고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잘못을 깨달았으면 용서해주고 위로하고 용납하라고 했다. 이 부분에서 생각할 것이 있다. 병에 걸리면 치료하고 수술해야 한다. 수술한 다음에는 잘 회복되도록 도와줘야 한다. 수술한채로 놔두면 안된다. 잘 싸매주어야 한다. 수술은 왜 하는가? 살리려고 하는 것이다. 수술 했으면 잘 싸매고 고치고 치료해 주어야 한다.
범죄하기 전에는 죄에 대해서 엄하게 가르치고 죄짓지 않도록 단단히 일러야 한다. 죄 지은 후에는 뭐가 죄인지 알려주고 회개하게 만들고 위로하고 격려해야 한다.
교회 밖에 있는 어떤 자가 이혼을 했다. 이혼한 상태로 지내다가 교회로 나왔다. 그러면 그 사람을 교회에서 받아주는가? 안받아주는가? 이혼했다고 안받아주나? 받아준다.
교회에 나오다가 신앙생활 잘 하던 사람이 이혼을 했다. 그러면 받아주려고 하는가? 내쫓으려고 하는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죄지은 것이 괜찮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죄 짓기 전에는 죄에 대해서 무섭게 가르쳐야 한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죄가 얼마나 멀리해야 하는 것인지 가르치고 또 가르쳐야 한다. 죄 짓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미 이혼을 했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받아줘야 한다. 다른 교회 가면 받아주는데, 우리 교회에서 있었던 일은 안받아주는가?
죄를 가볍게 여기자는 말이 아니고, 죄를 책망을 하지 않아도 되고, 회개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5장에서는 죄에 대해서 엄하게 말한다. 왜 책망하지 않느냐? 왜 징벌하지 않느냐? 라고 엄하게 책망한다. 그런데 이제는 용서해주라고 말한다. 한가지만 생각하면 안된다. 징계가 있고 위로도 있다. 책망이 있고 위로도 있다. 용서도 있는 것이다. 한가지로만 치우쳐 있으면 오히려 낙심시키고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살리고 고치고 바로 세우는 것이 목적이다. 이 목적을 바로 깨달아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8절
범죄한 자들에게 사랑을 베풀라고 했다. 죄짓고 잘못한 사람이지만 용서하고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계속 미워하고 계속 원수로 삼고 계속 죄인 취급을 하면 어떻게 견딜 수 있겠는가? 그렇게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죄 지은 사람마다 다 죽이고 내쫓으면 교회가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죄를 전혀 안짓는 사람이 있는가? 징계의 목적은 사람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회개시켜서 바로 세우는 것이 목적이지 내쫓고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9절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전에 책망하라고 한 말씀도 고린도 교회가 순종하는 것이 옳고, 이번에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말씀도 순종하는 것이 옳다. 하나만 순종하면 안된다. 책망할 때에는 책망하고 용서할 때에는 용서해야 한다. 자녀들에게도 이렇게 해야 한다. 야단만 치고 위로는 안해주면 안된다. 오냐 오냐만 하는 것도 옳지 않다. 두가지 모두 바르게 해서 하나님의 뜻을 세워나가므로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해야 한다.
10절
바울이 용서하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 주님 앞에서 한 것이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도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교회가 용서하면 바울도 받아들이겠고 바울이 용서하는 것도 교회도 받아들이라고 했다. 동일하게 보조를 맞추고 동일하게 일을 처리해 나가야 한다.
11절
중요한 것은 사탄에게 속지 않는 것이다. 사탄에게 이용당하고 낙심하게 되고 믿음 잃어버리고 멸망하게 되는 자리로 떨어지면 안된다. 누구도 기뻐할 수 없는 일이다. 사탄은 그렇게 하려고 한다. 뭐 하나 잘못하면 그것으로 낙심시켜서 사람을 완전히 쓰러뜨리려고 하고 뭐 하나 잘하면 그것으로 교만하게 만들어서 넘어뜨리려고 한다.
바울이 사탄의 역사를 알고 있다. 그러므로 징계가 필요하지만 회개할 자는 회개하고 용서할 자는 용서하고 사랑을 베풀라고 말씀하고 있다.
12-13절
바울이 에베소에 있다가 드로아에 가서 복음을 전했다. 그랬더니 주 안에서 문이 열렸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전도의 문을 열어주신 것이다. 전도의 문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열리고 닫힌다. 바울이 열심히 사역을 하는데 심령이 편하지 않았다.
바울이 에베소에 있을 때 고린도 교회 소식이 궁금하여 디도를 보냈었다. 그런데 디도가 빨리 돌아오지 않았다. 교회 일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걱정을 했다. '무슨 일 때문에 늦어지나?' 하고 염려가 되었다. 그래서 심령이 편하지 못했다. 두로아에서 전도의 문이 열려 열심히 복음을 전하면서도 한편으로 고린도 교회 일 때문에 괴로워하고 근심했다. 이것이 바울의 마음이다.
바울은 복음 전하는 일을 귀하게 여겨서 열심히 복음을 전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세워놓은 교회, 고린도 교회의 사정을 살피고 돌보는 일에 마음과 신경을 많이 쓰고 있었다. 어떻게든지 교회가 바로 서고 진리에 바로 서고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랬다. 큰 돌이 누르는 것처럼 걱정과 근심이 있었다.
14절
바울은 그런 중에 감사를 한다. 한편으로 염려하면서 또 감사를 한다. 심령이 편치 않아서 고민이 가득한 중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찬송을 했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바울이 가지 않아서 고린도 교회에 유익이 된다면 안가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바울이 가서 고린도 교회에 유익이 된다면 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하나님은 항상 이기게 하신다. 바울은 하나님의 일을 통해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전하고 있다.
15절
"그리스도의 향기" 바울과 성도들이 모두 그리스도의 향기이다. 향기는 좋은 냄새이다. 사람을 편하게 하고 신나게 하고 즐겁게 하고 삶을 변화시킨다. 우리 생활을 바꿀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주는 것이 좋은 향기이다. 복음이 그런 것이다. 성도가 믿는 일 하면서 주변에 좋은 영향을 끼치면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것이다.
16절
우리는 냄새를 풍긴다. 늘 복음을 증거하고 예수님을 나타내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기쁘게 여기면 다 복을 받고 주변 사람들이 유익을 얻는다. 주변 사람들이 복을 받고 유익하게 행복하게 될 것이다. 거부하고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유익이 안되고 싫고 괴로운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성도를 통해 나타난 그리스도의 향기가 반대하는 자에게는 유익이 없고 진정으로 사랑하고 받아들이는 자에게는 유익이 될 것이다.
17절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면 안된다. 순전한 진리, 복음 그대로만 전해야 한다.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성경 그대로를 전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는 길이다.
에스라, 느헤미야 서를 보면 학사 에스라는 그냥 율법서를 읽어준다. 그러면 유다 백성들이 듣고 은혜를 받는다. 설교는 하나도 없다. 읽기만 하는데도 청중들이 은혜를 받았다. 그때 성령이 역사하시고 말씀이 역사해서 살리는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이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나타내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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