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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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04 주일오전예배 설교(마태복음 6장 1-8절/누구에게 보이려고 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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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2-09-04 14:54 조회59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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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https://youtu.be/5hB3sVE1rys

산상수훈의 일부입니다. 유대인들이 지키는 세 가지 종교적 의무,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다룹니다. 이 세 가지는 경건 생활을 대표하는 것들로 신앙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이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하면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들을 보시고 그것을 고쳐주시고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이것은 유대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1. 사람에게 보이려고 의를 행하지 말라
본문에 “사람에게 보이려고”라는 말씀이 여러 번 나옵니다. 1절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2절에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5절에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16절에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목적과 의도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구제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 중요하고, 기도하고, 금식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렇게 하는 의도가 무엇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1절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여기서 의를 행한다는 것은 율법의 요구 사항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율법의 규정에 따라 선한 일을 하고 의로운 일을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렇게 의를 행할 때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면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일이 되고 맙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잘못된 태도는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고, 사람들에게 보이고, 사람들에게서 영광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을 예수님은 외식이라고 하셨습니다(2절, 5절, 16절)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책망하시면서 7번이나 “화 있을진저”라는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외식”이라는 단어가 7번이나 나옵니다. 외식이 무엇입니까?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면 ‘맡겨진 인물에 따라 연기하는 배우’ ‘무대 연기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위선자’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연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27에 경건에 대해 말하면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라는 뜻입니다. 참된 경건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많이 사람이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지만 각자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개인적으로 하나님 섬기는 것입니다. 신앙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평가받기 위함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겉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아무리 칭찬을 받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몇 가지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 ‘사람에게 보이려고’의 반대가 무엇입니까? ‘사람에게 안 보이려고’ 입니까?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하면서,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게 기도해야 하는데 누가 봤습니다. 그러면 ‘에이 내가 기도하는 것을 사람들이 봐 버렸네. 사람들 없는 곳에 가서 다시 하자’ 이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는 말씀과 대조되는 말은 ‘하나님께 보이려고’ 입니다. 즉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기도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구제, 기도, 금식, 뿐만 아니라 예배도 헌금도 봉사도 모두 다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둘째. 마태복음 5:16에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본문에는 사람에게 보이지 않게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는 너희 빛, 착한 행실을 사람들에게 비추라고 말씀합니다. 본문과는 서로 다릅니다. 이 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왜 사람에게 보이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목적이지, 내가 칭찬받고 내가 영광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고 그 착한 행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게 하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함입니다. 구제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 고넬료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고넬료는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항상 기도했습니다. 고넬료의 이런 행위가 그의 종들에게 다 알려졌습니다. 그 주변에 사는 유대인들에게도 소문이 났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책망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고 칭찬하셨습니다. 고넬료의 구제와 선행과 기도는 결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알려지기는 했지만 일부러 알리려고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구제와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습니다.

셋째. 2절, 5절, 16절에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자기가 처음에 의도하고 원했던 그대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영광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 받을 상급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은밀하게 구제하고, 은밀하게 기도하고, 은밀하게 금식한 사람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칭찬을 좀 받아도 잠깐 지나면 다 잊혀지고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께 상 받으면 그것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영광이 됩니다. 사람에게 칭찬받는 것보다 하나님께 상 받는 것이 천만 배 귀합니다.

2. 구제할 때(2-4절)
2절에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성경은 구제에 대해 강조합니다. 특히 구약에서는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들에 대한 구제를 강조하셨습니다. 레위기 19:10에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신명기 15:11에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이처럼 구제는 구약시대부터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으로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런데 특히 구제할 때 나팔을 불지 말라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이 회당과 길거리에서 구제하면서 빵이 필요한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런데 나팔을 불면서 무슨 생각을 하느냐면 자기의 행동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소문을 내서 자기가 영광을 받으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습니다. “내가 어디 사는 누군데, 이렇게 구제하는 나를 좀 봐 달라”는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구제하는 것을 사진 찍어 신문에 내고 뉴스에 내겠죠? 예수님은 이들이 구제하는 동기와 방법이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4절에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구제는 선하고 의로운 행위입니다. 구제할 때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하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누군가를 섬겼다면 잊어버리십시오. 어려운 사람을 도왔다면 기억하지 마십시오. 그럼 하나님이 기억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하나님을 뜻을 이루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마음으로 구제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알고 자기를 칭찬할까 봐 두려워하며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구제합니다. 이런 구제는 하나님께서 보시고 갚아주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 주님께서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최후 심판 때에 주님께서 모든 민족을 모으고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양은 오른쪽에 두고 염소는 왼쪽에 둡니다. 그리고 오른편에 있는 양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고 하십니다. 35-36절에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의인들이 대답합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이들은 실제로 이런 선한 일들을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다 했지만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 잊어버린 것입니다. 또 하나는 사람에게는 했지만 주님께는 하지 않았던 것으로 봅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 기억하고 갚아주십니다. 40절에 보면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3. 기도할 때(5-8절)
5절에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성도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셨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기도의 내용과 형식, 시간까지 모두 규격화 시키고 의식화시켰습니다. 상황에 따라 해야 할 기도문을 만들었습니다. 기도할 시간도 9시, 12시, 3시로 정했습니다. 이런 기도에 익숙해지자 자기도 모르게 점점 외식에 빠졌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일부러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했습니다. 시간을 끌면서 길게 기도합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고 '아, 저 바리새인은 참 기도 많이 하시는구나. 참 경건하신 분이다. 참 존경스럽다.' 하며 수근거립니다. 그러면 그것을 들으면서 마음속으로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사람에게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게 되기가 쉽습니다. 예배 시간에 대표 기도할 때 사람을 의식하기 쉽습니다.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남들에게 들으라고 평소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이용해서 미운 사람을 공격하고,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평소에 대놓고 말하기 껄끄러운 것을 기도하면서 막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런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6절에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골방에 들어가” 골방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하나님과 내가 단둘이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말합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방해를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시고 내가 그분과 상대할 수 있는 여건만 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골방이 될 수 있습니다. “문을 닫고” 세상의 것이 자기 마음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자기 마음이 세상에 나가지 못하도록 자기 마음을 지키라는 뜻입니다. 기도할 때 은밀한 골방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고요한 심령의 세계를 찾으려면 시간을 많이 들이고 애를 많이 써야 합니다.
기도를 시작하면 처음에는 마음이 산만하고 흩어지고 여러 가지 잡념이 들어와서 기도의 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이것은 심령이 골방에 들어가지 못한 증거입니다. 거기서 골방에 들어가려고 더욱 힘을 쓰고 매달려서 전심전력을 기울이면 점점 마음이 고요해지고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요란한 곳을 피하여 산이나 저 들판에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어떤 문제도 작아 보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가 있다고 고백합니다.
7절에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중언부언은 믿음 없이 기도하면서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미신 믿는 사람들이 주문 외우듯이 뜻도 모르는 말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입니다. 많이 반복하고 시간을 오래 끌면 하나님이 더 잘 들어줄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복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기도하고, 또 믿음으로 기도하는 것은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해도 괜찮습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3번이나 같은 내용으로 기도를 반복하셨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비 오게 해달라고 일곱 번이나 같은 내용으로 기도를 반복했습니다.

4. 금식할 때(16-18절)
16절에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사람은 누구나 음식을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은 기본적인 욕구를 포기하고 자기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금식은 큰 죄를 회개할 때,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기도할 때 금식합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 금식했습니다. 금식이 의식화되고 습관화가 된 것입니다. 금식을 하면 배가 고프고, 얼굴이 초췌해지고, 힘이 빠지고, 고통이 따릅니다. 바리새인들은 거기에다가 인위적으로 꾸미고 가장해서 더 피곤한 것처럼, 힘이 없는 것처럼, 흉내를 내고 다니며 금식하는 표시를 내려고 했습니다.
17절에 보면 주님은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했습니다. 금식 자체를 금한 것이 아니라 금식하는 표시를 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금식은 의식이나 행사로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바로 맺기 위한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사람에게 보이기 위해서 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합니다. 금식은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께 바로 보이고, 하나님께 그 목소리를 상달케 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해야 합니다. 그러면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십니다.
우리는 이미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 자체가 복이고,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한다는 것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입니다.
사람이 알아주든지, 알아주지 않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여러분의 삶을 사십시오.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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