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11 주일오전예배 설교(마가복음 6장 1-6절/예수님의 고향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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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2-09-11 14:41
조회67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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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인데 고향은 방문하셨습니까? 오랜만에 부모님과 형제들을 만나고 고향 사람들을 만나서 즐거운 시간 보내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고향을 방문한 내용이 나옵니다. 주님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주시는 교훈을 살피겠습니다.
1. 예수께서 고향으로 가시니
1절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거기가 어디입니까? 가버나움입니다. 예수님은 이 가버나움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고 열두 해를 혈우증으로 앓던 여인을 고쳤습니다. 거기서 환영받고 높임 받을 수 있는데 거기를 떠나신 것입니다. 주님은 원래 하늘에 계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영광 받는 자리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떠나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영광 받을 수 있는 자리를 떠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시는 낮은 자리로 가셨습니다.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신 후 사람들이 왕 삼으려 하자 그것을 떠나셨습니다.
“고향으로 가시니” 예수님 고향이 어디입니까? 나사렛입니다. 태어나기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나사렛 예수라고 부릅니다. 나사렛에서 자라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할 것을 아시면서도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잘 알고, 그의 가족들을 너무 잘 아는 고향 사람들은 주님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2.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2절에 보면 안식일이 되어 예수님은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무엇을 가르치셨습니까?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 자신이 이사야서에 예언한 그 메시야인 것을 알려주며 말씀을 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놀랐습니다. 예수님을 어릴 때부터 봐왔던 고향 사람들은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가 주님의 가르침이 권세와 능력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누가복음 4:36절에 “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산상설교 후에도 비슷한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마태복음 7:28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예수님의 말씀에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힘과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때가 은혜받을 때이고, 복 받을 때입니다.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고 동시에 궁금했습니다. 어디서 이런 능력을 얻었을까, 어디서 이런 놀라운 힘을 얻었을까 궁금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약간 다른 차원의 말씀이지만 성도에게는 세상이 궁금해할 수 있는 그런 뭔가가 있어야 합니다. 돈이 없는데도 비굴하지 않고 자신이 넘치고, 많이 배우지 않았는데도 지혜와 총명이 있고, 배경이 좋아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이 함부로 할 수 없는 거룩한 위엄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병이 걸렸는데도 절망하지 않고 가난하게 살면서도 항상 감사하는 생활을 한다면 사람들이 놀라고, 그런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할 것입니다.
3. 예수를 배척한지라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큰 은혜를 받았고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마음에 깊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놀라고 감탄만 하고 삶으로 연결시키지 못했습니다. 결국 말씀을 거부하고 예수님조차 거부합니다. 말씀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이들은 고향 사람들입니다. 자기 고향 사람이기에 예수님을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예수님의 육신적인 면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절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안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단지 마리아의 아들 목수로만 알았습니다. 너무 가깝기 때문에 예수님을 경멸했습니다. 사람 관계에서도 자주 만나는 사람, 그래서 아주 친해지다 보면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대방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외적인 면만 보았습니다. 가족관계, 직업 등 겉모습만 보았습니다. 이런 내용들은 예수님에 대한 껍데기 지식입니다.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것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하신 삼위일체의 한 분으로는 알지 못했고,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면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오히려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지이고 교만입니다. 선입견과 편견이 사람을 바로 볼 수 없게 합니다. 편견이 보물을 놓치게 합니다. 자기들도 나사렛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사렛 사람이라고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요한복음에도 이런 편견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46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전도하자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만나보지도 않고 무시해버립니다. 우리도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누군가를 배척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둘째,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지식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7:27에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어디서 오는지 모르게 오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디서 왔는지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잘못 가르친 것입니다. 구약성경 어디에도 이런 내용이 없습니다. 미가서 5:2에는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을 말씀하셨고, 이사야서에는 나사렛 사람이라 칭할 것이라 하셨고,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실 것도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 하나 잘못 배우니까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합니다.
4절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고향 사람들과 친척들이 잘 안다고 생각하고 무시합니다. 친한 것 때문에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잘 아니까 더 잘하고, 친하니까 더 대접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가장 존중해야 할 사람이 가족입니다. 그런데 가깝다고 무시하고, 친하다고 존중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4.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5-6절에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가버나움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능력을 나타내신 주님께서 정작 고향에서는 능력을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이 말은 능력이 없어졌다는 말이 아니고, 능력을 행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불신앙으로 마음이 굳어진 사람들에게 능력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복을 주고 싶은데 줄 수가 없습니다. 가르치려고 해도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적을 베풀려고 해도 기적을 원하지 않습니다. 병을 고치려고 해도 고침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닫고 믿지 않으면 아무것도 줄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13:58에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얼마나 비극입니까? 결과적으로 나사렛 사람들이 큰 손해를 본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고,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했고, 주님의 구원을 누리지도 못했고, 주님의 크고 놀라운 영광을 체험할 기회를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주님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통해서 나타나야 할 은혜와 사랑과 기적의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오늘 비슷한 비극이 우리 집이나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내 이웃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삶이 변했다고 합니다. 예수님 믿고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체험합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은혜를 주시지 않는다고 생각되고, 우리 집에는 기적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되십니까? 왜 나에게는 응답도 없고, 표적도 없고, 하나님의 살아계시는 능력의 증거들이 나타나지 않을까요? 그 이유가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까? 6절 끝에 보면 주님은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습니다. 이해가 안 됐습니다. 주님이 나의 믿음을 보시고 이상히 여기시지는 않을지 돌아봅시다.
누가복음 4:25-30절에 마가복음에 없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 시대에 삼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서 온 땅에 기근이 심할 때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들이 있었으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누구에게도 보냄을 받지 않고 사르밧 과부에게로 보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부만 은혜를 받았습니다. 또한 엘리사 선지자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 환자들이 있었으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하게 되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의 나아만 한 사람만 고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와 나아만의 이야기는 무엇을 말씀합니까?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믿지 않고 배척하다가 은혜를 받지 못하는데 오히려 먼 곳에 사는 이방인들이 믿고 복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자 사람들이 분노하고 대적합니다(눅 4:28). 그리고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4:29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예수님을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보지 않습니다.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한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내가 아는 지식이나 선입견으로 말씀을 판단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오랫동안 말씀을 공부하고 연구했어도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이미 아는 말씀이라고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런 생각들이 은혜를 받는 데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4:30에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잃었습니다. 구원도, 은혜도, 잃었습니다. 스스로 복을 차버린 것입니다. 마가복음 5:34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믿는 것만큼 복을 받습니다. 주님의 능력은 동일합니다. 타향에서나 고향에서나 주님의 능력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믿는 자에게 능력을 베풀어주십니다.
주님께서 스스로 고향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찾아온 복도 누리지 못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주일마다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마음을 열고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을 마음에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 만날 수 있는 기회, 은혜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추석 연휴인데 고향은 방문하셨습니까? 오랜만에 부모님과 형제들을 만나고 고향 사람들을 만나서 즐거운 시간 보내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본문에는 예수님께서 고향을 방문한 내용이 나옵니다. 주님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당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주시는 교훈을 살피겠습니다.
1. 예수께서 고향으로 가시니
1절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사” 거기가 어디입니까? 가버나움입니다. 예수님은 이 가버나움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고 열두 해를 혈우증으로 앓던 여인을 고쳤습니다. 거기서 환영받고 높임 받을 수 있는데 거기를 떠나신 것입니다. 주님은 원래 하늘에 계셨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영광 받는 자리에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을 떠나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도 영광 받을 수 있는 자리를 떠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시는 낮은 자리로 가셨습니다.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행하신 후 사람들이 왕 삼으려 하자 그것을 떠나셨습니다.
“고향으로 가시니” 예수님 고향이 어디입니까? 나사렛입니다. 태어나기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나사렛 예수라고 부릅니다. 나사렛에서 자라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할 것을 아시면서도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잘 알고, 그의 가족들을 너무 잘 아는 고향 사람들은 주님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2.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2절에 보면 안식일이 되어 예수님은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무엇을 가르치셨습니까?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 자신이 이사야서에 예언한 그 메시야인 것을 알려주며 말씀을 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놀랐습니다. 예수님을 어릴 때부터 봐왔던 고향 사람들은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가 주님의 가르침이 권세와 능력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누가복음 4:36절에 “다 놀라 서로 말하여 이르되 이 어떠한 말씀인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명하매 나가는도다 하더라” 산상설교 후에도 비슷한 반응이 나타났습니다. 마태복음 7:28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예수님의 말씀에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힘과 능력이 있었습니다. 이때가 은혜받을 때이고, 복 받을 때입니다.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고 동시에 궁금했습니다. 어디서 이런 능력을 얻었을까, 어디서 이런 놀라운 힘을 얻었을까 궁금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사는 자들입니다. 약간 다른 차원의 말씀이지만 성도에게는 세상이 궁금해할 수 있는 그런 뭔가가 있어야 합니다. 돈이 없는데도 비굴하지 않고 자신이 넘치고, 많이 배우지 않았는데도 지혜와 총명이 있고, 배경이 좋아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이 함부로 할 수 없는 거룩한 위엄이 있다면 좋겠습니다. 병이 걸렸는데도 절망하지 않고 가난하게 살면서도 항상 감사하는 생활을 한다면 사람들이 놀라고, 그런 힘은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할 것입니다.
3. 예수를 배척한지라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큰 은혜를 받았고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들은 말씀을 마음에 깊이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놀라고 감탄만 하고 삶으로 연결시키지 못했습니다. 결국 말씀을 거부하고 예수님조차 거부합니다. 말씀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이 문제입니다. 이들은 고향 사람들입니다. 자기 고향 사람이기에 예수님을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예수님의 육신적인 면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3절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안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단지 마리아의 아들 목수로만 알았습니다. 너무 가깝기 때문에 예수님을 경멸했습니다. 사람 관계에서도 자주 만나는 사람, 그래서 아주 친해지다 보면 함부로 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상대방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들은 주님의 외적인 면만 보았습니다. 가족관계, 직업 등 겉모습만 보았습니다. 이런 내용들은 예수님에 대한 껍데기 지식입니다. 알아도 되고 몰라도 되는 것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하신 삼위일체의 한 분으로는 알지 못했고,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면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잘 모르는 사람들이 오히려 잘 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지이고 교만입니다. 선입견과 편견이 사람을 바로 볼 수 없게 합니다. 편견이 보물을 놓치게 합니다. 자기들도 나사렛 사람입니다. 그런데 나사렛 사람이라고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요한복음에도 이런 편견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46에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전도하자 나다나엘은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만나보지도 않고 무시해버립니다. 우리도 선입견이나 편견으로 누군가를 배척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둘째,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지식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7:27에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어디서 오는지 모르게 오신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디서 왔는지 알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잘못 가르친 것입니다. 구약성경 어디에도 이런 내용이 없습니다. 미가서 5:2에는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을 말씀하셨고, 이사야서에는 나사렛 사람이라 칭할 것이라 하셨고, 십자가에서 고난받으실 것도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 하나 잘못 배우니까 예수님을 보고도 믿지 못합니다.
4절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선지자가 자기 고향과 자기 친척과 자기 집 외에서는 존경을 받지 못함이 없느니라 하시며” 고향 사람들과 친척들이 잘 안다고 생각하고 무시합니다. 친한 것 때문에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잘 아니까 더 잘하고, 친하니까 더 대접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그렇습니다. 가장 존중해야 할 사람이 가족입니다. 그런데 가깝다고 무시하고, 친하다고 존중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4.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5-6절에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자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고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더라” 가버나움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능력을 나타내신 주님께서 정작 고향에서는 능력을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이 말은 능력이 없어졌다는 말이 아니고, 능력을 행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불신앙으로 마음이 굳어진 사람들에게 능력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복을 주고 싶은데 줄 수가 없습니다. 가르치려고 해도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적을 베풀려고 해도 기적을 원하지 않습니다. 병을 고치려고 해도 고침을 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닫고 믿지 않으면 아무것도 줄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13:58에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얼마나 비극입니까? 결과적으로 나사렛 사람들이 큰 손해를 본 것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했고,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했고, 주님의 구원을 누리지도 못했고, 주님의 크고 놀라운 영광을 체험할 기회를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주님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통해서 나타나야 할 은혜와 사랑과 기적의 기회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오늘 비슷한 비극이 우리 집이나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내 이웃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삶이 변했다고 합니다. 예수님 믿고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체험합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은혜를 주시지 않는다고 생각되고, 우리 집에는 기적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생각되십니까? 왜 나에게는 응답도 없고, 표적도 없고, 하나님의 살아계시는 능력의 증거들이 나타나지 않을까요? 그 이유가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까? 6절 끝에 보면 주님은 그들이 믿지 않음을 이상히 여기셨습니다. 이해가 안 됐습니다. 주님이 나의 믿음을 보시고 이상히 여기시지는 않을지 돌아봅시다.
누가복음 4:25-30절에 마가복음에 없는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 시대에 삼년 육 개월 동안 하늘이 닫혀서 온 땅에 기근이 심할 때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들이 있었으나, 엘리야는 그들 가운데 누구에게도 보냄을 받지 않고 사르밧 과부에게로 보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부만 은혜를 받았습니다. 또한 엘리사 선지자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나병 환자들이 있었으나 그들 가운데 아무도 깨끗하게 되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의 나아만 한 사람만 고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르밧 과부와 나아만의 이야기는 무엇을 말씀합니까? 가까이 사는 사람들은 믿지 않고 배척하다가 은혜를 받지 못하는데 오히려 먼 곳에 사는 이방인들이 믿고 복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자 사람들이 분노하고 대적합니다(눅 4:28). 그리고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4:29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예수님을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참으로 무서운 사람들입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보지 않습니다. 오만과 편견으로 가득한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내가 아는 지식이나 선입견으로 말씀을 판단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오랫동안 말씀을 공부하고 연구했어도 더 큰 은혜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이미 아는 말씀이라고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런 생각들이 은혜를 받는 데 방해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누가복음 4:30에 “예수께서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가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잃었습니다. 구원도, 은혜도, 잃었습니다. 스스로 복을 차버린 것입니다. 마가복음 5:34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믿어야 구원받습니다. 믿는 것만큼 복을 받습니다. 주님의 능력은 동일합니다. 타향에서나 고향에서나 주님의 능력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믿는 자에게 능력을 베풀어주십니다.
주님께서 스스로 고향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고향 사람들은 찾아온 복도 누리지 못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주일마다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마음을 열고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주님을 마음에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러면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것입니다.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 만날 수 있는 기회, 은혜받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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