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16 주일오전예배 설교(마태복음 7장 1-12절/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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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https://youtu.be/YqxAAcPn_NU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황금률’이라고 불리는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말씀인데, 알기만 하지 이 말씀처럼 살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1-6절은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이고, 7-11절은 기도하라는 말씀이고, 12절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는 말씀입니다. 언뜻 보면 연관성이 없는 것 같은데 사실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12절은 “그러므로”라고 시작합니다. 앞에 내용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접속사입니다.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있는 그대로 그 사람을 믿어주고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비판하지 말고, 기도해주고, 잘 대해주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살피겠습니다.
1. 율법과 선지자
12절에 끝에 “율법이요 선지자”라고 했는데 구약 전체를 가리킵니다. 율법의 핵심 내용, 선지자들이 전한 말씀의 핵심 내용이 이것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차원이 높은 교훈입니다. 주님은 우리 성도가 이렇게 고상하고 차원 높은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의 원리를 말씀한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원리에서 떠났을 때 율법을 가지고 그들을 책망하였습니다. 마 22:36-40에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그때 주님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계명의 근본정신이고 근본정신이 사라지면 그 계명은 껍데기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롬 13:8에서 바울은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라고 했고, 10절에는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일생동안 이 말씀들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며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은 일평생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셨고, 이웃을 섬기며 대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주님은 온 인류를 섬긴 가장 위대한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나에게 하는 것은 잘 압니다. 그러나 내가 남들에게 어떻게 하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하는 말이 남들에게 얼마나 고통을 주고 피해를 주는지 너무나 모르고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의 모습을 깨닫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잘못을 고치지 못하고 계속 문제를 일으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습니까?
2. 비판하지 말라
1-2절에 비판하지 말라고 하고 헤아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비판”이 무엇입니까? 비판하는 것은 심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자기가 심판자의 자리에 앉아서 다른 사람을 폄론하고 정죄하는 것입니다. 심판과 정죄는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습니다. “헤아림”은 달아본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의 인격과 마음을 달아보고 헤아려 보는 것입니다. 즉 저 사람의 인격은 어느 정도나 될까? 저 사람의 믿음은 어느 정도일까? 추측하고 헤아리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비판받는 것은 싫어하면서도 남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남이 나에게 무례하게 구는 것이 싫다면 나도 남에게 무례하게 굴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무시당하는 것이 싫다면 나도 남을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는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비판받는 것이 싫고, 헤아림 당하는 것이 싫고, 정죄 받는 것이 싫고, 남들이 나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이 싫거든 나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늘 다른 사람 입장에 서서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비판하면 그 비판이 부메랑처럼 내게로 돌아오고, 내가 헤아리면 그 헤아림이 기준이 되어 내가 헤아림을 당합니다. 롬 2:1에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갈 6:1에서 바울은 ‘너 자신을 살펴보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사람들에게 아무렇게 해도 괜찮고 하나님 앞에만 바로 하면 된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비판을 받습니다. 우리는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도 실수할 수 있고 우리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다른 사람을 정확하게 판단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약 4:11-12에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 우리는 남을 판단할 자격도 없고 제대로 판단할 능력도 없습니다.
참고로 “비판하지 말라”는 것은 옳고 그릇 것에 대해서 분별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와 비진리를 분별해야 합니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 비판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7장 끝부분에서 많은 것을 분별하라고 하셨습니다. 13-14절에서 좁은 문과 넓은 문, 좁은 길과 넓은 길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15절에서는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라고 하셨습니다. 24절에서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비판하지 말라는 말은 옳고 그름과 진리와 비진리를 분별하지 말라는 말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신앙적인 분별과 인간적인 비판은 다릅니다.
3.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라
3-5절에 보면 형제의 눈 속에는 티가 있다고 말하고, 내 눈 속에는 들보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티’는 겉으로 드러난 허물, 행동으로 나타난 작은 허물을 가리킵니다. ‘들보’는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자기 속에 들어 있는 부패성, 죄악성을 가리킵니다. 구원받은 성도에게도 부패성이 있고 죄악성이 있습니다. 자기 속의 부패성은 들보처럼 큰 것이고 형제의 드러난 허물은 티처럼 작은 것입니다. 티와 들보를 비교할 수 있습니까? 마가복음 7:21-23에 사람의 속에서 나오는 것 즉 마음에서 나오는 것을 열거했습니다.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자기 속에 있는 이 죄악성 때문에 애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자기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내야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도 빼낼 수 있습니다.
6절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여기 ‘거룩한 것’ ‘진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자기를 단장하고 꾸미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 거룩한 것으로, 그 진주로, 자기를 단장하고 잘 꾸미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그러나 개나 돼지는 거룩한 것을 주어도 거룩한 줄 모르고 진주를 주어도 값비싼 것인 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진리를 주신 것은 그 말씀으로 자기를 가꾸고 단장해서 거룩한 성도가 되게 하고, 하나님의 일을 잘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가지고 다른 사람 비판하는 일이나 한다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는 것이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일은, 거룩한 것을 더럽히고 은혜와 축복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4. 비판하지 말고 기도하라
성도는 기도해야 합니다. 7-11절에 보면 구하면 주시고 찾으면 찾게 하시고 두드리면 열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비판하거나 다툴 필요 없이 기도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비판하는 사람을 훌륭한 줄 압니다. 그러나 비판은 누구든지 할 수 있습니다. 축구를 전혀 못 하는 사람도 선수들이 실수하면 비판하고, 바둑을 둘 줄 모르는 사람도 옆에 앉아서 훈수를 둡니다. 자기는 더 못하면서도 남을 비판하는 일은 잘합니다. 진짜 훌륭한 사람은 비판하는 사람이 아니라 도와주는 사람입니다. 기도해주는 사람입니다. 말없이 일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비판하지 않습니다. 비판하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비판은 기도를 막습니다. 비판은 마음을 닫게 만들고 담을 쌓게 만듭니다. 비판은 인간관계를 무너뜨리고 하나님과 관계도 막히게 합니다. 벧전 3:7에 ‘기도가 막히지 않게 하라’고 했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다투고 나면 기도가 막힙니다. 기도가 막혔다는 것은 하나님의 관계가 중단됐다는 것입니다. 비판하다가 다투고 싸우면 기도가 막힙니다. 기도가 막히게 하지 마십시오. 구하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방법 중에 가장 좋은 것은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5.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 말씀은 적극적으로 남을 대접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대접을 받으려고 합니다. 어른이나 아이나 대접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서로 대접을 더 많이 받으려고 하다가 다투기도 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는 계산을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얼마나 받았느냐 계산해서 그만큼 대접하려고 합니다. 성도는 주의 말씀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자기는 좋은 대접을 받기 원하면서 다른 사람은 잘 대접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먼저 대접하십시오. 적극적으로 대접하십시오. 남에게 칭찬받기 원하십니까? 그러면 먼저 칭찬하십시오. 남에게 인정받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먼저 상대방을 인정해주십시오. 남에게 존경받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먼저 상대방을 존경하십시오.
귀하게 여김을 받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먼저 상대방을 귀하게 여기십시오. 사랑받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먼저 사랑하십시오. 다른 사람이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먼저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십시오. 이것이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먼저 나 자신이 변하게 될 것이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변하게 될 것이고, 온 세상이 변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엄청난 대접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받을만한 자격이 없음에도 과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과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남을 대접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이 세상에 사실 때 평생을 대접하며 사셨습니다. 섬기며 사셨습니다. 다른 사람을 대접하는 일은 주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성숙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내가 얼마나 성숙한 사람인지 알기 원하십니까? 어떤 기준으로, 무엇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까? 교회를 몇 년 다녔느냐는 것이 아닙니다. 직분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가 아닙니다. 나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것은 얼마나 주님처럼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말씀을 실천하는가, 얼마나 다른 사람들을 대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대접합시다. 비판하지 말고 헤아리지 맙시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사랑을 베풉시다. 우리 주님처럼 살아 봅시다. 천국 백성답게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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