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13 주일오전예배 설교(고린도후서 4장 7-10절/낙심하지 않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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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2-11-13 14:50
조회60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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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낙심하지 아니한다.”는 말이 3번 나옵니다. 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8절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이것은 사도 바울에게 낙심할만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렇지만 낙심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이겼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낙심처럼 나쁜 것은 없습니다.
“낙심”이라는 말은 ‘마음이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마음에 힘이 없어서 자기의 의지대로 마음을 붙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낙심은 영적인 자살과 같습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낙심시키는 것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고 오해할 때 낙심하게 되고, 열심히 일하는데 알아주지 않고 비방할 때 낙심하게 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하다가 고난이 오고 박해가 올 때 낙심하기도 합니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낙심할만한 일을 만났을 때 승리한 바울에게서 비결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었기 때문
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 말씀을 보면 바울이 낙심할 뻔한 이유가 직분과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는 예수님께 직접 부르심을 받고, 또 예수님이 직접 보낸 사람이어야 하는데, 바울은 예수님 생전에 보내심을 받은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고 비방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예수 믿는 사람 붙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강한 빛과 음성으로 찾아오셔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말씀으로 불러주시고, “너는 이방인에게 내 이름을 전할 나의 그릇이라” 하시면서 주님께서 직접 사도로 택하여 세워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가룟유다 대신 12사도의 반열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섭리로 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비방하며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사도인 것을 평생 변호하며 말씀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참으로 충성된 종이었습니다. 사도 중에 으뜸가는 사도였습니다. 참으로 많은 교회를 세우고, 신약성경의 절반이나 기록했습니다. 그렇게 일을 많이 하고 충성된 일군으로 살았으나 어떤 사람들은 바울은 사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그의 서신 서두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이렇게 자신의 사도직을 변명합니다.
바울은 인정을 못 받은 선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많은 대적으로부터 멸시와 천대와 비난을 받았습니다. 바울에게는 대적도 많았고, 원수들의 훼방도 많았고, 거짓 교사들의 방해도 많았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에 온 세상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모여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에 보면 구리 장색 알렉산더는 심히 대적하며 많은 해를 끼쳤다고 했습니다. 바울에게는 온 세상이 다 적이었습니다. 쉬운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낙심할만한 일이 많았지만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1절을 다시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에 있는 3장과 연결하는 접속사입니다. 3장에서 복음의 직분은 영의 직분이고, 살리는 직분이고, 영광스러운 직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긍휼하심을 입어”라는 말입니다. 디모데전서 1:13에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바울은 주님을 대적하고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다니던 자였습니다. 비방자요 박해자요 훼방자였습니다. 죽어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습니다. 긍휼하심을 입은 까닭이 무엇입니까? 디모데전서 1:16에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이 주님을 대적하고 악을 행한 모든 것을 일체 참으시고 긍휼을 베푼 것은 주님이 바울에게 한 것을 본 받아서 후에 다른 사람들이 바울에게 대적하고 악을 행해도, 주님을 생각하고 본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알아주든지, 알아주지 않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습니다.
2. 질그릇에 담긴 보배 때문.
두 번째 바울이 낙심할 뻔한 이유는 자신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환난과 핍박을 당할 때 자신이 질그릇과 같이 연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조금만 어려움을 당해도 상처받고 조금만 건드려도 깨어질 수밖에 없는 질그릇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질그릇 안에 보배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은그릇인가 금 그릇인가 그것이 중요한 것 아닙니다. 그릇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담고 있는 것이 그릇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아무리 금 그릇이라도 쓰레기를 담고 있으면 쓰레기통입니다.
보배란 바울 안에 계시는 예수님입니다. 말씀이 보배이고, 믿음이 보배이고, 직분이 보배입니다. 하나님이 질그릇에 보배를 주신 것은 진정한 능력은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8-9절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쌓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사람들에게 모욕당하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며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수 없이 많이 하고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속에서 역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돌로 쳐서 죽이는 일을 당했지만 버림바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앞에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심히 큰 능력을 가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능치 못할 것이 없습니다. 의인은 7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자들입니다. 고린도후서 6:8-10에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우리도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우리도 바울처럼 승리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보배를 간직한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전파하다가 죽음에 던져지는 상황을 겪었지만 그런 상황에서 오히려 예수님의 생명이 드러났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신비한 힘을 보게 했습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만 바라봅시다.
3.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기 때문.
세 번째로 바울이 낙심할 뻔한 이유는 육체의 건강과 관련이 있습니다. 16절에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겉 사람”이란 육체를 말하고 “낡아진다”는 것은 쇠약해지고 병들고 늙어간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몸은 약해졌으나 마음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평생 병을 짊어지고 살았습니다. 바울의 몸에는 사단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3번이나 기도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고쳐주시지 않고 교만하지 않게 하려고 은혜로 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면서 살았습니다. 바울은 이제 늙고 병들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환난을 당하고 매를 맞고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많은 환난을 당하는 동안 바울의 겉 사람은 점점 낡아졌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바울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졌기 때문입니다(16절). 속사람은 중생한 영혼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겉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문제는 속사람입니다. 마음속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은혜 속에서 살 때 속사람이 강건해집니다.
17절에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바울은 환난이 영광을 이루는 줄 알았습니다. 환난은 잠시 받는 것이고 영광은 영원합니다. 환난은 작고 가벼운 것이지만 영광은 크고 무거운 것입니다. 바울은 현재 당하는 환난은 장차 천국에서 받을 영광과는 족히 비교할 수가 없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로마서 8:17-18에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8절에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여기 “주목하는 것”이란 말은 ‘소망한다,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바라보고 소망하는 것은 보이는 세상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신령한 것, 즉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보이는 세상의 것은 잠깐이며, 없어지는 아침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요한일서 2:17에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여기서 생각해봅시다.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봅니까? 믿음으로 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고, 천국이 보이고, 하늘의 상급이 보이고, 면류관이 보입니다. 디모데후서 4:8에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도 바울처럼 어려움을 많이 당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바울처럼 낙심할 만한 일이 많았던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세운 고린도 교회에서 조차 바울을 사도로 믿어주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낙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환난 중에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보이지 않는 신령한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낙심하지 아니한다.”는 말이 3번 나옵니다. 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8절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이것은 사도 바울에게 낙심할만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렇지만 낙심하지 아니하고 믿음으로 이겼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낙심처럼 나쁜 것은 없습니다.
“낙심”이라는 말은 ‘마음이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마음에 힘이 없어서 자기의 의지대로 마음을 붙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낙심은 영적인 자살과 같습니다. 세상에는 우리를 낙심시키는 것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고 오해할 때 낙심하게 되고, 열심히 일하는데 알아주지 않고 비방할 때 낙심하게 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하다가 고난이 오고 박해가 올 때 낙심하기도 합니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승리하기 위해서는 낙심할만한 일을 만났을 때 승리한 바울에게서 비결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1.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었기 때문
1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이 말씀을 보면 바울이 낙심할 뻔한 이유가 직분과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는 예수님께 직접 부르심을 받고, 또 예수님이 직접 보낸 사람이어야 하는데, 바울은 예수님 생전에 보내심을 받은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고 비방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을 제대로 모르는 사람입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예수 믿는 사람 붙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강한 빛과 음성으로 찾아오셔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말씀으로 불러주시고, “너는 이방인에게 내 이름을 전할 나의 그릇이라” 하시면서 주님께서 직접 사도로 택하여 세워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가룟유다 대신 12사도의 반열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섭리로 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비방하며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이 사도인 것을 평생 변호하며 말씀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참으로 충성된 종이었습니다. 사도 중에 으뜸가는 사도였습니다. 참으로 많은 교회를 세우고, 신약성경의 절반이나 기록했습니다. 그렇게 일을 많이 하고 충성된 일군으로 살았으나 어떤 사람들은 바울은 사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그의 서신 서두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이렇게 자신의 사도직을 변명합니다.
바울은 인정을 못 받은 선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많은 대적으로부터 멸시와 천대와 비난을 받았습니다. 바울에게는 대적도 많았고, 원수들의 훼방도 많았고, 거짓 교사들의 방해도 많았습니다. 고린도전서 4장에 온 세상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모여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에 보면 구리 장색 알렉산더는 심히 대적하며 많은 해를 끼쳤다고 했습니다. 바울에게는 온 세상이 다 적이었습니다. 쉬운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낙심할만한 일이 많았지만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1절을 다시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에 있는 3장과 연결하는 접속사입니다. 3장에서 복음의 직분은 영의 직분이고, 살리는 직분이고, 영광스러운 직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긍휼하심을 입어”라는 말입니다. 디모데전서 1:13에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바울은 주님을 대적하고 예수 믿는 자들을 잡으러 다니던 자였습니다. 비방자요 박해자요 훼방자였습니다. 죽어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습니다. 긍휼하심을 입은 까닭이 무엇입니까? 디모데전서 1:16에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이 주님을 대적하고 악을 행한 모든 것을 일체 참으시고 긍휼을 베푼 것은 주님이 바울에게 한 것을 본 받아서 후에 다른 사람들이 바울에게 대적하고 악을 행해도, 주님을 생각하고 본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알아주든지, 알아주지 않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습니다.
2. 질그릇에 담긴 보배 때문.
두 번째 바울이 낙심할 뻔한 이유는 자신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환난과 핍박을 당할 때 자신이 질그릇과 같이 연약하고 깨어지기 쉬운 존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조금만 어려움을 당해도 상처받고 조금만 건드려도 깨어질 수밖에 없는 질그릇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질그릇 안에 보배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은그릇인가 금 그릇인가 그것이 중요한 것 아닙니다. 그릇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담고 있는 것이 그릇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아무리 금 그릇이라도 쓰레기를 담고 있으면 쓰레기통입니다.
보배란 바울 안에 계시는 예수님입니다. 말씀이 보배이고, 믿음이 보배이고, 직분이 보배입니다. 하나님이 질그릇에 보배를 주신 것은 진정한 능력은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8-9절에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쌓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사람들에게 모욕당하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며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감옥에 갇히기도 수 없이 많이 하고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속에서 역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돌로 쳐서 죽이는 일을 당했지만 버림바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앞에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심히 큰 능력을 가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능치 못할 것이 없습니다. 의인은 7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자들입니다. 고린도후서 6:8-10에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우리도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우리도 바울처럼 승리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10절에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보배를 간직한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전파하다가 죽음에 던져지는 상황을 겪었지만 그런 상황에서 오히려 예수님의 생명이 드러났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신비한 힘을 보게 했습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에게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만 바라봅시다.
3.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기 때문.
세 번째로 바울이 낙심할 뻔한 이유는 육체의 건강과 관련이 있습니다. 16절에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겉 사람”이란 육체를 말하고 “낡아진다”는 것은 쇠약해지고 병들고 늙어간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몸은 약해졌으나 마음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평생 병을 짊어지고 살았습니다. 바울의 몸에는 사단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3번이나 기도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고쳐주시지 않고 교만하지 않게 하려고 은혜로 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면서 살았습니다. 바울은 이제 늙고 병들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환난을 당하고 매를 맞고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많은 환난을 당하는 동안 바울의 겉 사람은 점점 낡아졌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바울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졌기 때문입니다(16절). 속사람은 중생한 영혼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은 겉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문제는 속사람입니다. 마음속에 주님을 모시고 주님의 은혜 속에서 살 때 속사람이 강건해집니다.
17절에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바울은 환난이 영광을 이루는 줄 알았습니다. 환난은 잠시 받는 것이고 영광은 영원합니다. 환난은 작고 가벼운 것이지만 영광은 크고 무거운 것입니다. 바울은 현재 당하는 환난은 장차 천국에서 받을 영광과는 족히 비교할 수가 없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로마서 8:17-18에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8절에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여기 “주목하는 것”이란 말은 ‘소망한다,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바라보고 소망하는 것은 보이는 세상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신령한 것, 즉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보이는 세상의 것은 잠깐이며, 없어지는 아침 안개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요한일서 2:17에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여기서 생각해봅시다.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봅니까? 믿음으로 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고, 천국이 보이고, 하늘의 상급이 보이고, 면류관이 보입니다. 디모데후서 4:8에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사도 바울처럼 어려움을 많이 당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바울처럼 낙심할 만한 일이 많았던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자신이 세운 고린도 교회에서 조차 바울을 사도로 믿어주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낙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환난 중에 기뻐하고 즐거워하였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보이지 않는 신령한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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