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22 주일오전예배 설교(로마서 7장 15-25절/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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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3-01-22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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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 믿는 성도에게 가장 큰 기쁨은 아마도 죄 사함의 기쁨일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될 때 그 기쁨과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초월해서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이 황홀하고, 은혜의 세계에서 사는 것 같은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첫사랑, 처음 은혜의 때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 지나서 보면 내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더럽고 추한 생각이 있고, 여전히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고, 욕심을 부리며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보게 되면서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지만 마음속으로는 죄인처럼 고통을 느끼며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목사님, 예수를 믿으면 마음이 편하고 걱정이나 근심이 없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많아졌습니다. 예수님 믿기 전에는 죄를 지으면서도 아무런 가책도 없고 그냥 재미있고 좋았는데 예수 믿고 난 다음에는 조금만 잘못하면 갈등과 고민이 많습니다. 성경을 배우고 그 배운 말씀대로 살아야지 하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니까 참 부담스럽고, 주일날 교회에 안 나가면 하나님께서 벌주실 것 같고 마음도 편안치 않습니다. 예수님 믿으려면 제대로 믿어야 되고 말씀도 잘 지켜야 되는데 그렇게 못하니까 부담만 되고 괴로움이 많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성도의 내적인 갈등입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자신이 경험했던 내적 갈등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바울의 내적 갈등.
15절에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이 말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하는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왜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은 죄를 짓고 싶지 않은데 죄를 짓는 것입니다. 19절에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못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악은 행하였습니다. 죄가 나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내 속에 나 외에 또 다른 내가 있어서 나를 죄로 끌고 갑니다. 이것이 나의 참된 모습입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사도 바울 정도 되면 갈등이나 고민이나 문제는 하나도 없고 날마다 감사 찬송만 하면서 살았을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 속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었고 마음속에 남들이 모르는 갈등이 많았습니다.
바울의 이 고백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무리 위대한 사도에게도 내적인 고민과 갈등이 있으며 영적인 싸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믿음이 없어서 이런 갈등을 겪는 것이 아니고, 신앙생활 잘못해서 이런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특별한 죄를 지어서 이런 말 하는 것 아닙니다.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이런 갈등이 다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믿고 살려고 힘쓸수록 이런 고민이 많아집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 믿으면 즉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즉시 성자가 되거나 천사처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천국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악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우리 안에는 아직도 죄악 된 성품이 그대로 남아 있고 옛사람의 부패성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17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소욕과 성령이 서로 거스린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11에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이 구절들은 성도의 마음속에 내적인 투쟁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문제는 성도들이 자기 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적인 갈등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바르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내적인 투쟁에서 승리하는 사람이라야 믿음을 잘 지킬 수 있고 선을 행하게 됩니다.
2. 내적 갈등의 원인.
성도에게 왜 이런 내적인 갈등이 있을까요? 예수님 믿으면 마음이 편하고 근심이나 걱정도 없어져야 할 것 같은데 왜 더 많아집니까? 예수님 믿기 전에는 우상숭배하고 죄를 지으며 살면서도 갈등이나 고통이 없었는데 왜 예수 믿은 다음에는 착하고 선하게 살려고 힘쓰는 데도 더 고민이 많습니까? 율법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다. 16절에 바울은 율법은 선하다고 시인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21절에 보면 바울은 ‘내가 깨달았노니’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라는 말이 나옵니다. 22절에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절에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무슨 말입니까? 바울 안에 두 인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안에 두 사람, 두 인격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라는 사람은 한 사람인데 내 안에 두 생명이 있고 두 자아가 있습니다. 하나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육신의 생명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 믿고 거듭날 하나님이 주신 새 생명입니다. 이것을 “거듭난 새사람, 중생한 영혼”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내” 안에 전혀 특성이 다른 두 인격과 두 생명이 있어서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싸움이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즉 생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죽은 자는 갈등도 없고 싸움도 없습니다. 성도에게 내적 갈등이 있는 것도 영적인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생명은 서로 특성이 다릅니다.
여러분 모든 생명에는 본성과 특성이 있습니다. 펭귄은 남극 얼음 위에서 삽니다. 박쥐는 동굴 속에 거꾸로 매달려 삽니다. 낙타는 사막으로 갑니다. 오리는 물로 가고, 꿩은 산으로 가고, 병아리는 집으로 와서 모이를 주워 먹으며 삽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각 생명의 본성과 특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누가 시키지 않고, 가르치지 않아도 각각 생명의 본성이 달라서 그 특성대로 살아갑니다. 이와 같이 모든 생명에는 본성과 특성이 다릅니다. 이 육신의 생명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싫어하고 죄를 좋아합니다. 로마서 8:7-8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반면에 중생한 새 생명은 특성이 전혀 다릅니다. 로마서 7:22에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중생한 새 생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려고 하고,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을 행하려고 합니다. 자기의 이익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려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겨 도와주려는 특성이 있습니다. 로마서 7:19절에 보면 선을 행하며 의롭게 살려고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르려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육신의 생명과 영의 생명은 서로 정반대의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이 우리 속에서 서로 갈등하고 투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내적 갈등과 투쟁이 있는 것을 나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적인 투쟁이 있다는 것은 내 속에는 거듭난 새 생명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내적인 투쟁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법대로 살려는 믿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불신자들은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어긋난 일을 했을 때 양심의 가책을 받는 정도이지 성도가 느끼는 것 같은 영적인 갈등이나 내적인 투쟁은 없습니다. 불신자들이 우상숭배 하면서 고민합니까? 불신자들이 교회 안 나오는 것 때문에 고통을 느낍니까?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 지키면서 괴로워합니까? ‘며칠 동안 기도를 안 했더니 답답하다’라고 말하는 것 들어보셨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들은 다릅니다. 주일날 예배드리지 않고 낚시를 가면 아무리 재미있게 놀다가 와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를 지으면 다른 사람이 몰라도 내 마음이 불안하고 편안치 않습니다.
3. 갈등 극복의 비결
첫째, 자신의 부족과 무능을 절감하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아무리 죄에서 떠나려고 해도 떠나지지 않고 아무리 선을 행하면서 바르게 살아보려고 해도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자 마침내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여기 “오호라”는 탄식하는 것입니다. 이 탄식이 승리로 가는 첫 발걸음입니다. 이 탄식이 있기 때문에 승리합니다. 이 탄식은 믿음 없는 자의 원망이 아니라 믿음 있는 자의 기도입니다. 이 탄식은 죄에 빠져서 즐기는 사람의 노래가 아니고 이 땅에서 죄와 싸우며 살아가려고 하는 성도의 고뇌입니다. 이 탄식은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자기 힘으로는 도무지 할 수 없다는 탄식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말은 거룩한 삶을 열망하는 성도의 탄식입니다. 자신의 변화를 갈망하는 외침입니다. 이 탄식 속에는 상한 심령이 들어 있고, 애통하는 마음이 들어있고, 변화를 받아야겠다는 절규가 들어있습니다. 이렇게 외치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예수 믿은 지 10년 20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변화가 없다면 이러한 탄식이 나와야 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내가 무슨 성도냐. 내가 무슨 하나님의 자녀냐” 이렇게 고민하고 갈등하고 몸부림치는 사람이 발전하고 성장합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가야 합니다. 바울은 탄식과 고민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는 죄를 이길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에게로 나갑니다. 바울은 자기를 이 곤고한 상태에서 건져줄 분이 예수 그리스도뿐이심을 알고 주님께로 나아가 평안을 얻습니다. 25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왜 감사합니까? 해답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24절에서는 절망하고 탄식했는데 25절에서는 갑자기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상황이 반전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것이 핵심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요구를 다 이루고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죄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이길 수 없는 죄.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죄를 예수님이 해결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도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도 여전히 죄의 종노릇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 실패하고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리로 우리가 다 승리했습니다. 로마서 8:1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도 없고 사망도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로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전부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승리의 보장이십니다. 순간순간 넘어질 수 있고 실패할 수도 있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승리합니다.
셋째, 성령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로마서 8:4에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성령께서 할 수 있게 하십니다. 내 힘으로 지키지 못했던 말씀을 성령께서 함께하시면 지킬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16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의 인도와 감동을 따라서 육체의 욕심을 극복하고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못하는 것을 성령님은 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성령을 따라 삽시다.
예수님 믿는 성도에게 가장 큰 기쁨은 아마도 죄 사함의 기쁨일 것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고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될 때 그 기쁨과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초월해서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이 황홀하고, 은혜의 세계에서 사는 것 같은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첫사랑, 처음 은혜의 때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얼마 지나서 보면 내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더럽고 추한 생각이 있고, 여전히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고, 욕심을 부리며 이기적으로 살아가는 자신을 보게 되면서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지만 마음속으로는 죄인처럼 고통을 느끼며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분이 “목사님, 예수를 믿으면 마음이 편하고 걱정이나 근심이 없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많아졌습니다. 예수님 믿기 전에는 죄를 지으면서도 아무런 가책도 없고 그냥 재미있고 좋았는데 예수 믿고 난 다음에는 조금만 잘못하면 갈등과 고민이 많습니다. 성경을 배우고 그 배운 말씀대로 살아야지 하면서도 그렇게 살지 못하니까 참 부담스럽고, 주일날 교회에 안 나가면 하나님께서 벌주실 것 같고 마음도 편안치 않습니다. 예수님 믿으려면 제대로 믿어야 되고 말씀도 잘 지켜야 되는데 그렇게 못하니까 부담만 되고 괴로움이 많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성도의 내적인 갈등입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 자신이 경험했던 내적 갈등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바울의 내적 갈등.
15절에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이 말은 자신이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하는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왜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은 죄를 짓고 싶지 않은데 죄를 짓는 것입니다. 19절에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솔직한 고백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못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악은 행하였습니다. 죄가 나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내 속에 나 외에 또 다른 내가 있어서 나를 죄로 끌고 갑니다. 이것이 나의 참된 모습입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사도 바울 정도 되면 갈등이나 고민이나 문제는 하나도 없고 날마다 감사 찬송만 하면서 살았을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 속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있었고 마음속에 남들이 모르는 갈등이 많았습니다.
바울의 이 고백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무리 위대한 사도에게도 내적인 고민과 갈등이 있으며 영적인 싸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믿음이 없어서 이런 갈등을 겪는 것이 아니고, 신앙생활 잘못해서 이런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특별한 죄를 지어서 이런 말 하는 것 아닙니다.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누구나 이런 갈등이 다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르게 믿고 살려고 힘쓸수록 이런 고민이 많아집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순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 믿으면 즉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즉시 성자가 되거나 천사처럼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천국에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악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우리 안에는 아직도 죄악 된 성품이 그대로 남아 있고 옛사람의 부패성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17에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육체의 소욕과 성령이 서로 거스린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11에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이 구절들은 성도의 마음속에 내적인 투쟁이 있음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문제는 성도들이 자기 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적인 갈등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바르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내적인 투쟁에서 승리하는 사람이라야 믿음을 잘 지킬 수 있고 선을 행하게 됩니다.
2. 내적 갈등의 원인.
성도에게 왜 이런 내적인 갈등이 있을까요? 예수님 믿으면 마음이 편하고 근심이나 걱정도 없어져야 할 것 같은데 왜 더 많아집니까? 예수님 믿기 전에는 우상숭배하고 죄를 지으며 살면서도 갈등이나 고통이 없었는데 왜 예수 믿은 다음에는 착하고 선하게 살려고 힘쓰는 데도 더 고민이 많습니까? 율법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닙니다. 16절에 바울은 율법은 선하다고 시인했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21절에 보면 바울은 ‘내가 깨달았노니’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라는 말이 나옵니다. 22절에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절에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무슨 말입니까? 바울 안에 두 인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안에 두 사람, 두 인격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라는 사람은 한 사람인데 내 안에 두 생명이 있고 두 자아가 있습니다. 하나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육신의 생명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 믿고 거듭날 하나님이 주신 새 생명입니다. 이것을 “거듭난 새사람, 중생한 영혼”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내” 안에 전혀 특성이 다른 두 인격과 두 생명이 있어서 갈등이 생기는 것입니다. 싸움이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즉 생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죽은 자는 갈등도 없고 싸움도 없습니다. 성도에게 내적 갈등이 있는 것도 영적인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생명은 서로 특성이 다릅니다.
여러분 모든 생명에는 본성과 특성이 있습니다. 펭귄은 남극 얼음 위에서 삽니다. 박쥐는 동굴 속에 거꾸로 매달려 삽니다. 낙타는 사막으로 갑니다. 오리는 물로 가고, 꿩은 산으로 가고, 병아리는 집으로 와서 모이를 주워 먹으며 삽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각 생명의 본성과 특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누가 시키지 않고, 가르치지 않아도 각각 생명의 본성이 달라서 그 특성대로 살아갑니다. 이와 같이 모든 생명에는 본성과 특성이 다릅니다. 이 육신의 생명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을 싫어하고 죄를 좋아합니다. 로마서 8:7-8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반면에 중생한 새 생명은 특성이 전혀 다릅니다. 로마서 7:22에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중생한 새 생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려고 하고,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을 행하려고 합니다. 자기의 이익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려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겨 도와주려는 특성이 있습니다. 로마서 7:19절에 보면 선을 행하며 의롭게 살려고 합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르려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육신의 생명과 영의 생명은 서로 정반대의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둘이 우리 속에서 서로 갈등하고 투쟁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내적 갈등과 투쟁이 있는 것을 나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내적인 투쟁이 있다는 것은 내 속에는 거듭난 새 생명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내적인 투쟁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법대로 살려는 믿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불신자들은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어긋난 일을 했을 때 양심의 가책을 받는 정도이지 성도가 느끼는 것 같은 영적인 갈등이나 내적인 투쟁은 없습니다. 불신자들이 우상숭배 하면서 고민합니까? 불신자들이 교회 안 나오는 것 때문에 고통을 느낍니까? 불신자들이 하나님의 말씀 안 지키면서 괴로워합니까? ‘며칠 동안 기도를 안 했더니 답답하다’라고 말하는 것 들어보셨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들은 다릅니다. 주일날 예배드리지 않고 낚시를 가면 아무리 재미있게 놀다가 와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를 지으면 다른 사람이 몰라도 내 마음이 불안하고 편안치 않습니다.
3. 갈등 극복의 비결
첫째, 자신의 부족과 무능을 절감하고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아무리 죄에서 떠나려고 해도 떠나지지 않고 아무리 선을 행하면서 바르게 살아보려고 해도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자 마침내 이렇게 부르짖었습니다. 24절에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여기 “오호라”는 탄식하는 것입니다. 이 탄식이 승리로 가는 첫 발걸음입니다. 이 탄식이 있기 때문에 승리합니다. 이 탄식은 믿음 없는 자의 원망이 아니라 믿음 있는 자의 기도입니다. 이 탄식은 죄에 빠져서 즐기는 사람의 노래가 아니고 이 땅에서 죄와 싸우며 살아가려고 하는 성도의 고뇌입니다. 이 탄식은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자기 힘으로는 도무지 할 수 없다는 탄식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라는 말은 거룩한 삶을 열망하는 성도의 탄식입니다. 자신의 변화를 갈망하는 외침입니다. 이 탄식 속에는 상한 심령이 들어 있고, 애통하는 마음이 들어있고, 변화를 받아야겠다는 절규가 들어있습니다. 이렇게 외치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예수 믿은 지 10년 20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변화가 없다면 이러한 탄식이 나와야 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내가 무슨 성도냐. 내가 무슨 하나님의 자녀냐” 이렇게 고민하고 갈등하고 몸부림치는 사람이 발전하고 성장합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가야 합니다. 바울은 탄식과 고민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힘과 노력으로는 죄를 이길 힘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리스도에게로 나갑니다. 바울은 자기를 이 곤고한 상태에서 건져줄 분이 예수 그리스도뿐이심을 알고 주님께로 나아가 평안을 얻습니다. 25절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왜 감사합니까? 해답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24절에서는 절망하고 탄식했는데 25절에서는 갑자기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상황이 반전되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것이 핵심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요구를 다 이루고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죄를 이겼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이길 수 없는 죄.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죄를 예수님이 해결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도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구원받은 성도도 여전히 죄의 종노릇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 실패하고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리로 우리가 다 승리했습니다. 로마서 8:1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도 없고 사망도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로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전부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승리의 보장이십니다. 순간순간 넘어질 수 있고 실패할 수도 있으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승리합니다.
셋째, 성령을 따라서 살아야 합니다. 로마서 8:4에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령을 따라 행할 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성령께서 할 수 있게 하십니다. 내 힘으로 지키지 못했던 말씀을 성령께서 함께하시면 지킬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16에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의 인도와 감동을 따라서 육체의 욕심을 극복하고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못하는 것을 성령님은 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 성령을 따라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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