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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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08 수요예배 설교(고린도후서 3장 6-18절/율법의 직분과 복음의 직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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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3-02-08 21:26 조회61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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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https://youtu.be/J41Lecl6fQ8


고린도후서 3장 6-18절 율법의 직분과 복음의 직분 


1. 율법의 직분과 복음의 직분의 비교(6-12)

2. 율법의 직분의 광채는 수건으로 가려졌음(13-16)

3. 복음의 직분의 영광(17-18) 


6절

"새 언약" 신약의 복음을 가리킨다. 옛 언약은 구약의 율법을 가리킨다. 구약 율법과 신약 복음을 비교하여 설명한다.

옛 언약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이다. 새 언약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는 자들과 맺은 언약이다. 옛 언약 율법은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강조하고, 새 언약 복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강조한다. 옛 언약은 죽음에 이르게 하고, 새 언약은 새 생명을 얻게 하는 역할을 한다.

굉장히 다르다. 옛 언약은 돌에 새긴 율법이고, 새 언약은 마음에 새긴 복음이다. 옛 언약의 일꾼의 대표는 모세이다. 선지자와 제사장들이 율법의 일꾼들이다. 새 언약의 일꾼의 대표는 바울이다. 사도들과 복음 전도자들이 복음의 일꾼들이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다.

모세의 율법의 특징은 죄를 깨닫게 하고 사람을 정죄하고 결국 죽게하는 역할을 한다. 이것도 저것도 죄라는 것을 알려주고 죄 지은 것을 깨닫게 해서 결국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율법의 역할이다.

복음은 살리는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 회개하고 죄사함받고 영생얻고 구원얻게 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옛 언약과 새 언약을 비교해서 새 언약이 훨씬 더 뛰어나고 영광스럽고 우리에게 유익을 많이 주는 것임을 설명한다. 


7-8절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영광의 차이를 설명한다.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간 기도한 후에 하나님이 친히 돌판에 써주신 십계명을 받아 가지고 왔다. 그가 내려올 때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났다. 그 광채 나는 것을 영광이 있는 모습으로 설명하고 있다. 모세가 받은 계명은 의문에 속한 것이다. 사람의 죄를 깨닫게 하고 정죄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 율법도 영광이 있어서 그 율법을 받아 가지고 전하는 모세의 얼굴에 빛이 났다. 

생각해보라. 흑암 속에 사는 죄인들,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어두움 가운데 있는 죄인에게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시고 음성을 주시고 율법을 전해 주셨다. 이것은 얼마나 영광스럽고 귀한 일인가! 상상할 수도 없는 놀라운 은혜이다. 그래서 모세가 받아가지고 온 율법의 직분에 광채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약의 복음은 사람을 살리는 기능과 역할을 하는 것이므로 옛 언약과 비교해서 더 크고 귀한 역할을 하고 우리를 복되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복음의 직분의 영광이 더 크다.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모세가 받은 직분도, 모세가 역할했던 사명도 굉장하고 놀랍고 영광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영의 직분은 더 영광스럽고 귀하다. 영광의 광채가 지금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모세의 얼굴에 광채나는 것처럼 실제로 보여진다면, 바울의 얼굴에서 그 광채가 보여졌다면, 신약 전도자의 얼굴에 광채가 났다면 굉장했을 것이다.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보고 얼마나 놀라워하겠나? 그런데 실제로 광채가 나지 않으니 그들이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율법의 역할은 젊은 처녀가 결혼하는데 있어서 중매인의 역할과 같다. 좋은 신랑을 소개하고 안내해주는 역할이다. 

복음은 신랑 자체와 같다. 중매인이 귀한가? 신랑이 귀한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신랑이 귀하다. 신랑에게 사랑받는 것이 훨씬 더 귀하다. 


9절

"정죄의 직분" 율법을 가지고 일하는 직분이다.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하고 심판 받는다는 것을 전해주고 죄인을 정죄하는 직분에도 영광이 있다.

"의의 직분" 죄인들을 예수 믿게 해서 의인되게 하고 영생 얻게 하고 천국의 상급을 얻게 하는 복음의 직분이 훨씬 더 영광된다. 


10절

"영광되었던 것" 율법이다.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복음이다.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복음이 이르기 전에는 율법이 영광되었었다. 그리스도에게 인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고 우리가 죄인 인 것을 알게 했다. 그런데 더 큰 영광이 이르니 이전에 영광되었던 것이 더이상 영광되지 못하다.

어두운 밤에 달빛이 비추면 달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런데 해가 뜨면 달빛은 별것 아닌 것이 된다. 

이와 같이 복음에는 더 큰 영광이 있다. 복음의 직분은 상상할 수 없이 영광된 직분이다. 


11절

"없어질 것" 율법이다. 율법은 죄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고 없어질 것이다. 

"길이 있을 것은" 복음의 직분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약시대 성도들은 더 크고 더 중하고 더 영원한 영광 가운데 있는 것을 깨달아 알아야 하겠다. 영광의 직분을 바울이 알았다. 우리가 복음을 증거하면서 주를 위해서 일하면서 이 직분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가! 알아야 한다. 이것을 모르고 힘들어 하고 피곤해하고 안하려고 하고 하다가 중단하는 사람들이 많다.

바울은 복음의 직분의 영광을 우리가 바로 깨닫기를 바라고 있다. 율법과 비교해서 복음이 귀하다. 율법의 직분보다 복음의 직분이 더욱 영광 스럽다. 


12절

복음의 직분은 율법의 직분보다 월등하고 영원하고 중간에 없어지지 않고 나중에 하나님 앞에서 큰 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소망이 있다. 담대히 사명을 감당하고 복음을 전해야 한다. 


13절

모세는 그 율법을 받아 가지고 내려오다가 광채가 없어질 것을 걱정해서 얼굴에 수건을 썼다. 그것은 율법의 역할이 그리스도에게까지 인도하는 역할만 하고 그 이후에는 사라질 것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지 못하도록 수건을 쓴 것이다. 바울은 수건을 쓰지 않아도 된다. 복음의 직분의 영광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영광이 없어질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12절 끝에 "담대히 말하노니"라고 한 것이다. 복음의 직분을 자랑스러워하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하고” (고후 4:1)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고 대적하는 자들이 많았다. 그래도 바울은 낙심하지 않았다. 이 직분을 하나님이 은혜로 주셨기 때문이다. 감사함으로 사명을 감당하면서 복음의 직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 알기 때문에 대적이 많아서 핍박해도 낙심하지 않았다. 우리도 이 바울의 믿음을 본받아야 하겠다.

지식적으로만 알면 안된다. 이 복음의 직분을 우리가 받았다. 이 직분을 우리가 감당해야 한다.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한다. 꼭 사도가 아니라도 교역자가 아니라도 복음을 증거하면 그 직분을 감당하는 것이다. 이런 자에게 영광과 상급이 있을 것이다. 


모세는 점차 없어져 가는 얼굴의 광채를 사람들이 주목하지 못하도록 수건을 썼다.

“[33]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34]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며 [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출 34:33~35)

율법의 광채가 점점 사라질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보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다. 만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의 얼굴을 보면서 굉장하다고 영광스럽다고 했다가 광채가 사라져 버리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율법을 지키지 않고 따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율법이 정죄하는 역할을 하고 죄를 깨닫게 하는 역할을 하지만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 미리 율법은 귀하지 않고 장차 없어질 것이라고 무시하고 따라가지 않으면 큰 손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율법의 인도를 잘 받아 그리스도에게까지 나아가고 믿어야 한다. 율법의 광채가 없어지는 것을 보면 율법을 무시할까봐 수건을 써서 얼굴을 가린 것이다.

하나님은 가려놓았다가 때가 되면 알게하시는 것들이 있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일곱 인을 떼는 재앙이 있다. 인봉해서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셨다가 때가 되면 하나하나 인을 떼서 그 내용을 이루신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만 아신다. 때가 되면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것이다.

사람이 죽는 날도 모르게 하셨다. 아무도 모르게 하셨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면 불러가시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모르게 하신 것은 모르는 것이 좋다.

구약 율법도 그리스도가 그림자처럼 그 속에 내포되어 있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한다. 그러나 희미한 역할을 한다. 


14절

모세의 얼굴에 썼던 수건을 영적으로 이스라엘에게 적용하고 있다. 구약시대 있었던 일을 바울 때의 성도들에게 적용시킨다.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 수건이 덮여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 율법은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 선생 역할을 하는데, 율법의 인도를 잘 받아 그리스도에게로 가고 믿고 영생 얻는 길로 가야 하는데 수건이 마음을 덮어서 가리고 있어서 깨닫지 못하고 있다.

수건을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라고 설명했다. 마음이 완고해서 마음을 열지 않는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깨닫지 못한다. 율법을 들으면서도 이해하지 못한다. 개인 개인의 성품, 마음에 수건이 덮여져 있는 상태이다. 수건이 벗어져야 말씀을 제대로 깨닫고 이해하고 힘을 얻고 복을 받을텐데 수건이 언제 없어진다고 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그때 비로소 율법이 제대로 깨달아진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까지는 수건이 덮어진 것 같은 상태가 되어서 읽고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또 하나 수건이 있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고후 4:4)

세상 신, 마귀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한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이것을 벗어버려야 한다. 그래야 은혜 받고 밝히 알고 모든 것을 깨닫게 한다.

개인적으로 마음을 덮고 있는 완고함의 수건을 벗어버려야 한다. 그것이 없어져야 주님을 영접하고 믿게 된다. 주님을 믿게 되면 율법이 다 깨달아지고 이해하게 된다.

마귀는 시시때때로 우리 마음을 혼미하게 해서 은혜 받지 못하게 한다.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비치치 못하도록 방해한다. 마음이 복잡하고 산만하게 만들어서 방해한다. 그러면 은혜 받을 수 없다. 그것을 걷어내고 제거해야 한다. 


15-16절

"오늘까지" 진즉에 수건을 제거했어야 하고, 오래 전에 수건을 없애야 하는데, 그것이 없어지지 않고 마음을 덮고 있다. 그래서 못깨닫고 이해하지 못한다. 배척하고 반대하는 일들만 하고 있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수건이 벗겨지게 된다. 방법은 하나이다. 그리스도에게로 돌아가 그리스도을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에게로 가야 눈이 떠지고 마음의 완고한 것이 제거되고 마귀의 방해가 사라지고 은혜의 광채가 강하게 비쳐질 수 있다. 


17절

주는 영이시다. 진리와 영감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고 살리신다. 주님을 영접하는 자는 율법의 모든 제도와 속박으로 부터 벗어나 영적인 자유와 평안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영의 인도를 받는 사람에게는 이런 진정한 자유, 평안을 누리는 은혜가 임하게 된다.

율법에 얽매여 사는 자들은 종과 같이 자유함이 없다.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서 믿음의 세계 속에 들어가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기쁨으로 믿음생활을 하게 된다. 예배와 찬송과 기도와 말씀 읽는 것, 전도를 자원해서 한다. 주의 영이 계신 곳의 자유는 이런 자유이다.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영적인 자유를 누리고 자원해서 믿음생활을 하게 된다. 


18절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예수님을 믿는 자는 수건을 벗은 것과 같다. 수건을 벗고 거울을 보는 것처럼 뚜렷하고 확실하고 정확하게 볼 수 있다. 주의 영광을 바라보고 영광의 광채를 깨닫고 기쁨을 누리고 그의 형상으로 변화해야 한다. 신령하고 거룩하고 아름다운 형상으로 점점 변화해야 한다.

작은 영광에서 큰 영광으로, 희미한 영광에서 밝은 영광으로 점점 더 변화해서 자라나는 모습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점점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되어야 한다. 은혜를 받으면 점점 변화해서 신령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말씀을 배우고 진리를 깨닫게 되면 주님 닮아가는 거룩한 사람으로 성화를 이루어나가게 된다.

이렇게 자라나는 상태로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 하늘나라에 가면 주님을 많이 닮은 사람이 더 큰 상을 받고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을 조금 닮은 사람은 영광과 상급이 작을 것이다. 수건을 벗어버리고 은혜 속에 살면서 영광을 향해 달려가는 믿음 생활을 해야 하겠다.

수건을 벗어 버린 사람들의 삶은 위장하는 것이 없다. 가리는 것이 없다. 감추고 숨기는 것이 없다. 위장은 수건을 쓰는 것이다. 수건을 벗어버린 사람은 그런 것이 다 소용이 없다. 위장된 생활, 감추는 생활, 숨기는 생활을 하지 말아야 하겠다. 우리는 수건을 벗은 자들이다.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만나고 주님을 영접한 자는 수건을 벗은 자이다. 수건을 벗었으면 자유함을 누리고 주님을 닮아나가야 한다. 자신을 정직하게 드러내야 한다. 감출 것이 없다. 하나님이 다 아시는데 무엇을 감추겠나! 점점 자라나는 생활, 빛 가운데 사는 생활을 해나가야 하겠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이 있는데, 옛 언약의 직분에도 영광이 있었다. 모세의 영광이다. 굉장한 영광이었다. 그런데 새 언약, 복음의 직분자들은 그 영광이 율법의 영광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더 크고 없어지지 않을 영원한 영광이다. 예수 믿는 자들이 복음을 증거하고 주를 위해서 일하면서 교회를 위해 헌신 봉사할 때 영광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세의 얼굴에는 직접 광채가 났지만 우리 얼굴에는 이 광채가 직접 보이지 않는다. 그것을 바울이 알려준다. 우리가 맡은 직분이 영광스럽고 이 사명의 귀한 것이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빛나는 영광과 광채가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직분을 감당하다가 환난과 핍박이 있어도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수건을 벗어 버려야 한다. 수건을 쓰고 있으면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성경을 깨닫지 못한다. 완고함을 벗어 버려야 한다. 그리스도 앞에 나아가서 주님의 영광을 보고 영광에서 영광으로 점점 자라나고 신령한 사람이 되어서 하늘나라에서 크게 상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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