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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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19 수요예배 설교(고린도후서 8장 1-9절/연보의 태도, 윤성천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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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3-04-19 22:15 조회52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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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 https://youtu.be/-AbgWLAClBM


고린도 교회 여러가지 문제 중에 연보의 문제가 생겼다. 일년전에 디도를 보내 연보하기로 했는데 중단되었기에 바울이 권면한다. 중단의 이유는 언급이 없다. 고린도서를 보면 많은 문제가 있기 때문에(당파, 도덕, 영적 은사 등) 연보가 잘 안되었을 가능성이 있고, 거짓 교사들이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이었을 수 있다. 그래서 디도를 통해 권면하는 내용이다. 


1-5절은 고린도교인들을 권면하기 전에 마게도냐 교회의 좋은 본보기를 제시한다. 마게도냐 교회는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교회를 가리킨다. 이 교회들이 이미 헌금을 해서 칭찬을 들을 정도였기 때문에 고린도교인들에게 자극을 주고 있다. 좋은 의미로 비교하여 말하는 것이다. 


"연보" 요즘에는 헌금이라는 말을 썼다. 과거에는 연보함이라고 했고, 헌금이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았다. 요즘은 헌금으로 통일되었고 연보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고 있다.

연보는 구제의 성격을 갖고 있다. 사람들을 돕는 용도이다(기부금). 엄격히 문자적으로는 연보와 헌금을 구분하지만 지금은 헌금으로 통일해서 사용해도 상관없다. 

최근에 나오는 성경 중에는 연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연보가 왜 헌금이 될 수 있는가? 믿음을 가진 성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도가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께 순종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1절

"주신 은혜" 은혜라는 말 속에는 관대함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하나님의 관대하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주셨다. 주님이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이런 은혜를 잘 깨달으면 모든 성도들의 마음 속에 넓은 마음, 관용하는 마음, 용서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기게 된다. 

1. 마게도냐 교회의 연보에 대해서

2절

마게도냐 교회가 어떻게 연보를 했는가?

첫째, 환난과 가난 속에서 헌금을 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유대인들이 복음 전하는 자들을 따라다니면서 괴롭혔다. 복음 전하는 일에 동참해야 될 자들이 예수님이 메시야라는 것을 부정했다. 이방나라 사람들은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다른 도를 전하는 자들을 가만히 둘 수 없었다. 우리나라도 불교 신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으면 핍박을 많이 받았다. 당시에도 이방에서 복음을 전하다보면 핍박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이 있었는데, 노동조합을 결성해서 경제적 부분에서도 압력을 많이 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가입시켜 주지 않고 핍박을 했다.

오늘날 우리 같으면 이런 환난은 없을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여러 어려움들을 겪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많은 시련"이라고 했다. 시련은 시험이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 학생들이 시험(테스트)을 본다. 뜨거운 철을 제련할 때에는 용광로에 넣어서 불순물을 제거한다. 많은 시련은 우리의 신앙을 하나님이 입증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당하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시험하고 계신다. 그래도 하나님을 배반하지 않고 믿을 것인가? 이런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 속에서도 믿음을 굳게 지키는가? 많은 과정을 통해 연단을 시키신다. 가정에서 남편, 아내, 자녀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시험하신다.

그런데 이럴 때 "넘치는 기쁨"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왜 넘치는 기쁨이 생길까? 환난을 안받으려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있는데 환난 중에 어떻게 넘치는 기쁨을 얻을 수 있을까? 환난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환난을 통해 더 깨지고 보충되고 만들어져야 될 부분, 회개해야 될 부분이 있고, 힘써야 될 부분이 있다. 자존심이 박살날 정도로 환난을 주실 수 도 있다. 많은 시련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목적을 아니까 기쁨이 넘치는 것이다. 나같이 부족한 자를 연단시키셔서 귀하게 사용하시고, 예수님을 좀 더 많이 닮아가게 한다는 사실을 아니까 힘들고 어려운 속에서도, 억울함 속에서도, 조롱과 핍박 속에서도, 눈물을 흘리면서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참고 견디고,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힘들다고만 한다. 하나님이 이 고난을 왜 주셨을까? 무엇을 깨닫게 하려고 주셨을까? 무엇을 주시려는 것일까? 각자 해답을 찾아야 되고 해답을 찾았을 때에는 기쁨이 넘치게 되는 것이다.

"극심한 가난" 걸인에 가까울 정도의 가난이다. 그런 가운데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했다고 했다. 사람들은 자기 먹기도 힘든데, 생활하기도 힘든데 어떻게 그럴 수 할 수 있는가?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했다고 했다. 얼마나 놀라운가!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하나님께 해야될 것을 하지 않는다. 십일조를 하지 않고, 헌금을 줄인다. 그런데 마게도냐의 교회들은 그 핍박과 환난 속에서도, 가난하면서도 넘치는 연보를 했다. 왜냐?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자는 물질관이 달라진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예수님을 믿는 것도 부자 되려고, 성공하려고, 잘 살아보려는 목적을 갖는다. 그런데 주님은 고난을 받게 하신다고 했다. 고난은 받지 않으려고 하니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다른 것이다. 


3절

둘째, 자원하여 연보했다.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다. 힘은 자기 능력을 말한다. 자기 능력대로 했다는 것이다. 없는 것을 빚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집 팔아서 바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활하면서 바치는 것이다. 김현봉 목사님이 교훈하시기를 하나님이 돈을 주신 목적은 먹고 살라고, 믿는 일 하라고 주셨다고 했다. 믿는 일만 하라고 돈을 주신 것이 아니다. 일주일이 칠일인데 엿새동안 열심히 일하라고 했다. 일하지 않는 것도 죄이다. 주일 안지키는 것만 큰 죄인줄 아는데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것도 죄이다. 

먼저 우리에게 물질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창조원리를 보더라도 누리고 다스리고 정복하도록 주신 것이다. 물질도 필요한데 쓰라고 주신 것이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 바칠 것은 바쳐야 한다. 능력주신대로 바쳐야 한다. 

헌금에 대해서는 남들이 판단할 문제는 아니다. 자기가 어느 정도의 헌금을 하는 것이 옳은가 만 생각하면 되지 누가 부자인데 얼마만 한다고 말하면 안된다.

“[2] 또 어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3]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눅 21:2~3)

생활비 전부를 바치라는 것이 아니라 액수가 적지만 많이 가진 자가 많이 낸 것보다 가난한 자가 힘 닫는대로 바친 것을 더 많은 것으로 여겨주신다는 것이다. 능력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싫어한다면 부끄러운 일이 된다. 어쨋든 우리가 하나님 앞에 힘대로 바쳐야 한다.

그리고 힘에 지나도록도 하라고 했다. 예를 들어 돈을 가지고 한달에 네번 정도 외식을 한다면, 교회에 특별한 일이 있을 때 외식의 횟수를 줄이고, 자기의 것을 조금 줄여서, 자기가 가진 형편과 능력에서 조금 더 헌신해서 헌금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자기 능력껏 해야 하고, 특별한 경우에는 힘에 지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을 자원했다고 표현했다.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한 것이 아니다. 고린도 교회도 스스로 자원해서 이렇게 한다고 했지 바울이 명령한 것이 아니다. 연보는 자원해서 하는 것이다.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믿음이나 자기 은혜 받은 것이 비율로 나타나게 되어 있는데 어쩔 수 없는 문제이다. 


4절

셋째, 참여하는 정신으로 연보했다.

"이 은혜" 연보를 가리킨다. 은혜와 연보를 같이 보고 있다. 참으로 구속의 은혜를 깨달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귀한줄 알면 연보를 하게 되어 있다. 

“[6] 그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그가 이미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하게 하라 하였노라 [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고후 8:6~7)

연보를 은혜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만큼 연보생활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을 부담으로 생각하지 말고 이만큼 물질, 헌금이라는 것이 은혜받은 표로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다. 


5절

넷째, 바른 정신으로 연보했다.

연보의 정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먼저 자신을 주께 드렸다고 했다. 자신을 주께 드리지 않고 연보하는 사람들도 있다. 경쟁하듯이 연보하는 경우가 있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내가 연보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면 안된다. 자신을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왜 중요한가?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을 하나님께 드렸다면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린 자는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는다. 연보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자기 생각이 부인되는 사람이다. 나의 삶을 드렸기에 나의 물질, 재능, 시간을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할까? 하나님의 뜻대로 할 수 있을까? 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어떠한가?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의 이기적인 생각, 육신적인 생각에 사로잡힐 수 있다.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내 몸과 마음을 주님께 온전히 드립니다! 주님 뜻대로 나를 사용해 주시옵소서! 그리고나면 내가 내 몸을 드렸고, 내가 가진 것을 다 하나님께 드렸으니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한다. 하나님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무엇일까요? 이것을 잘 적용해야 믿음이 성장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가 되고 다른 사람이 볼 때에도 변화되었다고 느낄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마게도냐 교회가 보여준 모습이다. 이것을 고린도 교회에게 편지로서 기록해 보내준 것이다. 


2. 고린도교회의 연보에 대한 교훈

6-9절은 고린도교회에 대한 이야기이다.

고린도교회의 연보에 대한 교훈은 무엇인가? 


6절

첫째, 연보를 그대로 성취하라.

"디도를 권하여..그대로 성취하게 하라" 일년전에 연보하기로 한대로 성취, 완성하라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하고자 했던 마음은 사람에게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한 것이다. 이미 마음을 먹었으면 어떻게든지 하려고 해야 한다. 어렵더라도 감당해야 한다. 힘들어도 하라는 것이다. 미루지 말고 잊어버리지 말고 하라는 것이다.

부담스러울 수도 있을 것 같다. 어려운데 하라고? 그런데 고린도교인들도 자원해서 했던 것이다. 하나님 앞에 합당한 것이기 때문에 일년전부터 성취하도록 한 것이다. 

은혜의 세계를 잘 깨달은 분들은 헌금도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7절

둘째, 연보를 풍성하게 하라.

풍성하게 하라고 했다. 마게도냐 교회도 풍성하게 했는데, 고린도 교회에 편지하면서도 풍성하게 하라고 했다. 인색함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씀의 요점은 은혜와 은사를 많이 받았기에 헌금도 많이 해야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많은 은혜와 은사를 받았다고 자랑만하지 말고 연보도 풍성하라는 것이다. 은혜받은 만큼 헌금한다는 논리이다. 기본적인 성경의 가르침은 참으로 은혜를 받았으면 은혜 받은만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꼭 액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몇푼 되지 않아도 힘써서 했다면 많이 한 사람보다 더 크게 보신다고 했다. 단순히 헌금액수를 높이라는 것이 아니다. 각자가 자기 수준에서 힘써서 하면 풍성한 것이다. 


8절

셋째,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한다고 했다. 내가 정말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믿음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가짜이다. 하나님은 전혀 사랑하지 않는데 사람들을 좋아한다면 아가페 사랑이 아니다. 부부간의 사랑은 에로스라고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성경은 부부간의 사랑도 아가페로 표현했다. 성도의 사랑은 기본적으로 아가페 사랑이다.

하나님을 무지무지 사랑한다고 하면서 어느 사람은 사랑하고 어느 사람은 미워하고 어느 사람에게는 가시 돋힌 말을 하고 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좋은 말만 해준다면 그 사람은 가짜이다. 참 신앙이 아니다. 아가페 사랑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원수인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셨다. 신앙생활할 때 가장 사랑하는 것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자존심은 깨져야 한다. 욕심도 깨져야 한다. 모든 일에 대해서 정신을 차리고 내가 하나님을 정말 사랑한다면 나의 물질을 가지고 이웃도 사랑해야 한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요일 3:17) 


9절

넷째, 남을 부요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난이 뭔가?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시고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주신 것이다. 자신을 완전히 비워주셨다. 자기를 내놓는 것이 가난한 것이다. 나사로가 거지였기 때문에 아브라함 품에 안긴 것이 아니라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내려놓지 못했다면, 예수님처럼 낮아지고 희생하지 않는다면 영적으로 부요한 자가 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가난해지므로 우리를 구속해주신 것이 우리를 부요하게 하신 것이다. 우리가 내 것을 내놓으므로써 다른 사람을 잘되게 한다면 부요하게 된 것이다. 주님과 같이 겸손함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연보는 단순한 돈 문제가 아니라 은혜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내 믿음에 맞게 적절하게 해야 한다. 결코 육신의 생각으로 결정하지 말고 내가 먼저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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