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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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918 주일오전예배 설교(마가복음 9장 17-27절/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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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2-09-18 15:16 조회5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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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https://youtu.be/LpaGQ5ir0zA

살다보면 내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큰 어려움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내 지혜와 힘으로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인정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문제 앞에서 쉽게 낙심하고 포기한다면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성도가 문제 앞에서 기도하지 않고, 부르짖지 않고, 최선을 다하지 않고, 낙심하고 절망한다면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면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한 일도 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하는지 보겠습니다.

1. 귀신들린 아들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 아들이 귀신이 들렸습니다. 그 아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고쳐달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17절에 “말 못하게 하는 귀신들린 내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18절에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22절에는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 아이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귀신이었습니다. 귀신이 이 아이 몸이 들어가 강한 힘과 능력으로 그 아이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귀신은 그 아이로 하여금 마땅히 할 말은 못 하게 하고, 자기 몸을 자기 맘대로 조절하지 못하게 하고,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지게 했습니다.
귀신이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먹을 것, 입을 것, 공부가 문제가 아닙니다. 귀신이 그의 영혼과 정신을 지배하고 그의 몸을 병들게 하고 있습니다. 귀신이 그의 인생을 망치고 그이 삶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귀신 들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자녀들을 지배하면서 넘어지게 만들고, 방황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입니까? 겉으로는 온갖 과학 문명의 발달로 좋은 혜택을 누리며 편안하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적으로 보면 악한 마귀의 유혹과 시험에 시달리고 있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청소년 중에 휴대폰과 인터넷 중독이 심각한 지경입니다. 한국에만 인터넷 중독자는 100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폭력물과 음란물에 빠져있는 사람들, 게임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들, 도박에 중독된 사람들, 흉악한 범죄에 이용당하는 청소년들이 많습니다.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사탄이 있습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악령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사탄이 대중문화를 이용해서 사람들에게 파고들고 있습니다. 마약의 지배를 받고, 돈의 지배를 받고, 우상의 지배를 받고, 죄의 지배를 받고, 악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고침받고 회복되어야 합니다. 아버지는 이 아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18절에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보려고 열심히 노력했으나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변화산에 기도하러 갔다가 돌아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전후 사정을 듣고 난 후 말씀하셨습니다. 19절에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먼저 “믿음이 없는 세대여”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마가복음 6:7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는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권능을 믿는 믿음이 없고, 귀신을 쫓아내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왜 쫓아내지 못했습니까(28절). 29절에 보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4절에 보면 제자들은 변론만 했습니다. 주님께서 그런 제자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아이를 주님께 데려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주님께 데려오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우리 힘으로 자녀의 병을 고칠 수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귀신을 쫓아낼 수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자녀를 거듭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데려오면 주님께서 고쳐주십니다. 자녀들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도 예수님께로 가지고 가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예수님께 맡기고 주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서 말씀을 듣는 것은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아버지가 아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왔습니다.
20절에 보면 아이가 갑자기 엎드려져 경련을 일으키며 거품을 흘렸습니다. 귀신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고 두려워한 것입니다. 귀신은 사람을 병들게 하고, 괴롭히고, 괴로움을 주다가 결국은 죽이려 합니다. 귀신은 절대로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귀신을 대적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힘으로는 귀신을 이길 수 없고 쫓아낼 수도 없습니다. 귀신은 사람보다 지혜롭고 사람보다 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귀신도 쫓아내고 불치병도 고칩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기적과 능력도 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 나와서 예수님께 맡겨야 합니다.

2.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22절에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여기서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이라는 말은, 할 수 있거든 고쳐주시고, 할 수 없으면 그만두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능력을 의심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23절에 보면 그때 예수님이 책망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천지를 창조하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주님이신데 병을 고치는 것은 문제가 되겠습니까? 주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무엇을 하실 수 있을까?”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한 것을 보면 믿음이 있기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확신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능력을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고쳐달라고 예수님을 찾아왔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심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예수님께 희망을 걸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염려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연약한 믿음의 특징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불신앙적인 모습이 없습니까? 이 아버지는 왜 이러한 연약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하나는 제자들도 고치지 못했는데 예수님이라고 별 수 있을까? 의심한 것입니다. 한번 실패한 사람은 또다시 실패하지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많은 실패를 경험합니다. 실패가 우리의 잠재의식 속에서 우리를 부정적인 사람이 되게 하고 우리의 신앙까지도 나약하게 만듭니다. 또 하나는 이 아버지 생각에는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여긴 것 같습니다. 자기가 볼 때 불가능하게 보이고, 어렵게 느껴지니까, 예수님에게도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 아버지처럼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기는 믿지만 자기 생각대로 믿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의심과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위대하고, 능력 있고, 지혜롭고, 강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을 자꾸만 인간의 시각으로 이해하려고 하니까 어렵게 생각이 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를 인간의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면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세 분이신데 한 분이시고, 한 분이신데 세분이십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이시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신데 또 100% 인간이십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인간으로 태어날 수 있었을까? 예수님이 어떻게 물 위를 걸었을까요? 이러한 것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이해하고 믿는 사람에게는 전혀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인간의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하니까 이해가 안 되고 어려운 것입니다. 인간은 잠자는 사람 깨우는 것은 쉽고 죽은 사람 살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잠자는 사람 깨우는 것이나 죽은 나사로 살리는 것이 다 쉽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러니까 죽은 나사로가 살아서 나왔습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원래 그런 분이십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에게는 전혀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인간의 차원에서 이해하려고 하니까 어려운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고기가 먹고 싶다고 원망할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기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이십 일만 먹게 할 뿐 아니라 코에서 넘쳐서 싫어하기까지 한 달 동안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모세가 걱정이 되어가지고 ‘이 백성의 장정만 해도 60만 명인데 어떻게 한 달간이나 고기를 먹게 할 수 있습니까? 양 떼를 잡은들 족하며 소 떼를 잡은들 족하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하고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없어졌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다 될 줄로 믿어야지 왜 의심하느냐는 뜻입니다.

3.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2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예수님이 의심하는 아버지를 책망하셨습니다. 주님에게 능력이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문제가 아니고, 이 아버지가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때 먼저 믿음을 보십니다. 기적을 베푸실 때 먼저 믿음을 보십니다. 믿음이 있는 자에게 은혜와 능력을 베풀어주십니다. 아이의 아버지에게 먼저 믿음을 가지게 만들고 그 다음에 기적을 베풀어 치료해주셨습니다. 마태복음 13:58에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예수님께서 고향에서는 능력을 많이 행치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책망을 들은 아버지는 즉시 회개했습니다. 24절에 보면 이 아버지는 큰 소리로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고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이 아버지는 순진하고 정직합니다. 우리도 고백합시다. “내가 믿나이다.” ‘나는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믿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믿음입니다. 이런 나를 도와주소서.’ 그 후에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고 아이를 고쳐주셨습니다.

25절에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주님은 귀신을 쫓아버렸습니다. 주님은 귀신을 달래거나 설득하지 않았습니다. 대적하셨습니다. 나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도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그러자 귀신이 소리 지르며 발악하다가 떠나갔습니다. 아이는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다가 쓰러져 죽은 것 같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곧 일어났습니다. 주님은 완전하고 깨끗하게 아이를 고쳤습니다. 귀신은 다시는 들어올 수 없었고 병도 재발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 한마디에 불가능하게 생각되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주님의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중요한 말은 ‘믿는 자에게는’이라는 말씀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말씀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으십시오. 기도한 대로 이루어 주실 것을 믿으십시오. 믿고 맡기면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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