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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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22 수요예배 설교(누가복음 22장 47-62절/붙잡히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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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2-06-22 21:20 조회6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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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https://youtu.be/ZeB8iUEk5m8


47절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예수님이 드디어 붙잡혀서 심문을 받으시게 된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주님을 잡으려고 한 무리가 오는데 그 무리들 중에 앞장 서 오는 사람이 있었다. 가룟 유다이다. 그는 예수님을 파는 자이고, 예수님을 넘겨주고 돈을 받은 자이다. 그런데 "열 둘 중에 하나"라고 설명하고 있다. 열두명 밖에 되지 않는 제자들 중에 하나이다.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제자가 된 복받은 자였다. 그런데 그는 복을 버리고 함께 있어서는 안되는 자들 중에 있었다. 그것도 앞장 서서 오고 있다. 주님 곁에 서야 되고 십자가 곁에 서야 되는 자가 대적들과 함께, 주님을 잡는 자리에 앞장 서있었다. 

48절
"예수께 입을 맞추려고 가까이 하는지라" 원래 입맞춤은 존경과 사랑의 표시인데,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려주는 신호로 입맞추는 일을 했다.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하고 입을 맞추니” (마 26:49)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입을 맞추었다. 이렇게 예수님을 배반하고 예수님을 팔았다. 주님은 이미 가룟유다가 배반한 것을 다 알고 계셨다. 주님을 팔고 돈을 받은 것까지 다 알고 계셨다. 가룟유다가 다가와서 입을 맞추고 안녕하시옵니까 라고 인사를 할때 주님의 마음이 어떠셨을까? 
나에 대해서 온갖 비방과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자가 다가와서 안녕하냐고 반갑게 인사한다면 어떤 마음이 들겠나? 주님은 가룟유다의 본심과 그가 한 모든 일을 알고 계신다. 그런데 겉으로는 존경하는 척, 사랑하는 척 흉내를 낸다. 

그 가룟 유다를 향해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마 26:50) 

주님은 사랑이 많으시고 은혜가 많으시고 자비가 많으시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생각을 해보자.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주님의 제자가 되었고 복음 전할 사명을 맡은 자이다. 주님 가시는 길을 함께 가야 한다. 그런 우리가 사명을 망각하고 세상에 붙들려서 세상의 편이 되어 살아간다면 바람직하지 못하다. 더 나아가 주님을 반대하고 대항하는 일에 참여한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룟유다의 신호에 따라 사람들이 주님께 다가와 주님을 붙잡는다. 

49-50절
베드로가 칼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잡아가려고 할때 베드로가 칼을 휘둘렀다. 무력으로라도 주님을 지키려고 했다. 그런데 휘두른 칼에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라버렸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요 18:10)
베드로가 기도하지 않으므로 믿음으로 이기지못하고 시험에 들어서 힘으로 대항하려고 했다. 

주님께서 말고의 귀를 치료해주셨다. 신체가 온전하지 못한 자는 성전에서 봉사할 수 없다. 그런데 귀가 잘렸으니 성전에서 봉사하지 못할 뻔 했다. 그런 자를 주님께서 치료해주시고 회복해주셨다. 말고도 주님의 원수로 주님을 잡으려는 무리 중 한사람이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를 치료해주셨다. 

51절
"이것까지 참으라" 원수들이 이유없이 주님을 잡으려고 한다. 대적들이 잘못이 없는 주님을 붙잡으려고 한다. 어찌 보면 베드로는 정당방위를 한 것이다. 더 나아가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처음에는 참으려고 한다. 그런데 한계가 있다. 참고 참다가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수준에 이를 때가 있다. 그런 상황에서도 참으라는 것이다. 한계를 극복하라는 것이다. 한계를 참고 뛰어넘으라는 말씀이다.
우리의 삶에 적용해봐야 하겠다. 도무지 못참겠다는 순간이 올 때 이 말씀이 생각났으면 좋겠다. 그때 참으면 믿음으로 이길 수 있다.
베드로가 전에 주님께 "형제가 죄를 범하면 일곱번까지 용서하면 됩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주님은 "일곱번을 일흔번까지 용서하라"고 하셨다. 이것은 끝까지 참고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마 26:52)
칼을 쓰면 결국 칼로 죽게 된다. 우리는 어디까지 참고 있는가? 생각해보라. 주님 말씀대로 참을 수 없는 것까지, 도무지 못참겠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참을 수 있어야 하겠다.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마 26:53~54)
힘이 없어서 붙잡혀가시는 것이 아니다. 힘이 없어서 억울한 일을 당하시는 것이 아니다. 열두 군단되는 천사를 당장에 보내실 수 있고 이런 원수들을 한방에 쓸어버리실 수 있다. 그런데 왜 참으시나? 성경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순종하시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이다. 그래서 받아들이고 참고 모든 것을 순응하는 것이다.
우리도 싸우면 이길 수 있고 대항하면 물리칠 수 있다, 그런데 왜 참아야하는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더 큰 일이다. 위급한 상황에서 이런 심오한 진리를 가르쳐주셨다. 

52-53절
주님 붙잡혀 가시면서 말씀하셨다. "강도를 잡는 것 같이 검과 몽치를 가지고 왔느냐?" 이런 것 가지고 오지 않아도 순순히 잡히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오랫동안 말씀을 가르치셨는데 그때는 주님을 잡지 않았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었다. 그래서 잡혀가신다는 것이다.
주님이 잡히는 때는 어두움이 빛을 이기고 죄의 권세가 정복하는 순간이다. 주님이 왕이 되셔서 세상을 다스리는 상태가 되어야 아름다운 세상이 된다. 악한 자들이 물러가고 그들이 힘을 잃고 그들이 감옥에 갇혀야 되는데 세상이 뒤집어 졌다. 악인들이 권세를 잡고 큰 소리 치고 선하신 주님을 붙잡아 고문하고 십자가에 못박는다.
그러나 주님께서 잠깐 허용하시는 것이다.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당하시지만 부활하신다. 결국 승리하신다. 지금은 악한 마귀가 권세를 잡고 믿는 자들을 괴롭히지만 잠깐이다. 주님 다시 오실 때 주님이 심판의 자리에 앉으셔서 악인들을 다 쓸어버리실 것이다. 성도에게 승리를 주시고 교회에 참된 복과 영광을 누리게 하실 것이다.
그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 악한 자들이 득세하는 동안 성도는 기도하고 연단받고 강해져야 한다. 죄를 회개해야 한다. 주님께서 반드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다. 주님은 절대 교회를 버리지 않으신다. 절대로 실패하시지 않으신다.
주님께서 붙잡히시고 억울하게 재판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지만 그것으로 구속을 이루신다. 하나님은 절대 실패하시지 않는다. 

54-60절
주님이 붙잡히셔서 심문 받으시고 고난 당하실 때 베드로는 도망을 쳤었다. 참 비겁한 모습이다. 사람들이 모여 있는 뜰로 가서 불쬐는 자들과 함께 있다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죄를 지었다.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베드로는 도망을 쳐서 멀리서 주님을 바라보았다. 재판이 어떻게 되는가? 주님이 어떻게 되는가? 보려고 했다. 주님을 아주 버리지는 않고, 그렇다고 가까이 가지는 않고 자기 안전을 확보한 상태에서 주님을 보고 있었다. 그 틈 사이로 마귀가 들어와서 시험하므로 주님을 세번 부인하게 된다. 절대로 주님과 멀어져서는 안된다. 조금이라도 멀어지면 큰일 나는 줄 알아야 한다. 교회와 말씀, 주님과 멀어져서는 안된다. 주님과 나와의 거리가 어느정도인가 늘 점검해야 한다. 

"함께 앉았느니라" 주님과는 멀리 떨어져 있던 베드로가 구경하는 사람들과 함께 앉아서 불을 쬐고 있었다. 그들은 제자들이 아니다. 믿는 자들이 아니다. 베드로는 이들과 함께 있을 이유가 없었다. 구경꾼인척 하면서 불쬐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한 여자가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하자 거기 모인 모든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했다.
잠시 후에 다른 사람이 예수의 도당이라고 말하자 아니라고 했다.
한시간 쯤 후에 다른 사람이 베드로를 갈릴리 사람이라고 지적하면서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고 했지만 또 아니라고 했다. 이때 주님을 저주하며 맹세하면서 부인했다.
두려워서 부인했다. 겁이 났다. 아무튼 베드로가 큰 죄를 짓고 말았다. 그때 닭이 울었다. 예수님의 말씀이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닭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번 부인하리라"
베드로는 평생 후회할 뼈저린 실패를 했다. 함께 해서는 안될 자들과 함께 하다가, 주님과 멀찍이 떨어져 있다가 주님을 부인하는 심각한 죄를 지었다.
베드로가 주님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이렇게 될 줄 몰랐을 것이다. 사람들이 주님과 멀어지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심각한 죄를 짓게 된다. 주님과 떨어지는 것을 가볍게 여기면 안된다.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러다가 예수님 부인하고 교회를 떠나버리는 자들이 종종 생긴다.
베드로는 참 믿음이 좋은 사람인데, 아름다운 신앙고백을 했던 사람인데, 주님을 따라다니며 놀라운 일을 많이 경험했는데, 그런 베드로도 넘어졌다. 장담을 많이 한 베드로인데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61-62절
닭이 울고 있을 때 주님이 심문 받으시고 있었다. 그때 주님께서 멀리 있는 베드로를 돌아보셨다. 주님의 시선이 베드로를 향하고 있었다. 그때 베드로에게 큰 찔림이 있었다. 우리도 주님의 시선을 느껴야 한다. 주님께서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다. 이것을 의식하지 못하면 계속 죄짓는 길로 가게 된다. 하나님은 멀리 계신 것 같지만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신다. 하나님의 시선을 우리가 늘 의식하고 살아야 하겠다. 
그 순간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이 생각이 났다. 찔림이 왔고 밖에 나가 통곡하고 회개했다. 그 회개로 베드로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그때 말씀이 생각나지 않았다며 회개하지 못할 뻔 했다. 우리에게도 자꾸 말씀이 생각나야 한다. 주일날 들은 말씀이 생각나야 한다. 나를 찌르고 교훈하고 감동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야 믿음을 지키며 살 수 있다.
베드로가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한다. 이 통곡이 베드로를 살린다. 다시 귀한 일꾼으로 쓰임받게 된다. 베드로는 평생 닭 울기 전에 일어나 기도했다고 한다. "나는 닭 울기 전에 세번이나 주님을 부인한 죄인입니다"
그는 일시적으로 죄를 짓고 넘어졌지만 회개함으로 다시 일어섰다. 귀한 제자로 아름답게 쓰임받았다. 혹시라도 넘어지고 주님을 멀리하고 있다면 베드로처럼 일어나야 한다. 그러면 용서받고 살길이 열리고 제자로 귀하게 쓰임받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회개해야 한다. 말씀이 생각나고 통곡의 회개의 기도를 해야 한다. 베드로의 회복을 보면서 우리에게도 소망이 있음을 본다. 회개하므로 날마다 새사람이 되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하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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