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21 주일오전예배 설교(빌립보서 4장 11-13절/바울이 배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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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2-08-21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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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바울의 유명한 고백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기가 ‘배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합니다. 비천에 처할 줄로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았다는 말도 배워서 알았다는 뜻입니다.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웠습니다. 단순히 지식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배웠고, 경험을 통해서 몸으로 익혔습니다. 실패와 가난과 풍부와 질병과 고난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배워야 할 것들입니다.
1.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합니다(11절). 자족은 저절로 생기는 것 아니고 배우는 것입니다. 자족이 무엇입니까? 모든 환경을 믿음으로 극복하면서 그 안에서 만족을 누리는 것입니다. 현재의 형편과 현재의 상태와 현재의 위치와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꿈도 없고, 소망도 없이, 되는대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족이란, 할 일도 안 하고 방탕하면서 게으르게 사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입니다. 불평하거나 원망하거나 않고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면서도 얼마든지 앞날에 대해서 큰 꿈과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온도계’가 있고 ‘온도조절기’가 있습니다. 온도계는 날씨가 추우면 그 추운 날씨의 영향을 받아 눈금이 내려갑니다. 날씨가 더우면 온도계는 그 더운 날씨의 영향을 받아 눈금이 올라갑니다. 온도계는 바깥 날씨의 영향을 그대로 받아서 자기 눈금이 변합니다. 그러나 온도조절기는 다릅니다. 실내 온도를 25도에 맞춰놓으면 항상 그 온도가 유지되도록 자동으로 조절해줍니다. 날씨가 추우면 히터를 작동시켜서 실내 온도를 높여주고 날씨가 더운 날에는 에어컨을 작동시켜서 실내 온도를 낮춰줍니다. 그렇게 해서 항상 온도가 25도가 되도록 만들어줍니다. 성도들은 온도조절기와 같아야 합니다. 환경의 지배를 받아 내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환경을 지배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지 하나님을 모시고 만족하며 살아야 합니다.
바울이 이 빌립보서를 어디서 썼는지 아십니까? 로마 감옥에서 썼습니다. 감옥은 얼마나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곳입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런 감옥에서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나는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기를 배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자족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예수님을 모시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1:21에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갈라디아서 2:20에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바울은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우주보다 크신 주님이 바울 안에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마음에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 하와를 만드시고 에덴동산에 두시고 모든 필요한 것들을 다 주셨습니다. 완전한 만족과 행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각종 나무의 실과를 임으로 먹게 하시고 아담 하와가 평생 먹어도 다 먹지 못할 만큼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악한 마귀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유혹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찮게 여기게 만들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게 하고 욕심을 품게 만듭니다. 결국 아담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이렇게 자족하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던 아담 하와는 에덴동산도, 각종 나무의 실과도 다 잃어버리고, 이마에 땀을 흘리며 일해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디모데전서 6:6~8에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여기에 보면 자족을 경건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자족하는 삶은 세상 형편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까?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최고의 능력은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만족하며 사는 것입니다. 잠언 17:24에 “지혜는 명철한 자의 앞에 있거늘 미련한 자는 눈을 땅끝에 두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좋은 것을 놓아두셨는데 미련한 자는 자꾸 먼 곳을 바라봅니다.
미국에서 자동차로 여행하다 보면 목장을 자주 보게 됩니다. 넓고 푸른 잔디밭에 울타리를 쳐 놓고 그 안에서 소들을 방목합니다. 한번은 소 한 마리가 철조망 사이로 머리를 내밀고 울타리 밖에 있는 풀을 뜯어 먹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울타리 안에 넓은 초장이 있고 얼마든지 먹고 남을 만큼 많은 풀들이 있는데도, 목을 옆으로 비틀어가지고 울타리 밖에 있는 풀을 뜯어 먹으려고 하다가 가시에 목을 찔리고 고통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 풍족한데도 자꾸 밖에 있는 것을 탐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2.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12절에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바울은 비천에 처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가난해졌다거나 고생을 많이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낮아져서 비천하게 된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신앙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는 뜻입니다. 비천에 처해봐야 하늘 보좌를 내놓고 낮아지셔서 종이 되신 예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고, 비천에 처해봐야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섬길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3-27에 바울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하나님 일하다가 비난도 받고, 멸시도 받고, 욕을 먹기도 하고 여러 가지 위험을 당했습니다. 주리며 목마르고 헐벗고 굶주린 적도 많았습니다. 세상의 더러운 것과 같이 되고,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고전 4:13). 그러나 이런 것들 때문에 유혹에 넘어가거나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성도는 높아지는 법만 배우지 말고, 낮아지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부하게 살아가는 법만 배우지 말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올라가는 법도 배워야 하지만, 내려가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5:6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3.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12절에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았다고 했습니다. 돈 쓰는 법을 배우고, 놀고먹고 마시는 법을 배우고, 즐기는 법을 배웠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풍부에 처해서도 교만해지거나 방탕하지 않고 믿음을 잘 지켰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물질이나 명예나 부귀나 쾌락이나 권세로 인하여 믿음이 흔들리거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풍부한 물질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고 그 물질 의지하고 살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비천에 처할 줄 만 알면 안 되고 풍부에 처할 줄로 알아야 합니다. 마귀가 풍부함을 통해 방탕하게 만들고 죄짓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어려움이나 위험한 상황을 만나도 염려하신 적이 있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반대해도, 홍해가 가로막혀 있어도, 광야에서 먹을 것이 떨어지고 물이 없어도, 가나안 7 족속도, 염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염려하신 적이 있습니다. 신명기 8:12-14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소와 양이 번성하며 은금이 증식되며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셨습니다.
잠언 30:8-9에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아무리 가난할지라도 가난 때문에 죄짓지 않고 믿음 잃지 말고 아무리 배부르고 부자로 잘 살아도 돈 때문에 교만해지지 말고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4.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2절에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바울은 모든 일에서 배우고, 모든 환경에서 배우고, 모든 문제에서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를 배웠습니다. 모든 환경에 적응하는 법을 배우고, 모든 문제를 믿음으로 이기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모든 상황에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바울은 일체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바울은 물질을 초월했습니다. 가난하든지 부요하든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궁핍하든지 풍부하든지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모든 환경을 초월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을 때나 자유의 몸이 되어서 감옥 밖에서 지낼 때나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는 어디에서나 항상 기뻐하였고, 어디에서나 감사하며 찬송하였고, 어디에서나 기도하며 복음 전했습니다.
바울은 명예나 영광을 초월했습니다. 대접을 받든지 핍박을 받든지, 알아주든지 몰라주든지, 환영받든지 버림받든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것으로 섭섭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육신을 초월했습니다. 건강하든지 병이 나든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생명도 초월했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았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었습니다. 누가 죽일까봐 겁을 내거나, 목숨이 두려워서 복음 전하는 일에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바울을 낙심시키거나 바울의 믿음을 방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체의 비결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바울같이 일체의 비결을 배웁시다.
5.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구절을 만사형통의 도구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만 있으면 가난하던 사람이 갑자기 부자가 되고, 무슨 병에 걸렸든지 병이 다 낫고, 순식간에 모든 환경이 바뀌고, 만사형통할 수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능력은 모든 환경 중에 참고 견디면서 믿음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12절과 연결해서 보면 바울은 궁핍한 중에 조금도 낙심하거나 염려하지 않고 궁핍한 환경에서 참고 인내하면서 믿음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자족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물론 믿음 안에 기적이 있습니다. 병도 고치고, 이적도 행하고, 죽은 자도 살리고, 가난한 자가 축복을 받아서 부자가 되기도 하고, 환경을 바꾸기도 하고, 강한 원수와 대적을 멸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주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모든 환경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난한 중에도 감사할 수 있게 하시고, 환난과 핍박 중에서 찬송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도 일체의 비결을 배웁시다. 그러면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환경이 어떻게 달라지든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본문은 바울의 유명한 고백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기가 ‘배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합니다. 비천에 처할 줄로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았다는 말도 배워서 알았다는 뜻입니다.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배웠습니다. 단순히 지식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서 배웠고, 경험을 통해서 몸으로 익혔습니다. 실패와 가난과 풍부와 질병과 고난을 통해서 배웠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배워야 할 것들입니다.
1.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합니다(11절). 자족은 저절로 생기는 것 아니고 배우는 것입니다. 자족이 무엇입니까? 모든 환경을 믿음으로 극복하면서 그 안에서 만족을 누리는 것입니다. 현재의 형편과 현재의 상태와 현재의 위치와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꿈도 없고, 소망도 없이, 되는대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족이란, 할 일도 안 하고 방탕하면서 게으르게 사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제입니다. 불평하거나 원망하거나 않고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면서도 얼마든지 앞날에 대해서 큰 꿈과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온도계’가 있고 ‘온도조절기’가 있습니다. 온도계는 날씨가 추우면 그 추운 날씨의 영향을 받아 눈금이 내려갑니다. 날씨가 더우면 온도계는 그 더운 날씨의 영향을 받아 눈금이 올라갑니다. 온도계는 바깥 날씨의 영향을 그대로 받아서 자기 눈금이 변합니다. 그러나 온도조절기는 다릅니다. 실내 온도를 25도에 맞춰놓으면 항상 그 온도가 유지되도록 자동으로 조절해줍니다. 날씨가 추우면 히터를 작동시켜서 실내 온도를 높여주고 날씨가 더운 날에는 에어컨을 작동시켜서 실내 온도를 낮춰줍니다. 그렇게 해서 항상 온도가 25도가 되도록 만들어줍니다. 성도들은 온도조절기와 같아야 합니다. 환경의 지배를 받아 내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환경을 지배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지 하나님을 모시고 만족하며 살아야 합니다.
바울이 이 빌립보서를 어디서 썼는지 아십니까? 로마 감옥에서 썼습니다. 감옥은 얼마나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곳입니까? 그러나 바울은 그런 감옥에서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나는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기를 배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자족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예수님을 모시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1:21에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갈라디아서 2:20에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바울은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았습니다. 우주보다 크신 주님이 바울 안에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마음에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 하와를 만드시고 에덴동산에 두시고 모든 필요한 것들을 다 주셨습니다. 완전한 만족과 행복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각종 나무의 실과를 임으로 먹게 하시고 아담 하와가 평생 먹어도 다 먹지 못할 만큼 많은 것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악한 마귀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유혹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찮게 여기게 만들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게 하고 욕심을 품게 만듭니다. 결국 아담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이렇게 자족하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던 아담 하와는 에덴동산도, 각종 나무의 실과도 다 잃어버리고, 이마에 땀을 흘리며 일해야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디모데전서 6:6~8에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여기에 보면 자족을 경건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자족하는 삶은 세상 형편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까? 있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최고의 능력은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만족하며 사는 것입니다. 잠언 17:24에 “지혜는 명철한 자의 앞에 있거늘 미련한 자는 눈을 땅끝에 두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좋은 것을 놓아두셨는데 미련한 자는 자꾸 먼 곳을 바라봅니다.
미국에서 자동차로 여행하다 보면 목장을 자주 보게 됩니다. 넓고 푸른 잔디밭에 울타리를 쳐 놓고 그 안에서 소들을 방목합니다. 한번은 소 한 마리가 철조망 사이로 머리를 내밀고 울타리 밖에 있는 풀을 뜯어 먹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울타리 안에 넓은 초장이 있고 얼마든지 먹고 남을 만큼 많은 풀들이 있는데도, 목을 옆으로 비틀어가지고 울타리 밖에 있는 풀을 뜯어 먹으려고 하다가 가시에 목을 찔리고 고통당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 풍족한데도 자꾸 밖에 있는 것을 탐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2.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12절에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바울은 비천에 처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 말은 바울이 가난해졌다거나 고생을 많이 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낮아져서 비천하게 된 상황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신앙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는 뜻입니다. 비천에 처해봐야 하늘 보좌를 내놓고 낮아지셔서 종이 되신 예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고, 비천에 처해봐야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섬길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3-27에 바울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하나님 일하다가 비난도 받고, 멸시도 받고, 욕을 먹기도 하고 여러 가지 위험을 당했습니다. 주리며 목마르고 헐벗고 굶주린 적도 많았습니다. 세상의 더러운 것과 같이 되고,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다고 했습니다(고전 4:13). 그러나 이런 것들 때문에 유혹에 넘어가거나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성도는 높아지는 법만 배우지 말고, 낮아지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부하게 살아가는 법만 배우지 말고, 가난하게 살아가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올라가는 법도 배워야 하지만, 내려가는 법도 배워야 합니다. 베드로전서 5:6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3.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12절에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았다고 했습니다. 돈 쓰는 법을 배우고, 놀고먹고 마시는 법을 배우고, 즐기는 법을 배웠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풍부에 처해서도 교만해지거나 방탕하지 않고 믿음을 잘 지켰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물질이나 명예나 부귀나 쾌락이나 권세로 인하여 믿음이 흔들리거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풍부한 물질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고 그 물질 의지하고 살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비천에 처할 줄 만 알면 안 되고 풍부에 처할 줄로 알아야 합니다. 마귀가 풍부함을 통해 방탕하게 만들고 죄짓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어려움이나 위험한 상황을 만나도 염려하신 적이 있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이 반대해도, 홍해가 가로막혀 있어도, 광야에서 먹을 것이 떨어지고 물이 없어도, 가나안 7 족속도, 염려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염려하신 적이 있습니다. 신명기 8:12-14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소와 양이 번성하며 은금이 증식되며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그들의 마음이 교만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셨습니다.
잠언 30:8-9에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아무리 가난할지라도 가난 때문에 죄짓지 않고 믿음 잃지 말고 아무리 배부르고 부자로 잘 살아도 돈 때문에 교만해지지 말고 하나님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4.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2절에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바울은 모든 일에서 배우고, 모든 환경에서 배우고, 모든 문제에서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하나님의 인도와 섭리를 배웠습니다. 모든 환경에 적응하는 법을 배우고, 모든 문제를 믿음으로 이기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모든 상황에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바울은 일체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바울은 물질을 초월했습니다. 가난하든지 부요하든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궁핍하든지 풍부하든지 그것에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모든 환경을 초월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을 때나 자유의 몸이 되어서 감옥 밖에서 지낼 때나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는 어디에서나 항상 기뻐하였고, 어디에서나 감사하며 찬송하였고, 어디에서나 기도하며 복음 전했습니다.
바울은 명예나 영광을 초월했습니다. 대접을 받든지 핍박을 받든지, 알아주든지 몰라주든지, 환영받든지 버림받든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것으로 섭섭하거나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육신을 초월했습니다. 건강하든지 병이 나든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생명도 초월했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았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었습니다. 누가 죽일까봐 겁을 내거나, 목숨이 두려워서 복음 전하는 일에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바울을 낙심시키거나 바울의 믿음을 방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체의 비결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바울같이 일체의 비결을 배웁시다.
5.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구절을 만사형통의 도구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만 있으면 가난하던 사람이 갑자기 부자가 되고, 무슨 병에 걸렸든지 병이 다 낫고, 순식간에 모든 환경이 바뀌고, 만사형통할 수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능력은 모든 환경 중에 참고 견디면서 믿음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12절과 연결해서 보면 바울은 궁핍한 중에 조금도 낙심하거나 염려하지 않고 궁핍한 환경에서 참고 인내하면서 믿음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자족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물론 믿음 안에 기적이 있습니다. 병도 고치고, 이적도 행하고, 죽은 자도 살리고, 가난한 자가 축복을 받아서 부자가 되기도 하고, 환경을 바꾸기도 하고, 강한 원수와 대적을 멸하기도 합니다. 바울은 주님을 의지하고 믿음으로 모든 환경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난한 중에도 감사할 수 있게 하시고, 환난과 핍박 중에서 찬송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도 일체의 비결을 배웁시다. 그러면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환경이 어떻게 달라지든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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