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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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02 수요예배 설교(누가복음 14장 1-14절/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가르치신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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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2-02-02 21:06 조회7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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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https://youtu.be/8jYQe_X31pU

1절
주님께서 안식일에 한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가셨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초청해서 음식을 잡수시러 그 집에 들어가신 것이다. 예수님은 죄인들과도 접촉하는 일을 꺼리지 않으셨다.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영혼 구원할 기회로 삼기 위해서 죄인들을 만나는 일을 하셨다.
그런데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들어갔을 때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엿보고 있었다. 이들은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이었다(3절). 많은 바리새인들이 이 자리에 모였던 것 같다. 예수님을 초청한 사람은 바리새인의 지도자이고, 많은 바리새인들이 모여 음식을 나누고 있었다.
이들이 예수님의 실수와 책잡을 일을 찾기 위해서 은밀히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2절
그 집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어서, 주님 앞에 데리고 온 것이다. 수종은 부종과 같은 것이다. 배에 물이 차서 붓는 병인데, 신장이나 간장이 좋지 않을 때 생기는 병이다. 당시 의술로는 고칠수 없는 불치병이었다. 이 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온 것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가를 엿보고 책잡기 위해서 였다.
주님은 이들의 의도를 파악하시고 먼저 질문하신다.

3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눅 14:3)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치면 문제 삼을 것을 아셨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을의 생각을 아시고 먼저 말씀하신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여러차례 이 문제로 주님과 갈등하고 논쟁을 했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또 고쳐주시면서, 병에 얽매여 있는 사람을 놓임 받게 하고, 마귀로부터 해방과 자유를 얻게 하신다.
구약 율법에 보면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다. 바리새인들은 이 말씀의 근본 의미를 오해했다. 선한 일, 사람 살리는 일은 할수 있는 것인데 아무 일도 하면 안되는 것을 오해했고, 성경 외에 바리새인들이 만들어놓은 규례대로 하느라고 안식일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주님께서 안식일에 생명 살리고, 영혼 구원하는 일을 하면 율법을 어겼다고 비난했다.
하나님이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한 것은 세상일 하지 말고 믿는 일, 하나님 섬기는 일에 집중하라는 의미인데, 곡해해서 아무일도 하면 안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 문제로 예수님과 여러 번 부딛히고 갈등했는데, 주님께서 말씀을 가르쳐주시고 깨우쳐주시는데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님을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으니까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누가복음 6:1 이하에 밀 이삭을 잘라먹는 일로 논쟁할 때, 요한복음 6:6 이하에 손마른 사람을 고쳐주셨고, 누가복음 13:10 이하에 귀신들려 허리가 구부러진 여자를 고쳐주셨고, 요한복음 5장에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셨고, 요한복음 9장에 날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쳐주셨는데, 모두 안식일에 하신 일이다. 주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구원할 자를 구원하셨다. 이때 주님을 메시야로 믿었다면 주님을 인정하고 가르침을 잘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여러차례 깨우쳐주시는데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주님은 선을 행하시고 하나님 뜻대로 힘써 복음을 전하시고 영혼 구원하는 일을 하시는데 바리새인들이 인정하지 않고 비난하고 책잡으려고 하고 나중에는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다. 매우 강퍅하고 악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주님께서 먼저 물어보신 것이다.

4절
그들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주님이 어떻게 하는가 살펴서 비난하려고 했다. 주님은 수종병 든 자를 고쳐주셨다. 그리고 보내셨다.

5-6절
그런 다음에 주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 하시니”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아들이 물에 빠졌을때 끌어내지 않을 사람은 없다. 우물에 빠진 것보다 더 곤란한 일을 입고 있는 사람들,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는 자들, 죽을 병에 걸려 고통받는 자들을 고쳐주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이들은 주님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예수님의 말씀이 합당하고 옳기 때문에 무슨 말로고 반박할수 없었다. 논리적으로 옳은 말씀을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항할수는 없지만 맞는 말씀이기 때문에 반박할수 없었다. 주님의 말씀이 옳은줄 알면서도 손해볼까봐 대답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주님이 조금이라도 잘못하셨다면 벌떼같이 달려들어서 책잡고 비난했을텐데 주님의 말씀이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주님을 따르려고는 하지 않고 있다. 엿보고 책잡으려고 했다가 주님이 하시는 일이 옳다는 것을 인정할수 밖에 없게 되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 주님께서 수없이 강조하셨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것은 세상일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하다가 믿는 일, 하나님 섬기는 일을 못하기 때문이다. 안식일이라도 선한 일은 해야 한다. 복음을 전하고, 병든 자를 고치는 일을 해야 한다.

7절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 청함을 받은 자이니 대개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런데 서로 눈치를 보면서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신경전을 벌였던 것 같다.
주님께서 바리새인의 특징을 말씀하셨다.
“[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마 23:6~7)
잔치의 청함을 받으면 웃자리에 앉으려고 하고, 시장에서 문안 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랍비라 칭함받기를 좋아했다.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한 것이다.

8-9절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든지, 잔치집에 청함을 받아서 가게 되면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는 것이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데, 더 높은 사람이 늦게 와서 자리를 양보해달라고 하면 밑에 자리로 내려가야 한다. 그런 일을 겪게 되면 굉장히 부끄럽게 될 것이다.

10절
“청함을 받았을 때에 차라리 가서 끝자리에 앉으라 그러면 너를 청한 자가 와서 너더러 벗이여 올라 앉으라 하리니 그 때에야 함께 앉은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이 있으리라” (눅 14:10)
높은 자리에 앉지 말고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셨다. 이것이 높임 받고 영광을 받을수 있는 길이다.

“[6] 왕 앞에서 스스로 높은 체하지 말며 대인들의 자리에 서지 말라 [7] 이는 사람이 네게 이리로 올라오라고 말하는 것이 네 눈에 보이는 귀인 앞에서 저리로 내려가라고 말하는 것보다 나음이니라” (잠 25:6~7)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가 내려가라고 하면 창피한 일이다. 그런데 낮은 자리에 있다가 높은 자리로 이동하게 되면 그것이 존귀하게 되는 길이다.
처음부터 낮은 자리로 가라는 것이다. 끝자리로 가라고 권면하고 있다. 그러면 손해볼 일이 생기지 않는다. 자기를 낮추면 손해볼 일이 생기지 않는다. 높은 사람이 오지 않아서 높은 자리로 올라가게 되면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높은 자리에 앉아 있다가 내려가게 되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차라리 낮은 자리에 앉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높은 자리는 많지도 않고, 그 자리에 앉기는 어렵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자꾸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한다.
허나님의 나라는 겸손한 자를 높여주신다. 낮은 자를 높여주시는 것이 하늘나라의 원리이다.

11절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눅 14:11)
스스로 높이려고 애를 쓰면 결국 낮아진다. 그런데 자기를 스스로 낮추면 높아지게 된다. 사람들도 높여주고, 하나님이 반드시 높여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벧전 5:6)
늘 우리 스스로 낮은 자리에 처하려고 힘을 써야 한다. 사람이 겸손해서 손해보는 일은 없다. 교만하다가 손해보고, 멸망당하는 일은 많다. 그러므로 항상 낮은 자리에 들어가도록 힘을 써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마 18:4)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크다. 어린 아이는 자기를 낮춘다. 그런 자들이 하늘나라에서 큰 자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12절
세상에서는 음식 한번 대접하면서도 계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계산을 하지 말라고 했다. 베풀 때 벗, 형제, 친척, 부한 이웃을 청하지 말라고 했다. 나중에 그들이 다시 나를 청해서 대접하면 상받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받을 상이 없어지고 만다. 그러므로 될수 있으면 가난한, 몸 불편한 자, 저는 자, 맹인들을 청하라고 했다. 이들은 가난하고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나중에 갚을수 없다. 내가 베풀기만 하고 보답받지 못했으니 하나님 앞에 보상받을 일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받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가르쳐주셨다.
우리는 베풀고 보답받기를 원하는데 주님은 보답받지 않기를 원해야 한다고 하셨다. 하늘나라에서 받을 상이 더 많아지기 때문이다.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6:3~4)
구제할 때에도 그렇게 하라고 하셨다. 은밀하게, 모르게 하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해서 갚아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의 교훈은 선을 행하고, 사랑을 베풀때 계산하지 말고 순수하게 하라는 것이고, 아울러 선을 행하고 보상받지 못하면 더 좋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부활시에 갚음이 되겠기 때문이다.

14절
“그리하면 그들이 갚을 것이 없으므로 네게 복이 되리니 이는 의인들의 부활시에 네가 갚음을 받겠음이라 하시더라” (눅 14:14)
예수님 재림 때 더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하게 되고 더 큰 상급과 영광을 받게 될 것이다. 천국에 소망을 두고 부활 소망을 갖고 살면서 이 땅에서 믿음을 지키며 생활할 것을 말씀하셨다.
주님은 절대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신다. 말씀하신대로 다 이루시고 내가 선을 행한 것에 대해서 다 갚아주실 것이다. 내가 선을 행한 것에 대해서 사람에게 받으면 별것 아니지만, 사람에게 받지 않으면 하나님이 갚아주시는데, 사람에게 받은 것과는 비교할수 없을만큼 더 크게 보상해주실 것이다. 더 영광스러운 부활, 더 큰 상급을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베풀기만 하고 보상 받지 않는 것이 더 좋은 것이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잠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면 하나님께 꾸어드리는 것이 되어서 하나님이 반드시 갚아주시고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크고 많은 것으로 갚아주실 것이다. 이런 선행은 많이 행할수록 하늘의 상급이 많아질 것이다. 힘써 선을 행하는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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