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20 주일오전예배 설교(디모데전서 1장 18-20절/믿음과 양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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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2-02-20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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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권면한 내용입니다.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1. 선한 싸움을 싸우라
18절에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첫째 권면은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전쟁이나 싸움이 끊이지 않습니다. 총과 칼로 적을 죽이는 무력 전쟁이 있습니다. 기업들이나 국가 간에 이익을 위하여 싸우는 경제 전쟁도 있고, 공산주의와 자유주의가 싸우는 이념 전쟁도 있고, 정치가들이 서로 높은 지위에 올라가서 권세를 잡으려고 싸우는 권력 투쟁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벌어지는 모든 싸움에 대해서는 선한 싸움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선한 싸움이란 예수님 믿는 성도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이단과 싸우는 것이고, 죄와 싸우는 것이고, 마귀와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싸움에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성도가 선한 싸움에서 지면 죄를 짓게 되고, 마귀의 종이 되고, 믿음생활을 못하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선한 싸움을 믿음을 지키고 양심을 지키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양심을 버리기도 하고, 믿음을 배신하기도 합니다. 작은 이익을 얻으려고 믿음을 버리고 세상을 따릅니다. 그렇게 살면 선한 싸움을 싸울 수가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20절에 나오는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입니다. 이들은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한 자들입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하나님 말씀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가르쳐 준 그 말씀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말합니다. 말씀이 성령의 검이고 사탄과 싸우는 공격용 무기입니다. 여기서 “예언”에 대해서 좀 생각해보겠습니다. 앞날에 대해서 미리 말하는 것을 예언이라고 합니다. 참되고 올바른 예언은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이 앞으로 다 이루어질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3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여기서 예언의 말씀이란 요한계시록 즉 성경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언이 무엇인지 몰라서 이상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점쟁이처럼 앞날의 운세를 말해준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속이고 미혹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이상한 것을 전합니다. 지금은 신구약 성경이 다 완성되고 표준 계시가 종결되었습니다. 66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경이 신앙생활의 유일한 표준이고 기준입니다. 지금은 계시를 주지 않습니다. 직통계시는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대로 신앙생활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에 성경 말씀을 통해서 인도하시고 은혜 주실 때도 말씀을 통해서 은혜 주십니다. 성령은 말씀을 가지고 역사하십니다. 성경에 어긋나는 것은 모두 마귀의 역사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한 것은 다른 복음을 말하는 사람들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1:3-4에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신화를 얘기하고,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면서 변론만 일삼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제재하고 단속하라고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과 선한 싸움을 싸우면서 바른 복음을 전하고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전에 받은 바른 복음으로 디모데가 만들어지고 신앙의 체계가 바로 섰으므로 그것을 가지고 다른 교훈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 싸우라는 것입니다. 바른 진리의 말씀을 배워서 그 말씀을 계속 따라가고 그 말씀과 반대되는 비진리와 싸워야 참교회가 세워지고 생명이 살고 영이 자라납니다.
2.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19절에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두 번째 권면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선한 싸움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지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성경 말씀대로 믿는 바른 믿음을 의미합니다. 이 바른 믿음을 가지는 것이 선한 싸움을 잘 싸울 수 있는 비결입니다. 또 양심을 가지라고 강조합니다. 양심은 착한 마음을 가리키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특별한 선물입니다. 자기 생각과 말과 행동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깨우쳐주는 기능을 합니다. 양심은 그릇된 길로 가려고 할 때 죄를 지으려고 할 때 경고하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죄를 지었을 때는 가책을 줍니다.
베드로전서 3:21에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개역 성경에는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양심은 이처럼 내적 감시자이고 마음을 등불 역할을 합니다. 양심은 내 속에 있는 것이면서도 내 편을 들지 않습니다. 나를 책망하고, 나를 부끄럽게 만들고, 나를 불안하게 하고, 나의 죄를 깨닫게 하여 두렵게 합니다. 양심도 내 속에 있는 것이니까 내 것이겠는데 왜 이렇게 나를 괴롭힙니까? 양심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입니다. 아담 하와가 범죄하고 타락한 후에 양심도 타락하고 그 기능이 무디어졌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할 때의 형상이 일부 남아서 선과 악을 분별하게 합니다. 성경에 양심에 대한 말씀이 많은데 셋으로 구분해서 살피겠습니다.
첫째. 더러운 양심
디도서 1:15에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양심이 더러워지는 것은 욕심과 죄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8:7에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우상의 제물인 것을 알고 먹으면 양심이 약해지고 더러워진다고 했습니다.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죄를 짓고, 하나님의 말씀인 줄 알면서도 말씀을 어기면 양심이 점점 약해지고 더러워집니다.
눈보라가 칠 때 자동차를 운전하려면 아주 힘듭니다. 유리창에 안개가 서려서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호등도 안 보이고 차선도 안 보이고, 어디가 길인지 어디가 낭떨어지 인지 모릅니다. 그처럼 양심이 더러워지면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이 그른 것인지 구분을 못하게 됩니다. 고장 난 나침반처럼 아무 기능을 못 합니다. 세상에는 양심이 더러워진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잘못하고서도 오히려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사도행전 8:21-22에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마술사 시몬이 성령을 돈으로 살려고 할 때 베드로가 책망한 말입니다. 욕심으로 마음 즉 양심이 더러워져서 이 도에는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받을 수도 없고 믿을 수 없습니다. 믿음이란 옳은 진리를 믿고 따르는 것인데 옳은 것을 버리면 껍데기만 남습니다. 성도가 착한 양심을 버리면 생명력이 없어집니다. 배가 파선되어 침몰되는 것처럼 세상에 빠져 망하고 맙니다.
둘째. 화인 맞은 양심
디모데전서 4:1-2에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여기 보면 양심이 화인을 맞은 자들이 있습니다. 화인이란 옛날 노예들에게 주인의 이름을 새긴 철로 된 도장을 불에 달구어 종의 몸에 찍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평생 지워지지 않아서 그 노예가 누구의 소유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양심이 화인을 맞았습니다. 그러면 양심이 마비되고 굳어지고 죽어서 아무 감각이 없습니다. 그러면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아무 심각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1) 믿음에서 떠나게 됩니다. 2) 미혹하는 영을 따릅니다. 즉 마귀를 따릅니다. 3) 귀신의 가르침을 따릅니다. 성경 말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귀신의 가르침을 듣고 따라갑니다. 미혹하는 영,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면서도 양심이 화인 맞아서 잘못된 줄 모르고 따라갑니다. 4) 외식함으로 거짓말합니다. 양심은 진실이 생명인데 양심이 화인 맞은 사람들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합니다. 금방 들통날 것도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말을 하면서도 부끄러움도 없고 가책도 없습니다. 성경은 모든 거짓은 마귀에게서 나오고 마귀가 거짓의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양심이 화인 맞으면 이렇게 완전히 망하는 길로 갑니다.
이단에 빠진 자들이 이런 자들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9-12에 악한 자들이 나타날 때 특징을 말씀했습니다. 1)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나타납니다. 2) 멸망하는 자들,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는 자들, 구원함을 받지 못하는 자들을 미혹해서 망하게 합니다. 3)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심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혹은 진리를 따라가지 않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양심이 화인을 맞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믿음에서 떠나고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고, 외식과 거짓말만 하면서 마귀의 종이 되어 망하게 됩니다.
착한 양심을 버렸다가 믿음이 완전히 깨져버린 두 사람을 예로 듭니다. 19절에 보면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착한 양심을 버린 사람은 믿음이 파선된 자입니다. “파선”이란 깨어진 배라는 뜻입니다. 배가 깨지면 침몰합니다. 그와 같이 양심을 버리면 믿음이 깨져서 침몰하고 맙니다. 양심이 이렇게 중요한데 사람 중에는 양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20절에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착한 양심을 버리고 믿음이 파선된 대표적 인물은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입니다. 이들을 사탄에게 내주었다고 했습니다.
1) 후메내오. 디모데후서 2:17-18에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후메내오는 부활을 부인하는 이단에 넘어갔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복음의 핵심인데 후메내오는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자기의 믿음도 무너지고 다른 사람들의 믿음도 무너뜨리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2) 알렉산더. 디모데후서 4:14-15에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바울에게 해를 많이 입혔습니다. 바울이 전도할 때 방해하며 대적한 사람입니다.
셋째. 깨끗한 양심
깨끗한 양심, 청결한 양심, 착한 양심이 있습니다. 믿음생활 잘한 사람,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들은 다 양심이 청결하고 깨끗한 사람들입니다. 디모데전서 1:5에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디모데전서 3:9에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집사의 자격을 말하면서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1:3에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바울이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하나님을 섬겨왔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23:1에 보면 바울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전서 3:16에 “선한 양심을 가지라” 베드로전서 3:21에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믿음과 착한 양심은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착한 양심을 버리면 믿음이 파선합니다. 깨끗한 양심, 청결한 양심, 착한 양심을 가져야 선한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더러운 양심을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까?
히브리서 9:14에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그리스도의 피가 너희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깨끗하게 할 수 있다는 말씀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받고 중생한 자들입니다. 양심까지 깨끗하게 씻김을 받은 자들입니다. 깨끗한 양심은 중생한 영이 사용하는 양심입니다. 이 깨끗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착한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양심입니다. 성도의 영혼 속에는 성령의 감동이 있습니다. 이 성령의 감동을 따라가는 것이 착한 양심입니다. 이 착한 양심은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여 그릇된 것은 버리고 옳은 것을 따라가게 합니다. 믿음 생활을 잘하려면 양심을 똑바로 써야 합니다. 이 시대에 깨어 있는 양심, 살아 있는 양심을 가지고, 선한 싸움을 잘 싸워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권면한 내용입니다. 말세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1. 선한 싸움을 싸우라
18절에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첫째 권면은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전쟁이나 싸움이 끊이지 않습니다. 총과 칼로 적을 죽이는 무력 전쟁이 있습니다. 기업들이나 국가 간에 이익을 위하여 싸우는 경제 전쟁도 있고, 공산주의와 자유주의가 싸우는 이념 전쟁도 있고, 정치가들이 서로 높은 지위에 올라가서 권세를 잡으려고 싸우는 권력 투쟁도 있습니다. 이 세상에 벌어지는 모든 싸움에 대해서는 선한 싸움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선한 싸움이란 예수님 믿는 성도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는 것입니다. 이단과 싸우는 것이고, 죄와 싸우는 것이고, 마귀와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한 싸움에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성도가 선한 싸움에서 지면 죄를 짓게 되고, 마귀의 종이 되고, 믿음생활을 못하게 됩니다. 본문에서는 선한 싸움을 믿음을 지키고 양심을 지키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양심을 버리기도 하고, 믿음을 배신하기도 합니다. 작은 이익을 얻으려고 믿음을 버리고 세상을 따릅니다. 그렇게 살면 선한 싸움을 싸울 수가 없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20절에 나오는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입니다. 이들은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한 자들입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하나님 말씀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가르쳐 준 그 말씀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말합니다. 말씀이 성령의 검이고 사탄과 싸우는 공격용 무기입니다. 여기서 “예언”에 대해서 좀 생각해보겠습니다. 앞날에 대해서 미리 말하는 것을 예언이라고 합니다. 참되고 올바른 예언은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이 앞으로 다 이루어질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1:3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여기서 예언의 말씀이란 요한계시록 즉 성경 말씀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언이 무엇인지 몰라서 이상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점쟁이처럼 앞날의 운세를 말해준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속이고 미혹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이상한 것을 전합니다. 지금은 신구약 성경이 다 완성되고 표준 계시가 종결되었습니다. 66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경이 신앙생활의 유일한 표준이고 기준입니다. 지금은 계시를 주지 않습니다. 직통계시는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대로 신앙생활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때에 성경 말씀을 통해서 인도하시고 은혜 주실 때도 말씀을 통해서 은혜 주십니다. 성령은 말씀을 가지고 역사하십니다. 성경에 어긋나는 것은 모두 마귀의 역사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한 것은 다른 복음을 말하는 사람들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1:3-4에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신화를 얘기하고,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면서 변론만 일삼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제재하고 단속하라고 물리치라는 것입니다. 다른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과 선한 싸움을 싸우면서 바른 복음을 전하고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전에 받은 바른 복음으로 디모데가 만들어지고 신앙의 체계가 바로 섰으므로 그것을 가지고 다른 교훈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 싸우라는 것입니다. 바른 진리의 말씀을 배워서 그 말씀을 계속 따라가고 그 말씀과 반대되는 비진리와 싸워야 참교회가 세워지고 생명이 살고 영이 자라납니다.
2.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19절에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두 번째 권면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선한 싸움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지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이란 성경 말씀대로 믿는 바른 믿음을 의미합니다. 이 바른 믿음을 가지는 것이 선한 싸움을 잘 싸울 수 있는 비결입니다. 또 양심을 가지라고 강조합니다. 양심은 착한 마음을 가리키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특별한 선물입니다. 자기 생각과 말과 행동에 대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해서 깨우쳐주는 기능을 합니다. 양심은 그릇된 길로 가려고 할 때 죄를 지으려고 할 때 경고하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죄를 지었을 때는 가책을 줍니다.
베드로전서 3:21에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개역 성경에는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양심은 이처럼 내적 감시자이고 마음을 등불 역할을 합니다. 양심은 내 속에 있는 것이면서도 내 편을 들지 않습니다. 나를 책망하고, 나를 부끄럽게 만들고, 나를 불안하게 하고, 나의 죄를 깨닫게 하여 두렵게 합니다. 양심도 내 속에 있는 것이니까 내 것이겠는데 왜 이렇게 나를 괴롭힙니까? 양심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입니다. 아담 하와가 범죄하고 타락한 후에 양심도 타락하고 그 기능이 무디어졌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할 때의 형상이 일부 남아서 선과 악을 분별하게 합니다. 성경에 양심에 대한 말씀이 많은데 셋으로 구분해서 살피겠습니다.
첫째. 더러운 양심
디도서 1:15에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양심이 더러워지는 것은 욕심과 죄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8:7에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우상의 제물인 것을 알고 먹으면 양심이 약해지고 더러워진다고 했습니다.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죄를 짓고, 하나님의 말씀인 줄 알면서도 말씀을 어기면 양심이 점점 약해지고 더러워집니다.
눈보라가 칠 때 자동차를 운전하려면 아주 힘듭니다. 유리창에 안개가 서려서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호등도 안 보이고 차선도 안 보이고, 어디가 길인지 어디가 낭떨어지 인지 모릅니다. 그처럼 양심이 더러워지면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이 그른 것인지 구분을 못하게 됩니다. 고장 난 나침반처럼 아무 기능을 못 합니다. 세상에는 양심이 더러워진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잘못하고서도 오히려 큰소리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사도행전 8:21-22에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마술사 시몬이 성령을 돈으로 살려고 할 때 베드로가 책망한 말입니다. 욕심으로 마음 즉 양심이 더러워져서 이 도에는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받을 수도 없고 믿을 수 없습니다. 믿음이란 옳은 진리를 믿고 따르는 것인데 옳은 것을 버리면 껍데기만 남습니다. 성도가 착한 양심을 버리면 생명력이 없어집니다. 배가 파선되어 침몰되는 것처럼 세상에 빠져 망하고 맙니다.
둘째. 화인 맞은 양심
디모데전서 4:1-2에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여기 보면 양심이 화인을 맞은 자들이 있습니다. 화인이란 옛날 노예들에게 주인의 이름을 새긴 철로 된 도장을 불에 달구어 종의 몸에 찍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평생 지워지지 않아서 그 노예가 누구의 소유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양심이 화인을 맞았습니다. 그러면 양심이 마비되고 굳어지고 죽어서 아무 감각이 없습니다. 그러면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아무 심각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1) 믿음에서 떠나게 됩니다. 2) 미혹하는 영을 따릅니다. 즉 마귀를 따릅니다. 3) 귀신의 가르침을 따릅니다. 성경 말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귀신의 가르침을 듣고 따라갑니다. 미혹하는 영,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면서도 양심이 화인 맞아서 잘못된 줄 모르고 따라갑니다. 4) 외식함으로 거짓말합니다. 양심은 진실이 생명인데 양심이 화인 맞은 사람들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합니다. 금방 들통날 것도 거짓말을 합니다. 거짓말을 하면서도 부끄러움도 없고 가책도 없습니다. 성경은 모든 거짓은 마귀에게서 나오고 마귀가 거짓의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양심이 화인 맞으면 이렇게 완전히 망하는 길로 갑니다.
이단에 빠진 자들이 이런 자들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9-12에 악한 자들이 나타날 때 특징을 말씀했습니다. 1)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나타납니다. 2) 멸망하는 자들,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는 자들, 구원함을 받지 못하는 자들을 미혹해서 망하게 합니다. 3)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심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혹은 진리를 따라가지 않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양심이 화인을 맞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믿음에서 떠나고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고, 외식과 거짓말만 하면서 마귀의 종이 되어 망하게 됩니다.
착한 양심을 버렸다가 믿음이 완전히 깨져버린 두 사람을 예로 듭니다. 19절에 보면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착한 양심을 버린 사람은 믿음이 파선된 자입니다. “파선”이란 깨어진 배라는 뜻입니다. 배가 깨지면 침몰합니다. 그와 같이 양심을 버리면 믿음이 깨져서 침몰하고 맙니다. 양심이 이렇게 중요한데 사람 중에는 양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20절에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착한 양심을 버리고 믿음이 파선된 대표적 인물은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입니다. 이들을 사탄에게 내주었다고 했습니다.
1) 후메내오. 디모데후서 2:17-18에 “그들의 말은 악성 종양이 퍼져나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진리에 관하여는 그들이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함으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후메내오는 부활을 부인하는 이단에 넘어갔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복음의 핵심인데 후메내오는 부활을 믿지 않습니다. 자기의 믿음도 무너지고 다른 사람들의 믿음도 무너뜨리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2) 알렉산더. 디모데후서 4:14-15에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바울에게 해를 많이 입혔습니다. 바울이 전도할 때 방해하며 대적한 사람입니다.
셋째. 깨끗한 양심
깨끗한 양심, 청결한 양심, 착한 양심이 있습니다. 믿음생활 잘한 사람,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들은 다 양심이 청결하고 깨끗한 사람들입니다. 디모데전서 1:5에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디모데전서 3:9에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집사의 자격을 말하면서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디모데후서 1:3에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바울이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하나님을 섬겨왔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23:1에 보면 바울은 “나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전서 3:16에 “선한 양심을 가지라” 베드로전서 3:21에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믿음과 착한 양심은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착한 양심을 버리면 믿음이 파선합니다. 깨끗한 양심, 청결한 양심, 착한 양심을 가져야 선한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신앙생활을 잘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더러운 양심을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까?
히브리서 9:14에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그리스도의 피가 너희 양심을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깨끗하게 할 수 있다는 말씀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사함받고 중생한 자들입니다. 양심까지 깨끗하게 씻김을 받은 자들입니다. 깨끗한 양심은 중생한 영이 사용하는 양심입니다. 이 깨끗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착한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양심입니다. 성도의 영혼 속에는 성령의 감동이 있습니다. 이 성령의 감동을 따라가는 것이 착한 양심입니다. 이 착한 양심은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여 그릇된 것은 버리고 옳은 것을 따라가게 합니다. 믿음 생활을 잘하려면 양심을 똑바로 써야 합니다. 이 시대에 깨어 있는 양심, 살아 있는 양심을 가지고, 선한 싸움을 잘 싸워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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