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02 수요예배 설교(누가복음 16장 19-31절/부자와 나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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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2-03-02 21:16
조회70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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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실제로 있었던 말씀을 비유로 삼아서 말씀하신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가 아주 많은데 이름까지 언급한 것은 이 말씀 밖에 없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고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본문의 내용은 이 세상에서의 삶과 죽음 이후에 내세의 삶을 일깨워준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부자로 사는 사람도 있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도 있다. 모두가 잘 살고 행복하지는 않다. 부자와 거지가 공존하고, 부조리하고 모순이 많은 세상이다.
19절
한 부자가 있었다. 그는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다. 자색옷은 왕이나 귀족이 입는 귀한 옷이고, 고운 베옷은 아주 비싼 고급 옷이다. 금값의 두배 정도 되는 재료로 만든 옷이다. 그리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다. 얼마나 돈이 많고 잘 살면 가끔씩이 아니라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다.
20-21절
부자의 집 앞에는 거지 나사로가 있었다. 이 사람은 거지이면서 헌데 투성이었다. 그리고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었고, 심지어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핧는 비참한 생활을 했다.
겉모습을 비교하면 부자는 행복하게 잘 산것처럼 보이고 거지는 불행하고 어렵게 산것처럼 보인다. 부자는 없는 것 없이 다 갖추고 살고 하고 싶은대로 다 하는 풍족한 생활을 했다. 그런데 거지 나사로는 너무 가난했다. 집 한칸도 없고 부자의 집 앞에 버려진채 지냈고, 상에서 버려지는 음식을 먹고 살았다.
그런데 부자는 이렇게 잘 살면서, 남을 돌아보는 일은 하지 않은 것 같다. 자기 집 앞에 있는 거지 나사로 조차도 돌보지 않았다.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힘썼다. 그리고 이 부자는 하나님을 믿는 생활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로 방탕하고 죄짓는 일만 했다.
이런 부자에 대해서 성경은 엄하게 경고한다.
“[1]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약 5:1~3)
부한 자들에 대해서 엄하게 경고한다. 돈 많은 것 자체가 죄는 아니다. 그런데 그 많은 재물을 자기 만을 위해서 이기적으로 사용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믿음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장차 임할 징벌과 고통으로 인해서 울고 통곡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반면에 나사로는 가난하지만 하나님을 잘 믿는 믿음생활을 잘 한 것으로 보인다. 어렵고 힘든 형편이지만 믿음을 지켰다. 하나님을 섬기며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았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눅 16:22)
아브라함 품에 들어간 것은 천국에 간 것을 의미한다. 가난해서 천국 간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천국에 간 것이다. 나사로가 죽어서 천국에 갔다는 말은 그가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집 한칸 없이 남의 집 대문 앞에서 구걸하면서, 부스러기를 주어 먹으며 살았다. 사람들이 조롱하고, 개가 헌데를 핧는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믿고 소망하며 살았다. 그래서 그가 이 세상에서는 비참하게 살았지만 죽어서 천국에 가서는 안식을 누렸다.
가난하던지, 부하던지 먼저 힘써야 할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해져서 하나님을 믿으면 복있는 사람이다. 반면에 돈도 없고, 부자도 아니면서 마음만 부요해서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면서 살면 불행한 사람이다. 이 땅에서도 복을 받지 못하고 죽어서도 천국에 가지 못한다.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마 19:24)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어렵다고 하셨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마음이 겸손하고 가난해져서 하나님을 잘 섬긴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다.
22절
거지가 죽었다. 장례식도 제대로 치루지 못했을 것이다. 누가 관심을 갖고 정성 들여 돌봐주었겠나? 그런데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으의 품에 들어갔다.
부자도 죽어서 장사되었다. 굉장하게 장례식을 치뤘을 것이다. 거창하게 치루고 많은 사람들이 조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천국에 가지 못했다.
문제는 죽음 이후이다. 부자도 죽고 가난한 거지도 죽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죽음 이후에 그들의 형편이 달라진다.
죽음 이후에 갈 곳은 두군데 밖에 없는데, 믿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고 불신자는 지옥에 들어간다. 거지 나사로는 이 세상에서 비참하게 살았지만 죽어서 천국에 갔고, 부자는 이 세상에서 편안하게 즐기면서 잘 살았지만 죽은 다음에 지옥에 떨어져 고통 받고 불행하게 지냈다.
이 세상은 잠깐이다. 하루가 긴 것 같지만 눈 깜짝하면 하루가 지나간다. 일년이 긴 것 같지만 금방 지나간다. 한평생이 잠깐이면 지나간다. 아침 안개와 같고, 화살 같이 빨리 날아가는 인생이다. 거기에 비하면 내세 천국이나 지옥은 영원한 삶이다. 천년도 만년도 아니고 영원한 삶이다. 내세에 어디로 가느냐 는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로 달라지게 된다.
나사로가 죽어서 간 곳을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했는데, 아브라함의 품은 아브라함이 죽어서 간 천국을 가리킨다. 천국이 아닌 다른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내세에 대해서 천국과 지옥 외에 다른 것을 말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롬 4:16)
부자가 간 곳은 음부라고 했다. 음부는 "스올"인데, 무덤, 사후 형벌의 장소, 지옥 등의 의미를 갖는데 본문에서는 지옥을 말하는 것이다. 24절 끝에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지옥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갔다.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이 꺼지지 않고, 물 한방울도 얻지 못해 목이 타는 곳, 심한 고통과 형벌을 받는 장소이다.
부자가 고통 가운데 눈을 들어 보니 멀리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것을 보았다.
24절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눅 16:24)
천국에 간 거지 나사로는 아무런 요청도 부탁도 할 필요가 없다. 지옥에 간 부자만 아브라함에게 두가지 요청을 하는데 모두 거절을 당한다.
첫번째 요청은 나사로 손가락에 물 한방울을 찍어서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했다. 불꽃 가운데서 얼마나 무서운 고통을 당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게 해준다. 지옥 고통이라는 것은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다. 직접 가서 체험하기 전에는 무엇으로 설명하겠나?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가장 아프고 힘들고 괴롭고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서 영원히 형벌당하는 고통일텐데 참으로 끔찍하다. 우리는 지옥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믿는다. 가끔 지옥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교인이 있는데, 지옥이 없다면 복음이 복음이 되지 않는다. 지옥이 없다면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 죄값으로 지옥 형벌 받을 지옥이 없는데 두려울 것이 없다. 그러나 성경은 지옥이 있음을 명확하게 말씀한다.
지옥을 믿지 않으면 성경을 믿지 않는 것이고, 지옥을 믿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지옥을 믿지 않으면 믿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어떻게 지옥을 만들수 있느냐 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선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이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마 25:41)
영원한 불은 지옥을 말하는데, 지옥은 마귀를 위해서 만든 것이다. 마귀를 지옥에 보내려고 만들었는데, 마귀에게 미혹당해서 죄를 짓다가 마귀를 따라서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이다.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들어가서 무시무시한 고통을 당함으로 나사로의 손가락에 물을 찍어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했는데 거절을 당했다.
25절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눅 16:25)
부자는 살았을 때 세상에서 사치하고 연락하고 방탕생활하면서 믿음생활을 하지 않았다. 내세에 대해서 아무 준비를 하지 않았다. 자기 욕심만 채우고 이기주의로 사는 죄를 지었다.
부자가 지옥에 가서 고통을 당하는 근본 원인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살았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불택자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이 받을 분깃을 미리 다 주신다.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 (시 17:14)
안믿는 사람, 불택자들에 대한 말씀이다. 그들은 살아있는 동안 분깃을 다 받아서 누리도록 하신다. 주님이 주신 재물로 배를 채운다. 이렇게 살다가 죽은 다음에는 지옥에 가서 저주와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부자의 모습과 똑같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이 주신 것인줄 모르고 마음껏 즐기고 죄짓다가 죽어서 지옥에 가서 벌받는 것이다.
26절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눅 16:26)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엄청나게 큰 공간이 있어서 오갈 수 없는것 같다. 천국에 간 사람은 거기서 다시 나와서 지옥에 갈 수 없고, 지옥에 간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다.
볼 수는 있었던 것 같다. 지옥간 부자가 아브라함 품에 안겨있는 거지를 보면서 부러워했다. 보면서도 왔다 갔다는 하지 못하고 고통당하는 부자의 심정이 얼마나 비통했을지 상상해볼 수 있다.
27절
부자가 두번째 요청을 한다. 지옥에 와서 체험해보니 너무 고통스럽고 죽을 수도 없는 곳이고, 피할 수도 없고, 영원히 불구덩이에서 괴로워해야하니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부탁하기를 나사로를 아버지 집에 보내 형제들에게 증언하여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그런데 이 요청도 거절당한다. 지옥간 부자는 죽은 나사로가 살아서 자기 형제들에게 가서 말하면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29절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눅 16:29)
모세와 선지자들은 오래 전에 다 죽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들으라는 것은 성경말씀을 가리킨다. 성경말씀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이 있으니까 그들에게 들으라는 말씀이다.
30절
부자가 다시 간청한다. 자기 형제들이 강퍅하고 믿음생활에 대해서 전혀 관심 조차 없는 것을 부자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전도자가 전하는 것을 믿지 않을 것이 분명하고 죽은 자가 살아나서 전하면 혹시 믿을지 모르니까 사정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거부를 당한다.
31절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눅 16:31)
전도자들이 말씀 가지고 전도할 때 그 말씀을 믿어야 하는데, 그때 믿지 않으면 죽은 자가 살아나서 전도할지라도, 이적을 경험하고 신비한 체험을 할지라도 그것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이다. 믿음은 복음을 듣고 믿는 것이다. 복음을 듣고 믿어야 구원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 그 방법이 아니고서는 구원받을 방법이 없다.
다시 말해서 전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전도로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 지옥 갔다 왔다고 간증하면 믿을줄 알고 이상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을 가지고는 권함을 받지 못한다.
전도자를 통해서 복음을 듣는 것, 다시 말해 먼저 믿은 성도들이 복음 전해주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 복음 전하는 일을 해야 믿지 않은 사람이 듣게 되고 들어야 믿게 되고 믿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
지옥간 부자가 요청하는 것이 복음 전해주는 것이었다. 지옥간 부자가 믿지 않는 형제들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 간절한 외침을 기억하고 복음 전하는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하겠다.
부자의 요청은 모두 거절 당했다. 손가락 끝에 물 한방울 묻혀서 혀를 적셔달라는 것, 나사로를 보내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해달라고 하는 요청을 거절당했다.
살아있는 때 보다 죽어서 천국에 가는가, 지옥에 가는가 가 더 중요하다. 죽어서 천국과 지옥 사이를 왔다 갔다 할 수 없다. 다른 방법으로는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오직 전도로, 복음 전하는 것으로만 구원할 수 있다. 이 사명을 우리에게 맡기셨다. 모세와 선지자는 복음을 맡아 가지고 있는 성도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믿게 하셨는데, 복음전도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하겠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실제로 있었던 말씀을 비유로 삼아서 말씀하신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가 아주 많은데 이름까지 언급한 것은 이 말씀 밖에 없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고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본문의 내용은 이 세상에서의 삶과 죽음 이후에 내세의 삶을 일깨워준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부자로 사는 사람도 있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도 있다. 모두가 잘 살고 행복하지는 않다. 부자와 거지가 공존하고, 부조리하고 모순이 많은 세상이다.
19절
한 부자가 있었다. 그는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다. 자색옷은 왕이나 귀족이 입는 귀한 옷이고, 고운 베옷은 아주 비싼 고급 옷이다. 금값의 두배 정도 되는 재료로 만든 옷이다. 그리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다. 얼마나 돈이 많고 잘 살면 가끔씩이 아니라 날마다 호화롭게 즐겼다.
20-21절
부자의 집 앞에는 거지 나사로가 있었다. 이 사람은 거지이면서 헌데 투성이었다. 그리고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었고, 심지어 개들이 와서 헌데를 핧는 비참한 생활을 했다.
겉모습을 비교하면 부자는 행복하게 잘 산것처럼 보이고 거지는 불행하고 어렵게 산것처럼 보인다. 부자는 없는 것 없이 다 갖추고 살고 하고 싶은대로 다 하는 풍족한 생활을 했다. 그런데 거지 나사로는 너무 가난했다. 집 한칸도 없고 부자의 집 앞에 버려진채 지냈고, 상에서 버려지는 음식을 먹고 살았다.
그런데 부자는 이렇게 잘 살면서, 남을 돌아보는 일은 하지 않은 것 같다. 자기 집 앞에 있는 거지 나사로 조차도 돌보지 않았다.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힘썼다. 그리고 이 부자는 하나님을 믿는 생활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로 방탕하고 죄짓는 일만 했다.
이런 부자에 대해서 성경은 엄하게 경고한다.
“[1]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2]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3]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약 5:1~3)
부한 자들에 대해서 엄하게 경고한다. 돈 많은 것 자체가 죄는 아니다. 그런데 그 많은 재물을 자기 만을 위해서 이기적으로 사용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믿음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장차 임할 징벌과 고통으로 인해서 울고 통곡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반면에 나사로는 가난하지만 하나님을 잘 믿는 믿음생활을 잘 한 것으로 보인다. 어렵고 힘든 형편이지만 믿음을 지켰다. 하나님을 섬기며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았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눅 16:22)
아브라함 품에 들어간 것은 천국에 간 것을 의미한다. 가난해서 천국 간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천국에 간 것이다. 나사로가 죽어서 천국에 갔다는 말은 그가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집 한칸 없이 남의 집 대문 앞에서 구걸하면서, 부스러기를 주어 먹으며 살았다. 사람들이 조롱하고, 개가 헌데를 핧는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믿고 소망하며 살았다. 그래서 그가 이 세상에서는 비참하게 살았지만 죽어서 천국에 가서는 안식을 누렸다.
가난하던지, 부하던지 먼저 힘써야 할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해져서 하나님을 믿으면 복있는 사람이다. 반면에 돈도 없고, 부자도 아니면서 마음만 부요해서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면서 살면 불행한 사람이다. 이 땅에서도 복을 받지 못하고 죽어서도 천국에 가지 못한다.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마 19:24)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어렵다고 하셨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마음이 겸손하고 가난해져서 하나님을 잘 섬긴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을 수 있다.
22절
거지가 죽었다. 장례식도 제대로 치루지 못했을 것이다. 누가 관심을 갖고 정성 들여 돌봐주었겠나? 그런데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으의 품에 들어갔다.
부자도 죽어서 장사되었다. 굉장하게 장례식을 치뤘을 것이다. 거창하게 치루고 많은 사람들이 조문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천국에 가지 못했다.
문제는 죽음 이후이다. 부자도 죽고 가난한 거지도 죽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죽음 이후에 그들의 형편이 달라진다.
죽음 이후에 갈 곳은 두군데 밖에 없는데, 믿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고 불신자는 지옥에 들어간다. 거지 나사로는 이 세상에서 비참하게 살았지만 죽어서 천국에 갔고, 부자는 이 세상에서 편안하게 즐기면서 잘 살았지만 죽은 다음에 지옥에 떨어져 고통 받고 불행하게 지냈다.
이 세상은 잠깐이다. 하루가 긴 것 같지만 눈 깜짝하면 하루가 지나간다. 일년이 긴 것 같지만 금방 지나간다. 한평생이 잠깐이면 지나간다. 아침 안개와 같고, 화살 같이 빨리 날아가는 인생이다. 거기에 비하면 내세 천국이나 지옥은 영원한 삶이다. 천년도 만년도 아니고 영원한 삶이다. 내세에 어디로 가느냐 는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는가, 믿지 않는가로 달라지게 된다.
나사로가 죽어서 간 곳을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했는데, 아브라함의 품은 아브라함이 죽어서 간 천국을 가리킨다. 천국이 아닌 다른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내세에 대해서 천국과 지옥 외에 다른 것을 말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롬 4:16)
부자가 간 곳은 음부라고 했다. 음부는 "스올"인데, 무덤, 사후 형벌의 장소, 지옥 등의 의미를 갖는데 본문에서는 지옥을 말하는 것이다. 24절 끝에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지옥을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갔다.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이 꺼지지 않고, 물 한방울도 얻지 못해 목이 타는 곳, 심한 고통과 형벌을 받는 장소이다.
부자가 고통 가운데 눈을 들어 보니 멀리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것을 보았다.
24절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눅 16:24)
천국에 간 거지 나사로는 아무런 요청도 부탁도 할 필요가 없다. 지옥에 간 부자만 아브라함에게 두가지 요청을 하는데 모두 거절을 당한다.
첫번째 요청은 나사로 손가락에 물 한방울을 찍어서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했다. 불꽃 가운데서 얼마나 무서운 고통을 당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알게 해준다. 지옥 고통이라는 것은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다. 직접 가서 체험하기 전에는 무엇으로 설명하겠나? 세상에서 경험할 수 없는 가장 아프고 힘들고 괴롭고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서 영원히 형벌당하는 고통일텐데 참으로 끔찍하다. 우리는 지옥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믿는다. 가끔 지옥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교인이 있는데, 지옥이 없다면 복음이 복음이 되지 않는다. 지옥이 없다면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 죄값으로 지옥 형벌 받을 지옥이 없는데 두려울 것이 없다. 그러나 성경은 지옥이 있음을 명확하게 말씀한다.
지옥을 믿지 않으면 성경을 믿지 않는 것이고, 지옥을 믿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지옥을 믿지 않으면 믿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어떻게 지옥을 만들수 있느냐 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자신을 하나님보다 더 선하고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사람이다.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마 25:41)
영원한 불은 지옥을 말하는데, 지옥은 마귀를 위해서 만든 것이다. 마귀를 지옥에 보내려고 만들었는데, 마귀에게 미혹당해서 죄를 짓다가 마귀를 따라서 지옥에 가게 되는 것이다.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들어가서 무시무시한 고통을 당함으로 나사로의 손가락에 물을 찍어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했는데 거절을 당했다.
25절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눅 16:25)
부자는 살았을 때 세상에서 사치하고 연락하고 방탕생활하면서 믿음생활을 하지 않았다. 내세에 대해서 아무 준비를 하지 않았다. 자기 욕심만 채우고 이기주의로 사는 죄를 지었다.
부자가 지옥에 가서 고통을 당하는 근본 원인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부자로 살았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불택자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이 받을 분깃을 미리 다 주신다.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자니이다” (시 17:14)
안믿는 사람, 불택자들에 대한 말씀이다. 그들은 살아있는 동안 분깃을 다 받아서 누리도록 하신다. 주님이 주신 재물로 배를 채운다. 이렇게 살다가 죽은 다음에는 지옥에 가서 저주와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부자의 모습과 똑같다. 하나님이 주신 것을 하나님이 주신 것인줄 모르고 마음껏 즐기고 죄짓다가 죽어서 지옥에 가서 벌받는 것이다.
26절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눅 16:26)
천국과 지옥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엄청나게 큰 공간이 있어서 오갈 수 없는것 같다. 천국에 간 사람은 거기서 다시 나와서 지옥에 갈 수 없고, 지옥에 간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다.
볼 수는 있었던 것 같다. 지옥간 부자가 아브라함 품에 안겨있는 거지를 보면서 부러워했다. 보면서도 왔다 갔다는 하지 못하고 고통당하는 부자의 심정이 얼마나 비통했을지 상상해볼 수 있다.
27절
부자가 두번째 요청을 한다. 지옥에 와서 체험해보니 너무 고통스럽고 죽을 수도 없는 곳이고, 피할 수도 없고, 영원히 불구덩이에서 괴로워해야하니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부탁하기를 나사로를 아버지 집에 보내 형제들에게 증언하여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그런데 이 요청도 거절당한다. 지옥간 부자는 죽은 나사로가 살아서 자기 형제들에게 가서 말하면 효과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29절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눅 16:29)
모세와 선지자들은 오래 전에 다 죽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들으라는 것은 성경말씀을 가리킨다. 성경말씀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이 있으니까 그들에게 들으라는 말씀이다.
30절
부자가 다시 간청한다. 자기 형제들이 강퍅하고 믿음생활에 대해서 전혀 관심 조차 없는 것을 부자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전도자가 전하는 것을 믿지 않을 것이 분명하고 죽은 자가 살아나서 전하면 혹시 믿을지 모르니까 사정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마저도 거부를 당한다.
31절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눅 16:31)
전도자들이 말씀 가지고 전도할 때 그 말씀을 믿어야 하는데, 그때 믿지 않으면 죽은 자가 살아나서 전도할지라도, 이적을 경험하고 신비한 체험을 할지라도 그것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이다. 믿음은 복음을 듣고 믿는 것이다. 복음을 듣고 믿어야 구원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지, 그 방법이 아니고서는 구원받을 방법이 없다.
다시 말해서 전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전도로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 지옥 갔다 왔다고 간증하면 믿을줄 알고 이상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을 가지고는 권함을 받지 못한다.
전도자를 통해서 복음을 듣는 것, 다시 말해 먼저 믿은 성도들이 복음 전해주는 일이 아주 중요하다. 복음 전하는 일을 해야 믿지 않은 사람이 듣게 되고 들어야 믿게 되고 믿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
지옥간 부자가 요청하는 것이 복음 전해주는 것이었다. 지옥간 부자가 믿지 않는 형제들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도록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 간절한 외침을 기억하고 복음 전하는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하겠다.
부자의 요청은 모두 거절 당했다. 손가락 끝에 물 한방울 묻혀서 혀를 적셔달라는 것, 나사로를 보내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해달라고 하는 요청을 거절당했다.
살아있는 때 보다 죽어서 천국에 가는가, 지옥에 가는가 가 더 중요하다. 죽어서 천국과 지옥 사이를 왔다 갔다 할 수 없다. 다른 방법으로는 죄인들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오직 전도로, 복음 전하는 것으로만 구원할 수 있다. 이 사명을 우리에게 맡기셨다. 모세와 선지자는 복음을 맡아 가지고 있는 성도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믿게 하셨는데, 복음전도의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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