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06 주일오전예배 설교(빌립보서 3장 17-21절/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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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2-03-06 14:25
조회91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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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권면한 말씀입니다. 로마 옥중에서 쓴 편지라서 옥중서신이라고 부릅니다. 노 사도가 옥중에서 눈물을 흘리며 권면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나를 본받으라 권면하고,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본받고 있습니까?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이 말씀을 통해서 은혜받기 원합니다.
1.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17절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해야지 어떻게 자기를 본받으라 하느냐’ 이렇게 비판하면 바울의 의도를 오해한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인품을 본받고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 본받는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합니다. 막연하고 힘들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본받는 일을 잘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이 앞장서서 예수님을 본받았으니 우리는 바울을 본받고 따라가면 됩니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본받기는 어렵지만 바울을 보면서 따라가면 좀 더 쉬울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 한 것입니다.
또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 한 말의 의미는 사실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말입니다.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는 그 모습을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1:1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린도전서 4:16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빌립보서 3:8절에 보면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큰 결심을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신앙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로 여겼습니다. 바울은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본받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 할 만큼 자신 있게 살았습니다. 누군가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복입니다. 이것은 교만함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것에 대한 자부심입니다. 가르치는 자가 배우는 자들에게 당당하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하는 것이 진정한 교육입니다. 나를 본받고 따라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산다면 그보다 더 좋은 가르침은 없을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나처럼 되라고 말할 수 있고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나처럼 살라고 권할 수 있다면 성공한 인생입니다. 신앙생활 처음 하는 사람들이 나처럼 믿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든다면 다행입니다. 나는 누구를 본받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또 나를 본받고 배우려는 사람이 있는지 점검합시다. 나의 삶을 누군가가 뒤따라와도 좋을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
그런데 예수님을 본받고 바울을 본받기는커녕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8절에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빌립보 교회 안에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이 있었고, 오늘날 기독교 안에도 십자가의 원수들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원수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타락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는 자들입니다. 고린도후서 5:15에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다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말고 예수님을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십자가는 예수님이 죽으신 곳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죄 사함이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소망도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삶은 무의미합니다. 십자가 없이는 예수님도 없고, 예수님 없이는 천국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을 따라가며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십자가 없이 신앙생활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준 자유를 오해하여 방종하고 타락된 생활을 하며 십자가의 은혜를 헛되게 만드는 자들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의를 위한 고난입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의를 쫓는 삶이 십자가입니다.
19절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의 특징을 4가지로 설명합니다.
1)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면 그 결과는 멸망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는 인생은 반드시 멸망입니다.
2) “그들의 신은 배요” 신이 배라는 말은 배로 하나님을 삼고 산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16:18에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자기들의 배만 섬기는 사람들, 즉 자기 유익만 구하고 자기 욕심만 채우는 자들이 있습니다.
3)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이들은 부끄러운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죄를 지으면서 영광으로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남의 돈을 갈취하고 자랑으로 여기고, 죄짓고 걸리지 않은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동성연애자들이 모여서 ‘퀴어 문화축제’를 벌이고 퍼레이드를 하는 것을 봅니다. 그게 그렇게 자랑하고 선전할 일입니까? 부끄러워할 일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죄와 허물을 자랑한다면 얼마나 이상한 일입니까?
4)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하나님의 일이나 하늘에 속한 신령한 일에는 관심이 없고 땅의 일만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항상 땅의 일에 기울어 있고, 생각이 항상 세상 것에 치우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골로새서 3:1-2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바울 사도를 본받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은 그의 가치관을 본받는 것입니다. 20절에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하늘의 시민권을 가졌다는 말은 하늘나라 소속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하늘나라에 당당히 들어갈 수 있고,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를 받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늘나라 시민답게 살아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에 속한 자인지 분명히 알고 살아야 합니다. 지금은 땅에 발을 붙이고 살지만 영원한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살아도 소속은 하늘나라임을 분명하게 느끼고 살아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주님 만날 준비를 해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거듭난 참 성도라면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내세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늘나라 시민이라면 분명히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기독교는 세상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천국 운동을 하며, 육신의 운동이 아니고 영적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요즘 기독교 안에 현실주의와 육체적 방종주의와 세속주의가 많이 나왔으나 그것은 참 기독교가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살던 시대는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렇기에 로마 시민권을 가지면 누구보다 당당했고 자부심이 컸습니다. 그 시민권을 바울 사도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알고 나니 이 세상의 시민권은 보잘것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 가진 것을 자랑하지 않고 하늘의 시민처럼 살아갑니다. 바울의 이런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땅의 시민권보다 하늘의 시민권을 더 가치 있게 여기며 그 시민권을 가진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따라간 바울을 우리가 본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21절에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또 만물을 복종케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만물을 점점 복종시켜 나가고 계십니다. 맨 나중에는 만물이 완전히 복종하게 됩니다. “우리의 낮은 몸”이란 우리의 몸은 흙으로 지음받은 몸이고 죄악으로 인하여 저주받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썩어질 몸이요, 욕된 몸이요, 육의 몸입니다. 그런 우리 몸을 영광의 몸으로 변하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영광의 몸을 입으신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부활할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눈물의 권고를 기억합시다. 우리를 위해 지금도 기도하실 예수님을 생각하며 거룩한 천국 시민의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권면한 말씀입니다. 로마 옥중에서 쓴 편지라서 옥중서신이라고 부릅니다. 노 사도가 옥중에서 눈물을 흘리며 권면한 내용이 무엇입니까? 나를 본받으라 권면하고,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본받고 있습니까?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이 말씀을 통해서 은혜받기 원합니다.
1. 너희는 나를 본받으라
17절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해야지 어떻게 자기를 본받으라 하느냐’ 이렇게 비판하면 바울의 의도를 오해한 것입니다. 모든 성도는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인품을 본받고 예수님의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 본받는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합니다. 막연하고 힘들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본받는 일을 잘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이 앞장서서 예수님을 본받았으니 우리는 바울을 본받고 따라가면 됩니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본받기는 어렵지만 바울을 보면서 따라가면 좀 더 쉬울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 한 것입니다.
또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 한 말의 의미는 사실 그리스도를 본받으라는 말입니다.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아가는 그 모습을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1:1에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고린도전서 4:16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빌립보서 3:8절에 보면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큰 결심을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신앙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데 방해가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로 여겼습니다. 바울은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본받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바울은 ‘나를 본받으라’ 할 만큼 자신 있게 살았습니다. 누군가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큰 복입니다. 이것은 교만함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것에 대한 자부심입니다. 가르치는 자가 배우는 자들에게 당당하게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하는 것이 진정한 교육입니다. 나를 본받고 따라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을 산다면 그보다 더 좋은 가르침은 없을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나처럼 되라고 말할 수 있고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나처럼 살라고 권할 수 있다면 성공한 인생입니다. 신앙생활 처음 하는 사람들이 나처럼 믿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든다면 다행입니다. 나는 누구를 본받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또 나를 본받고 배우려는 사람이 있는지 점검합시다. 나의 삶을 누군가가 뒤따라와도 좋을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2.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
그런데 예수님을 본받고 바울을 본받기는커녕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8절에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빌립보 교회 안에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이 있었고, 오늘날 기독교 안에도 십자가의 원수들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원수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타락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는 자들입니다. 고린도후서 5:15에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신 것은 다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말고 예수님을 위하여 살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십자가는 예수님이 죽으신 곳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죄 사함이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구원도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십자가 없이는 소망도 없습니다. 십자가 없는 삶은 무의미합니다. 십자가 없이는 예수님도 없고, 예수님 없이는 천국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을 따라가며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십자가 없이 신앙생활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준 자유를 오해하여 방종하고 타락된 생활을 하며 십자가의 은혜를 헛되게 만드는 자들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는 의를 위한 고난입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의를 쫓는 삶이 십자가입니다.
19절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의 특징을 4가지로 설명합니다.
1)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면 그 결과는 멸망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없는 인생은 반드시 멸망입니다.
2) “그들의 신은 배요” 신이 배라는 말은 배로 하나님을 삼고 산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16:18에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자기들의 배만 섬기는 사람들, 즉 자기 유익만 구하고 자기 욕심만 채우는 자들이 있습니다.
3)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이들은 부끄러운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죄를 지으면서 영광으로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남의 돈을 갈취하고 자랑으로 여기고, 죄짓고 걸리지 않은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오늘날 동성연애자들이 모여서 ‘퀴어 문화축제’를 벌이고 퍼레이드를 하는 것을 봅니다. 그게 그렇게 자랑하고 선전할 일입니까? 부끄러워할 일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죄와 허물을 자랑한다면 얼마나 이상한 일입니까?
4)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하나님의 일이나 하늘에 속한 신령한 일에는 관심이 없고 땅의 일만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항상 땅의 일에 기울어 있고, 생각이 항상 세상 것에 치우쳐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골로새서 3:1-2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3.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바울 사도를 본받음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은 그의 가치관을 본받는 것입니다. 20절에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하늘의 시민권을 가졌다는 말은 하늘나라 소속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하늘나라에 당당히 들어갈 수 있고,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를 받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늘나라 시민답게 살아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에 속한 자인지 분명히 알고 살아야 합니다. 지금은 땅에 발을 붙이고 살지만 영원한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살아도 소속은 하늘나라임을 분명하게 느끼고 살아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주님 만날 준비를 해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다르게 살아야 합니다. 거듭난 참 성도라면 하늘나라를 소망하며 내세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늘나라 시민이라면 분명히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이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기독교는 세상 운동을 하는 것이 아니고 천국 운동을 하며, 육신의 운동이 아니고 영적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요즘 기독교 안에 현실주의와 육체적 방종주의와 세속주의가 많이 나왔으나 그것은 참 기독교가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살던 시대는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렇기에 로마 시민권을 가지면 누구보다 당당했고 자부심이 컸습니다. 그 시민권을 바울 사도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알고 나니 이 세상의 시민권은 보잘것없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로마의 시민권 가진 것을 자랑하지 않고 하늘의 시민처럼 살아갑니다. 바울의 이런 삶을 본받아야 합니다. 땅의 시민권보다 하늘의 시민권을 더 가치 있게 여기며 그 시민권을 가진 자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을 따라간 바울을 우리가 본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됩니다.
21절에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또 만물을 복종케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만물을 점점 복종시켜 나가고 계십니다. 맨 나중에는 만물이 완전히 복종하게 됩니다. “우리의 낮은 몸”이란 우리의 몸은 흙으로 지음받은 몸이고 죄악으로 인하여 저주받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은 썩어질 몸이요, 욕된 몸이요, 육의 몸입니다. 그런 우리 몸을 영광의 몸으로 변하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영광의 몸을 입으신 것처럼 우리가 그렇게 부활할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눈물의 권고를 기억합시다. 우리를 위해 지금도 기도하실 예수님을 생각하며 거룩한 천국 시민의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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