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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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03 주일오전예배 설교(열왕기하 1장 1-8절/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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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2-04-03 15:12 조회67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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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https://youtu.be/MynpjuH-wto


열왕기상, 하는 이스라엘 왕들의 신앙과 삶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흥망성쇠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1. 우상에게 물은 아하시야

아하시야가 이스라엘 왕이 되어 이 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아하시야의 아버지는 이스라엘 왕 중에서 가장 악한 아합왕이고, 그의 어머니는 우상을 끌어들인 악한 여자 이세벨입니다. 아하시야는 아합과 이세벨의 악한 행동을 본받아 악을 행했습니다. 아하시야가 왕이 되고 두 가지 어려운 일을 당합니다. 하나는 모압이라는 나라가 속국이었는데 배반합니다(1절). 이스라엘 나라에 큰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또 하나는 아하시야 왕이 다락 난간에 올라갔다가 떨어져 병이 들었습니다(2절). 아하시야 왕은 안팎으로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어려움을 당했다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어려움을 당합니다. 믿는 사람에게도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이런 어려움을 당했을 때 대처 방법입니다. 당연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하시야는 블레셋 나라에 사자를 보냅니다. 

2절 끝에 "가서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나 물어보라” 바알세붑은 블레셋 나라 에그론 지방에서 섬기는 우상입니다. 그 바알세붑 우상에게 물어보라고 사자를 보냅니다.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크게 욕보이는 일입니다. 아하시야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의 부모 아합과 이세벨에게 신앙을 물려받지 못했습니다. 열왕기상 22:52에 보면 아하시야가 왕이 되어 그 아버지 길과 어머니 길로 행하여 죄를 지었다고 했습니다. 또 블레셋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는 하나님은 무능한가 보다. 우리가 섬기는 바알세붑보다 못한가 보다”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크게 분노하셨습니다. 일반 백성도 아니고 이스라엘의 왕이 블레셋 우상 바알세붑에게 병이 낫겠는지 물으려고 사람을 보낸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고, 하나님을 욕먹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병이 나거나 어려운 일을 당하게 되면 온갖 우상들을 찾아다닙니다. 용하다는 점쟁이도 찾아가도 굿을 하기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믿음이 없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우상을 찾아가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너무나 잘못된 불신앙적인 행위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누구나 어려운 일이 생기거나 몸이 아프면 기도부터 합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아하시야 왕의 마음에는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그는 병이 났을 때 에그론의 신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우상에게 묻으려고 했습니다. 


2. 엘리야 선지자의 책망

3-4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엘리야에게 명을 내려 아하시야 왕을 책망하라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여기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란 말씀은 아하시야가 하나님을 멸시하되 아예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이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아하시야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라고 한 것은 하나님을 안중에 두지도 않는 악한 행동입니다. 아하시야는 결국 죽을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 믿는 성도가 세상에 도움을 청하고, 세상에 묻고, 세상으로 힘을 얻으려고 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잘 대접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문제가 생길 때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어떤 아들이 어려움을 당하면서 아버지에게는 아무 말 안 하고 옆집 아저씨에게 찾아가서 도움을 청한다면 아버지의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속상할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왜 사랑하셨는지 아십니까? 하나님께 묻는 것입니다. 다윗은 항상 하나님께 물었습니다. 사무엘하 2:1-2에 보면 다윗은 크고 작은 모든 일을 하나님께 묻고 기도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대접입니다. 평소에 기도하지 못했더라도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평소에 기도하지 않다가 무슨 염치로 어려울 때 기도하느냐고 말합니다. 이것은 옳은 생각이 아닙니다. 평소에도 기도하지 않고 어려울 때도 기도하지 않으면 그러면 언제 기도합니까? 야고보서 5:13에는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했고, 시편 50:15에는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라고 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들기 위해 주시는 고난이 있습니다. 기도하라고 주시는 고난도 있습니다. 회개 시키려고 주시는 고난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라도 우리가 손들고 오는 것은 반기십니다. ‘염치없다 민망하다’ 핑계하지 말고 기도합시다. 문제가 생길 때 하나님을 찾아가고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을 최고로 대접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하나님께 대한 최고의 대접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문제의 해답이 있습니다. 어려울 때 하나님을 참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5-6절에 왕의 사자들이 중간에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왕이 묻습니다. “어찌하여 돌아왔느냐” 그러자 그들이 대답합니다. “한 사람이 올라와서 우리를 만나 이르되 너희는 너희를 보낸 왕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고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네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고 보내느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라 하더이다” 왕은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물었습니다. 사자들은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고 말했습니다. 아하시야는 그가 엘리야 선지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엘리야 선지자의 생김새만 듣고도 그를 알만큼 왕은 엘리야 선지자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하시야 왕 가까이에 하나님이 귀히 쓰는 종 엘리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하시야는 엘리야 선지자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도움을 청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지도 않습니다. 먼 나라에 있는 우상에게 물으라고 신하들을 보냈습니다. 우리 곁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우리에게 교회도 있고, 목사님도 있고 성도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병도 고치고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다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의지하고 있습니까? 어려울 때 누구를 찾아갑니까? 기도하지 않는 것은 무신론적인 자세입니다. 

이사야 36:4 끝에 “네가 믿는바 그 믿는 것이 무엇이냐” 이는 앗수르 왕이 이스라엘을 침략하고 항복하라고 하면서 한 말입니다. 네가 뭘 믿고 우리 앗수르를 대적하느냐는 뜻입니다. 원수들이 한 말이지만 우리를 깨우치는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믿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어려울 때 우리가 실제로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보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아하시야를 그냥 죽여도 되는데 왜 책망하셨습니까? 회개할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돌아올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책망을 듣고 돌이키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입니다. 이때 회개했으면 고침 받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하시야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기는커녕 더 크게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죽이려고 합니다. 그는 군사들을 보내 엘리야 선지자를 잡아오라고 합니다. 


3. 죽는 자와 사는 자

9절에 보면 아하시야가 엘리야 선지자 한 사람을 잡아오라고 하면서 50명의 군사를 보냈습니다. 이것은 엘리야 한 사람만 잡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엘리야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우기 위한 것입니다. 아하시야의 마음이 완악하고 교만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자기 생각과 다르니 화를 냅니다. 자기 비위에 맞지 않으니 선지자의 입을 막으려고 하고 죽이려고 합니다. 교만함의 극치입니다. 아하시야 왕이 정말 살기를 바란다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하시야 왕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없는 왕은 회개할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결국 아하시야 왕은 많은 부하들을 잃고 맙니다. 

왕의 명령을 받은 군인들을 보십시오. 9절 끝에 “하나님의 사람이여 왕의 말씀이 내려오라 하셨나이다.” 오십부장이 엘리야를 가리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선지자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이렇게 부른 것은 아닙니다. 조롱하며 비난하는 표현입니다. “네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며?” 그런 의미입니다. 예수님을 희롱할 때 “유대인의 왕이여” 하면서 놀린 것과 같습니다. 이들은 왕의 명령이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왕의 명령을 집행하는 오십부장은 왕의 힘을 등에 업고 큰소리 칩니다. 그러다가 불 심판을 받습니다. 10절에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 50명을 살랐습니다. 이것은 엘리야가 자기 신변 보호를 위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힘을 과시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서 이들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이 불 심판은 악한 아하시야 왕에게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며, 교만한 오십부장과 군사들에게 벌을 내린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벌하실 때 그들의 강퍅한 정도에 따라서 벌하십니다. 이런 악한 시대, 악한 사람들에게 기적적인 방법으로 벌하시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십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모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하늘의 신비한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 믿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교회를 박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에는 까닭없이 교회를 비난하고, 이유 없이 예수님 믿는 성도들을 욕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오십부장처럼 교만한 자들이 많습니다. 돈, 지식, 권력을 가졌다고 큰소리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심판하시면 하루아침에 불타버릴 수 있습니다. 

아하시야 왕은 하나님의 불 심판을 보고도 또 군사들을 보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이고 하나님께 대항하는 태도입니다. 11-12절에 보면 첫 번째 갔던 오십부장과 군사들이 그렇게 큰소리치고 교만을 떨다가 죽었는데 두 번째 간 오십부장과 군사들이 똑같은 일을 합니다. 그리고 그들도 불타 죽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다른 사람이 악한 일을 하다가 망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대로 따라 합니다. 앞에서 죽는데 또 그 길을 갑니다. 다른 사람이 망하는 것 보면서도 자신은 망하지 않을 줄로 생각합니다. 두 번째 불 심판을 당하고서도 아하시야 왕은 군사들을 또 보냅니다. 하나님과 끝까지 싸우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찾아간 오십부장은 달랐습니다. 그는 자기 목숨도 잃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도 얻었습니다. 13-14절에 보면 세 번째 오십부장은 거만하지 않습니다. 선지자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엎드려 간구합니다. 자신을 종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기 생명도 보존하고, 오십 명의 군사들도 보호합니다. 그리고 왕의 명령대로 엘리야 선지자를 내려오게 하여 왕 앞에 서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방법은 겸손하게 엎드리는 것입니다. 거만한 자들에게 가혹했던 엘리야 선지자는 겸손한 자 앞에는 자비를 베풉니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자가 누구이며 하나님이 좋아하는 자가 누구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15절에 보면 하나님의 사자가 엘리야 선지자에게 지시하십니다. 두려워 말고 저들을 따라 함께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움직입니다. 엘리야는 곧 일어나 아하시야 왕에게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16절에 “말하되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사자를 보내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려 하니 이스라엘에 그의 말을 물을 만한 하나님이 안 계심이냐 그러므로 네가 그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할지라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하시야 왕은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 아하시야 왕과 비슷한 어려움을 당한 왕이 있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입니다. 히스기야는 속국이 배반한 정도가 아니라 앗수르 군대 18만 5천 명이 침략해왔습니다. 그때 히스기야는 어떻게 했습니까?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했습니다. 또 병이 난 정도가 아니라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죽을 것이라고 선고하셨습니다. 그때도 히스기야는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기도했습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은혜로 전쟁도 승리하고 병도 고쳤습니다. 

어려운 일은 누구나 당합니다. 문제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것입니다. 아하시야 왕은 어려움을 당할 때 우상에게 묻다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었습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부르짖다가 은혜받고 승리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을 대접하고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방법은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나타내 보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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