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10 주일오전예배 설교(마태복음 27장 11-26절/재판을 받으시는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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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https://youtu.be/M2Z_XCXAJwY
오늘은 종려 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만왕의 왕이심을 선포하십니다. 그 후 붙들려서 고난을 받다가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십니다. 오늘은 빌라도에게 재판받는 예수님을 살피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며 죄 없는 예수님이 죄인처럼 심문을 받고 재판을 받습니다. 온 세상을 심판하실 재판장이신 예수님이 죄인에게 재판을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끌려가서 6번이나 심문을 받았습니다. 첫째 요한복음 18:13에 안나스에게, 둘째 마태복음 26:57에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셋째 누가복음 22:66에 공회로 끌려가셨고, 넷째 마가복음 15:1에 새벽에 빌라도에게 넘겨지셨고, 다섯째 누가복음 23:7에 헤롯에게로 보냈고, 여섯째 누가복음 23:11에 헤롯이 예수님을 다시 빌라도에게 보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밤새도록 끌려다니며 심문을 당하다가 결국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았습니다.
1. 침묵하시는 예수님
11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총독 빌라도 앞에 섭니다. 역사적인 만남입니다. 장차 온 세상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아들이 빌라도 앞에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참 모순적이고 아이러니컬한 일입니다. 빌라도가 첫 번째로 던진 질문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당당하게 말씀하십니다. “네 말이 옳도다.” 주님은 자신이 유대인의 왕인 것을 당당히 밝히셨습니다. 여기서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 것은 영적인 왕, 곧 메시야라는 의미입니다. 12절에 보면 예수님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했습니다.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제시하는 증거들은 다 살폈으나 하나도 사실을 증명할 수 없는 거짓 증거들이었습니다. 주님이 받은 재판은 불의한 재판이었습니다. 모든 증거는 거짓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런 불의한 재판에 순응하셨을까요? 잘못된 제도에 대해서 항거하지 않고 왜 그냥 받아들였을까요? 간단합니다.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불의한 재판을 바로잡는 것이나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면 생명을 걸고 싸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택한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것은 대제사장들이나 장로들이나 가룟 유다나 총독 빌라도나 군중 때문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계획이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한마디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힘이 없어서 가만히 있은 것이 아닙니다. 방법을 몰라서 당하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참고 받아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사회개혁이 아닙니다. 나라를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독립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억울하고 불편하고 고통스럽지만 원망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거짓 증거를 대도 아무 반박도 하지 않았습니다. 억울하게 심문을 받으면서도 어떤 말씀도 하지 않습니다. 심문하는 사람들이 기이히 여겼습니다. 상상할 수 없는 큰 고통을 당하면서도 참고 견디셨습니다. 12절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4절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예수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침묵하셨습니다.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하고, 죄 없음을 밝혀야 하는 순간에 침묵하셨습니다. 입술로 범죄하지 않고 덕스럽지 못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모든 재판과 심문 과정에서 침묵하셨습니다. 말하지 않으면 불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침묵하셨습니다. 자기를 변호하고 변명해야 할 때 침묵하셨습니다. 주님은 구차한 변명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있는 동안에도 조롱하는 자들이 많은 말로 모욕했지만 주님은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입을 열지 아니했습니다. 주님은 말이 아닌 삶으로 보여주시고 십자가에서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이 참 메시야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태도에 총독 빌라도가 크게 놀라워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조사하고 심문했으나 아무 혐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어떤 변명도 하지 않는 않고 침묵하는 예수님을 보면서 빌라도는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불의한 재판을 받으면서도 초연하게 서 있는 예수님, 억울한 죽음을 당하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빌라도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무죄를 선고하지 않고 한가지 꾀를 냅니다.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으면 풀어주면 되는데 이상한 꼼수를 씁니다. 전통적으로 유월절이 되면 죄수 한 사람을 석방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흉악범 바라바와 예수님 중에 한 사람을 선택하여 석방하겠다고 합니다.
빌라도가 재판정에 앉아서 그런 일을 하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 꿈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19절에 빌라도의 부인이 꿈을 꾸었는데 꿈에 예수님으로 인하여 아주 힘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판하는 중에 사람을 보내서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고 전했습니다. 얼마나 무섭고 생생한 꿈을 꾸었으면 재판하는 자리에 사람을 보내 이런 소식을 전했겠습니까? 빌라도는 아내의 꿈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무죄를 다시 한번 확인이 된 셈입니다. 빌라도가 이때라도 예수님이 죄 없다고 판결했으면 좋았을 뻔했는데 빌라도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2. 소리 지르는 군중들
20-21에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뒤에서 무리들을 선동합니다. 바라바를 풀어주고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치게 만듭니다. 무리들은 앞장서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 무리들이 누구입니까? 예수님 말씀을 듣고, 오병이어 기적을 경험하고, 병 고침을 받고, 많은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 백성들이 변해서 예수님을 죽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군중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흉악한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음에도 무조건 죽이라고 소리칩니다. 이것이 군중들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죽인 그 피 값을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고 말합니다(25절).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죄값으로 이스라엘은 AD 70년에 로마의 타이투스 장군에 의해 멸망하고 약 1900년 동안 나라 없이 전 세계에 흩어져 방황합니다. 성도들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살펴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조용한 시간에 묵상이 필요합니다.
3. 십자가 형을 판결한 빌라도
22절에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빌라도는 사람들의 눈치를 살폈습니다. 예수님이 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빌라도는 군중들의 아우성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본 빌라도는 군중들과 야합합니다. 빌라도는 양심의 소리도, 진리의 음성도, 외면하고 맙니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합니다. 인기에 영합하려고 합니다. 분위기 때문에 군중들과 동조하고, 죄 없는 예수님을 죽이라고 합니다. 24절에 빌라도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손을 씻었습니다. 책임을 회피하고 군중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긴 채 자신은 죄 없다고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는 책임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빌라도는 재판의 최고 결정권자 임에도 불구하고 무죄한 예수님을 악한 자들에게 내준 것은 결코 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빌라도는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을 가진 총독입니다. 죽일 권세도 있고, 살릴 권세도 있는 사람입니다. 백성들이 이성 없이 떠들어대고 민란이 일어날 듯 하더라도 총독의 명으로 군대를 풀어서 다 진압시킬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준 권력을 바르게 사용하여 법대로 바르게 심판할 수 있는데도 백성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불법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고 자기는 그 죄에 상관이 없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26절에 마침내 빌라도는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마가복음 15:15에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 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 주니라." 이 빌라도가 이런 불의한 재판으로 인하여 사도신경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라는 말이 몇 천년동안 내려오고 있습니다.
4. 희롱을 당하신 예수님
26절을 보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기 전에 채찍질하였습니다. 로마의 채찍질은 아주 무서운 형벌입니다. 가죽 채찍으로 때리는데, 그 가죽 채찍 중간중간에 날카로운 뼈나 쇠붙이가 붙어 있어서 이 채찍에 맞은 사람은 바둑판처럼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흐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채찍을 맞았습니다. 27-28절에 보면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예수님을 이제 그 총독 관정 안으로 데려갑니다. 그러자 군인들이 예수님 주위에 모였습니다. 그 군인들은 예수님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혔습니다. 이 홍포는 자색 옷으로 임금이 권위의 상징으로 입는 옷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조롱하면서 통으로 짠 자색 옷을 입힌 것입니다. ‘네가 왕은 무슨 왕이냐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의 신분이다.’라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29절에는 왕의 머리에는 가시관을 씌웠습니다. 가시면류관은 왕관을 대신한 것으로 이것 역시 예수님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손에 갈대를 들려주었습니다. 왕은 손에 홀을 들고 그것으로 지시하고 명령합니다. 그것을 빗대고 조롱하느라고 손에 갈대를 쥐어준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면서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30-31절에 보면 예수님께 침을 뱉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갈대를 빼앗아 주님의 머리를 때렸습니다. 이렇게 희롱을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는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욕을 받으시되 같이 욕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에게 다 맡겼습니다. 주님의 이런 고난은 우리를 위한 것입니다. 이사야 53:5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결론. 주님은 침묵하셨지만 결국 진실은 드러났습니다. 4절에 보면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무죄를 인정하고 죽었습니다. 빌라도도 예수님의 죄를 찾지 못했다고 3번이나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죄 없다는 것이 다 밝혀졌습니다. 54절에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주님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은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고 외쳤습니다. 변명이나 설득으로 된 것 아닙니다. 침묵으로 진실을 드러내고 죽음으로 승리했습니다. 이렇게 죽으신 예수님 많은 사람을 살리고 자신도 부활하여 영원히 사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죽음이 아름답고, 주님의 죽음은 위대하고, 주님의 죽음은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고 소망입니다. 이렇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주님,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의 고난과 죽음을 지켜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님은 삶을 통해서도 감동을 주셨고 죽음을 통해서도 감동을 주었습니다. 주님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점검합시다. 우리도 내가 입을 다물므로 좀 은혜로울 수 있다면, 내가 입을 다물므로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면, 내가 입을 다물므로 누군가가 편안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보시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더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말보다 침묵을 통해 진실을 드러내고, 침묵을 통해 믿음을 드러내는 참된 승리하는 삶을 삽시다. 로마서 14:8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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