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27 수요예배 설교(누가복음 19장 28-44절/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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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9장 28-44절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강우용 목사님)
누가복음의 주제는 "구원"이다. 복음서의 주제도 "구원"이다. 성경의 주제도 "구원"이다. 4복음서가 있다.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공관복음이라고 부르고 요한복음까지 4복음서이다. 저자가 다르듯이 관점이 약간씩 다르다. 누가는 의사이고 역사가이며 이방인이다. 데오빌로 각하라는 사람에게 이루어진 사실을 그대로 전하기 위해서 기록했다.
어떤 학자는 누가복음을 둘로 구분하는데, 본문 이전을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한 정체성이라고 말하고, 이후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한 사명이라고 나누었다. 예루살렘이라는 단어가 마태, 마가복음에는 10회 정도 밖에 기록되지 않았는데 누가복음에서는 30회 이상 쓰였다. 누가는 구원을 다루면서 예루살렘을 중요하게 다룬다. 누가복음은 성전에서 찬양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성전에서 송축하는 것으로 끝낸다. 이 예루살렘에 예수님께서 평화의 왕으로 입성하신다.
1. 나귀를 예수님께 바침
2.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심
3. 예루살렘을 보고 우심
4. 성전을 정결케 하심
28절
예수님은 지금 출발하신 것이 아니다. 이미 9장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하셨다고 말씀한다.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눅 9:51)
이미 에루살렘으로 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셨다. 그 동기가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이다. 예루살렘의 여정이 승천을 내다보고 가시는 길이다. 승천하기까지의 여정을 누가복음은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길"이라는 단어가 누가복음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사용된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그들과 대화하면서 예수님을 발견하게 하고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게 하셨다. 예수님을 알면 마음의 변화가 나타난다.
"이 말씀을 하시고" 열 므나 비유와 연결해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고 계신 것이다.
29-30절
제자 둘을 보내셨다. 누구를 보내셨는지는 모른다. 감람원이라 불리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들르셨다. 제자 둘에게 나귀 새끼 매여 있는 것을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셨다. 예루살렘 성까지 불과 3킬로미터 밖에 남지 않았다. 나귀를 탈 필요가 없는 거리이다. 그런데 굳이 이 제자 둘을 보내서 매어 있는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라고 명하셨을까?
“[9]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10]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 끝까지 이르리라” (슥 9:9~10)
나귀를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왕이심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어떤 왕이신가? 겸손의 왕, 평화의 왕이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왕은 온 우주의 왕이시다. 모든 창조세계를 다스리시는 만유의 주님이시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는 것은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이다.
31절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고 하신다.
주님께서 "가라"고 하셨는데, 제자들이 "갔고", 나귀를 "만났고", 나귀 임자가 "물었고", 제자들은 "대답"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대로 순종했고, 그 말씀 그대로 이루어졌다. "주가 쓰시겠다"라는 표현이 두번 나오는데, 원어로 보면 "주의 것을 쓰시겠다"라는 의미이다. 원래부터 나귀는 주님의 것이다. 만유의 주님이시다. 만왕의 왕이시다. 천지의 주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저자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단지 예루살렘의 입성의 의미가 이스라엘의 구원이 아니고 온 우주의 구원이고, 하나님 형상의 회복이다. 이 본질을 알아야 한다.
35절
주님의 명령을 그대로 순종해서 나귀를 끌고 왔다. 이후부터 보여지는 모습은 왕위 즉위식의 행동들이다.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헤 걸쳐 놓았다. 겉옷은 그 사람의 신분과 정체성을 상징한다. "나를 드립니다" 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그들이 겉옷을 길에 폈다.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분은 예수님이시다. 그런데 제자들이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했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오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왕위를 위임받아서, 하나님의 왕권을 대신 행하시는 분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열 므나 비유를 떠올려보면 귀인이 왕위를 받으러 갔다. 보통 왕위를 받으러 가는 사람은 왕의 아들이다.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왔다. 그리고 결산을 하셨다. 착한 종이라고 칭찬하시고, 악한 종을 책망하셨다. 그리고 왕됨을 원치않는 원수들을 잡아 죽이는 심판주로 오셨다.
이런 내용을 완전히 모를지라도 이스라엘이 예수님의 입성을 봤다면 기대와 흥분으로 격양되었을 것이다.
"스가랴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메시야가 오셨다! 우리는 해방이다!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유로워지겠구나!"
그러나 이 생각은 바른 생각이 아니었다. 물론 주님은 메시야이시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야는 아니셨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기에 이른다.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배반하고 비방하고 마침내 십자가에 못박는다. 그들은 예수님이 아닌 바라바를 택했다. 이들의 결정이 근거가 되어 빌라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는다. 이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나에게 있는 것이다. 피할 길이 없다. 우리가 생각을 잘못하면, 그분이 누구인지를 모르면, 그분이 누구인지 모른채 그들의 행동을 보면 우리는 내 생각, 내 주관대로 행한다. 결국 한 므나를 수건에 싸서 둔 사람과 같이 되는 것이다. 주인은 엄한 사람이다, 무서운 사람이다 라고 하면서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다. 주님이 왜 이 길을 가시는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분은 죄가 없으셨지만 고난을 몸소 당하셨다. 우리의 고난, 어려움, 고통, 슬픔을 체휼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 한다"고 하셨다.
39절
바리새인들은 탐탁치 않아서,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라고 했다.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의 반응이 싫었다. 저렇게 보잘것 없는 메시야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로마 군병들이 보면서 비웃고 손가락질 할 모습인데 저 자가 메시야라고? 인정할 수가 없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선생이여"라고 불렀다. 자기 발 밑으로 본 것이다.
40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하셨다. 찬송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돌들도 안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영적 소경인 것을 책망하시면서 반문하셨다.
41절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가까이 오신다는 말이 29절, 37절, 41절에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다. 예수님이 가까이 오고 계신다. 그리고 성을 보시고 우셨다.
"이르시되 너도" 예루살렘 성을 향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을 의인화 시켜서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자신을 등지고 배반하고 저주하고 떠난 제자들을 찾아 오셨다. 예수님을 버린 제자들을 예수님을 버리지 않으셨다. 그렇다면 지금, 오늘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시는가? 찾아오시지 않는가?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영광 올리는 교제의 장소이다.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이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 우리가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지만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 우리를 늘 가까이하시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이 나에게 가까이 오셔서 나를 보시고 웃으실까? 울으실까?
우리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우리가 베드로보다 나은가? 제자보다 나은 것이 있는가?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예수님이 찾아오시기 전에는 예수님을 믿지 못했으니까 그렇다고 치더라도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 자라났는가?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고 있는가? 왜 주님을 일을 한다고 하면서 갈등이 많고,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가? 나같은 죄인까지 살려주셨는데,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해주셨는데, 나를 위해서 죽어주셨는데 뭐가 그렇게 원망 불평할 것이 많은가?
그것을 보시고 우시지 않겠는가? 성경에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이 있는가? 없다. 우셨다는 기록은 세번 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리고 지금, 그리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때.. 통곡하셨다.
우리는 죄인이다. 죄 밖에 없다. 바라옵기는 이제부터라도 부디 주님께서 날 찾아오셔서 웃을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예수님의 기쁨이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우리의 찬송과 영광과 존귀와 예배를 주님께서 정말 기쁘게 받아주시면 참 좋겠다.
42절
우리는 주님께 은혜를 구해야 한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했을때 주님께서 "네가 참 복되다. 네가 고백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셨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반석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 우리는 예수님을 누구로 알고 있는가? 진정 제대로 바르게 안다면 주님을 합당하게 섬겨야 하지 않겠는가?
43-44절
이들의 결과는 어떤가?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예루살렘의 미래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다 무너지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만 무너지는가? "너희들, 너희 가족들 다 살육 당하게 될 것이다"
이 일이 실제로 이루어졌다. 어떤 역사가는 이 때 60만명이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걸어가다 치이는 것이 시체이다.
45-46절
그러자 마침내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신다.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신다.
“[45]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46] 그들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눅 19:45~46)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이 강도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평화의 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예루살렘에서 평화는 없어지고 강도가 가득하고 장사꾼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여기에 어떻게 평화가 있겠는가? 인두세, 성전세, 재물에 대한 폭리를 취하는 성전의 기생충들에 불과했다. 이들이 다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그렇게 율법을 중요시하고 다 지켰다고 했지만 그 속내는 악취가 났다. 양의 탈을 쓴 이리들이다. 형식과 외식과 거짓이 가득했다.
47-48절
열 므나를 남긴 착한 종이 한 므나를 가지고 열 므나를 남기고, 다섯 므나를 남기는 것이 쉬웠겠나? 그들은 종이었다. 누가 그들을 인정해주겠나? 세리장 삭개오가 세상에서 인정을 받을수 있었겠나? 그런데 귀인께서 한 므나를 주시면서 장사하라고 하시니 그 말씀을 붙들고 순종했다. 심지어 왕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고, 내 생각과 다르게 생각하는 종들이 많았다. 한 므나를 가지고 장사하는 일을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한 므나만 보관하고 있었던 악한 종의 한 므나까지 열 므나를 남긴 종에게 주었다. 모든 주권이 주님께 있다. 원수들을 다 심판하셨다.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고 의지해야 한다. 주님을 잘 알아야 한다. 성경 말씀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기 계시서이다. 성경을 통하지 않고서는 주님을 알 수 없다.
열심, 봉사, 헌신이 중요하다. 하지만 주의해야 한다. 열심이 나를 삼킬 수 있다. 내가 열심을 내지만 열심이 나를 삼키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게 된다. 거룩한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선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다.
우리는 삼가 조심해야 한다. 기도하고, 말씀을 가까이 하면서, 성령의 검으로 세상을 넉넉히 이기고 살게 하시는 주님만 의지하면서 모든 영광을 성삼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우리 탄방교회가 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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