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11 수요예배 설교(누가복음 4장 1-13절/예수님께서 마귀 시험을 이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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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1-08-11 21:37
조회96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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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절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성령에게 이끌리시며","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얼핏 생각할때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다는 것이 이해가 되는가? 예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런 창조주가 피조물인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다는 것이 납득이 되기 어렵다. 그런데 더구나 이 시험을 예수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신 상태에서, 그리고 성령의 이끌리심을 받아서 받으신다고 했다. 반대로 말하면 이 시험을 누가 주관하신다는 것인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시험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에 마귀가 하나님의 허락하신 한도내에서 시험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시험을 기꺼이 받으시고 계신다. 이 시험은 받아도 되고, 안받아도 되는 시험이 아니고,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이다.
왜 이 시험이 꼭 필요한가?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다. 시험을 받는다고 해도 죄를 지으실 가능성이 없으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친히 시험을 받으신 것은 간단히 말하면 우리를 위해서이다. 우리에게 마귀의 시험이 없을수 없다. 이 세상을 사는 내내 시험과 환난과 역경과 핍박을 받으면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영적인 전투를 행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광야로 가고 계신다. 광야는 영적 전쟁터이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도무지 살수 없는 곳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만나와 생수와 메추라기로 살수 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실패했다.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 출애굽 세대 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간 자가 아무도 없었다.
그 실패를 예수님께서 성공으로 바꿔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실패한 그 일을 하나님이 성취하시고 회복시키시고 완성하신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이나 로마서 5장을 보면 예수님을 제 2의 아담이라고 말한다.
시험이라는 것을 생각할때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는가? 누가 가장 먼저 시험을 받았는가? 바로 아담이다. 아담과 하와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동산 나무의 실과를 다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들었다. 정녕 죽는다고 했다. 이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마귀는 "정녕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의심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켜서 유혹할때 아담이 마귀의 유혹에 지고 말았다. 결국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지 못하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영적으로 죽고 말았다.
우리가 예수님의 시험에서 중요하게 살펴야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마귀는 어떻게든 의심이 일어나게 해서 하나님과 떨어지게 만들려고 한다. 아담과 하와에게 했던 것처럼..
시험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되는 구절이 있다.
누가복음 3:22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나님께서 예수님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밝히셨다. 우리는 이 관계를 그대로 믿기만 하면 된다. 의심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하나님이 선포하신 것을 여과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마귀는 이것을 가만 두질 않는다.
당시에 사람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에 의구심을 가졌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에는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성행했다. 영지주의는 영적인 것만 선하고 육적인 것은 악하다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의 시험을 바라봐야 한다.
3절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인정하셨건만 마귀는 "만일"이라는 말을 덧붙여서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마귀의 유혹은 매우 달콤하다. 예수님은 40일간 금식하셔서 몹시 주리신 상태였다. 배가 고플때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은 전혀 죄가 아니다. 마귀의 유혹이 유혹 같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의 궤계를 간파하고 계신다.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4절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신명기 8:3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기 원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때 우리가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만나는 그것에 대한 증표였다.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을때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셨다. 생명의 양식을 주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그것을 믿을때 구원을 받는 것이다.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계셨다. 믿음이야 말고, 순종이야 말로 은혜의 방편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5-7절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1절에 성령께서 이끄셨다고 했고, 5절에 이끌고 라는 말이 나왔다. 이 시험을 예수님께서 겸손하신 마음으로 받고 계신 것이다. 저항하시거나 도망가시지 않고 겸손하신 모습으로 시험을 홀로 감당하고 계신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기록된 말씀을 설화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시험 받으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참으로 존귀하고 크시고 영화로우신 분이신데 마귀에게 이끌려 시험을 당하고 계신다.
마귀가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여주었다.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고 말했다. 앞의 시험은 생사의 문제, 먹고 사는 문제였는데, 더 나아가 인간의 탐욕을 좀더 자극하는 시험을 했다.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이 시험에 모순이 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뭔가를 준다고 할때 그것이 내 것이라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6절에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자기도 이것을 받았다는 것이다. 누군가로 부터 넘겨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이 안된다. 사기이다. 이것을 누구에게 넘겨 받았겠나? 욥기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수 있다. 마귀가 욥을 시험하려고 할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한도 내에서만 시험을 할 수 있었다. 사실상 마귀가 가진 것은 없다. 마귀가 가진 권한은 없다.
8절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마귀의 시험을 이겨내고 계신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를 예수님께서 회복시키시고 성취하고 계신다. "너는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는 관계에서 이 일을 하고 계신 것이다. 이 관계를 유지시켜 나가시면서 시험을 이기고 계신다. 마귀는 이 관계를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세상의 것을 겸하여 섬길수 없다. 부자 청년은 재물을 포기하지 못했다. 성경은 물질과 권세와 세상 것을 하나님과 겸하여 섬길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한다.
마귀에게 절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할수 없다.
9-11절
마귀가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세웠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시험을 물리치셨는데, 마귀가 "기록되었으되" 말씀을 인용해서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다.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을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과연 그러한지 뛰어내려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신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신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시험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정말로 나를 지키시는가? 이것을 의심한다면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다. 마귀는 그 일을 시키고 있는 것이다.
12절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마귀가 말씀을 왜곡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의도를 왜곡시켰다. 하나님은 환난 날에 큰 시험을 받을때, 참으로 어렵고 힘들때에도 하나님은 피난처가 되시고, 산성이 되시고,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신다는 맥락에서 말씀을 주신 것이다. 그런데 마귀가 이것을 비틀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담겨 있다. 그런데 그 말씀을 하나님의 뜻과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해석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 마귀의 의도를 간파하시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대답하신 것이다.
이 모든 시험을 예수님은 말씀으로 승리하셨다. 마귀가 말씀을 왜곡시켜서 시험하더라도 예수님은 단번에 흔들리지 않으신다. 예수님이 말씀 그 자체이시다. 태초 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의 주인이시기에 마귀의 시험에 넘어가지 않으신 것이다.
우리의 열심은 성경 말씀의 지식에 기반되어야 한다. 순수한 성경 말씀 그대로를 기초로 해야 한다.
9절에 "또 이끌고"라고 했다. 예수님이 시험받으시는 내내 "이끌고"라는 단어가 반복되어서 나타나고 있다.
이사야 53:2-3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모진 고통을 당하셨다. 마귀에게 이끌려 다니시면서 시험을 당하셨다.
왜 이 시험을 당하신다고 했는가? 우리가 실패한 것을 성취하시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이길수 없는 시험에서 승리하셔서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 아버지은 예수님께서 그 시험을 받으시도록 광야로 보내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우리에게 시험과 곤난이 필수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 없다. 예수님이 앞서 가셨다. 우리를 위해 구원의 길을 다 닦아 놓으셨다. 마귀는 자기가 할수 있는 범위 안에서 우리를 괴롭히겠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다.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할수 있다.
요한일서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3절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점과 흠없이 완전하게 이기셨다. 구약의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인용하셨다.
고난과 시험은 성도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할수 있는 귀한 은혜의 시간이다. 어떤 고난과 환나이 있더라도 믿음 잃지 말아야 한다. 진리를 더욱 사모해야 한다.
1-2절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성령에게 이끌리시며","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얼핏 생각할때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다는 것이 이해가 되는가? 예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런 창조주가 피조물인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신다는 것이 납득이 되기 어렵다. 그런데 더구나 이 시험을 예수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으신 상태에서, 그리고 성령의 이끌리심을 받아서 받으신다고 했다. 반대로 말하면 이 시험을 누가 주관하신다는 것인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시험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에 마귀가 하나님의 허락하신 한도내에서 시험을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시험을 기꺼이 받으시고 계신다. 이 시험은 받아도 되고, 안받아도 되는 시험이 아니고,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이다.
왜 이 시험이 꼭 필요한가?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다. 시험을 받는다고 해도 죄를 지으실 가능성이 없으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친히 시험을 받으신 것은 간단히 말하면 우리를 위해서이다. 우리에게 마귀의 시험이 없을수 없다. 이 세상을 사는 내내 시험과 환난과 역경과 핍박을 받으면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영적인 전투를 행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광야로 가고 계신다. 광야는 영적 전쟁터이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도무지 살수 없는 곳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만나와 생수와 메추라기로 살수 있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실패했다.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 출애굽 세대 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간 자가 아무도 없었다.
그 실패를 예수님께서 성공으로 바꿔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실패한 그 일을 하나님이 성취하시고 회복시키시고 완성하신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이나 로마서 5장을 보면 예수님을 제 2의 아담이라고 말한다.
시험이라는 것을 생각할때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는가? 누가 가장 먼저 시험을 받았는가? 바로 아담이다. 아담과 하와는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동산 나무의 실과를 다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는 명령을 들었다. 정녕 죽는다고 했다. 이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마귀는 "정녕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의심하게 만들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켜서 유혹할때 아담이 마귀의 유혹에 지고 말았다. 결국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지 못하게 되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영적으로 죽고 말았다.
우리가 예수님의 시험에서 중요하게 살펴야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마귀는 어떻게든 의심이 일어나게 해서 하나님과 떨어지게 만들려고 한다. 아담과 하와에게 했던 것처럼..
시험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되는 구절이 있다.
누가복음 3:22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나님께서 예수님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밝히셨다. 우리는 이 관계를 그대로 믿기만 하면 된다. 의심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하나님이 선포하신 것을 여과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마귀는 이것을 가만 두질 않는다.
당시에 사람들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에 의구심을 가졌을 것이다. 더구나 당시에는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성행했다. 영지주의는 영적인 것만 선하고 육적인 것은 악하다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예수님의 시험을 바라봐야 한다.
3절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인정하셨건만 마귀는 "만일"이라는 말을 덧붙여서 의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마귀의 유혹은 매우 달콤하다. 예수님은 40일간 금식하셔서 몹시 주리신 상태였다. 배가 고플때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은 전혀 죄가 아니다. 마귀의 유혹이 유혹 같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귀의 궤계를 간파하고 계신다.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4절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신명기 8:3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기 원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할때 우리가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만나는 그것에 대한 증표였다.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을때 하나님께서 만나를 주셨다. 생명의 양식을 주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그것을 믿을때 구원을 받는 것이다.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고 계셨다. 믿음이야 말고, 순종이야 말로 은혜의 방편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5-7절
"마귀가 또 예수를 이끌고" 1절에 성령께서 이끄셨다고 했고, 5절에 이끌고 라는 말이 나왔다. 이 시험을 예수님께서 겸손하신 마음으로 받고 계신 것이다. 저항하시거나 도망가시지 않고 겸손하신 모습으로 시험을 홀로 감당하고 계신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기록된 말씀을 설화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시험 받으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참으로 존귀하고 크시고 영화로우신 분이신데 마귀에게 이끌려 시험을 당하고 계신다.
마귀가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여주었다. "이 모든 권위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고 말했다. 앞의 시험은 생사의 문제, 먹고 사는 문제였는데, 더 나아가 인간의 탐욕을 좀더 자극하는 시험을 했다.
"네가 만일 내게 절하면 다 네 것이 되리라" 이 시험에 모순이 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뭔가를 준다고 할때 그것이 내 것이라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6절에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자기도 이것을 받았다는 것이다. 누군가로 부터 넘겨 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말이 안된다. 사기이다. 이것을 누구에게 넘겨 받았겠나? 욥기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수 있다. 마귀가 욥을 시험하려고 할때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한도 내에서만 시험을 할 수 있었다. 사실상 마귀가 가진 것은 없다. 마귀가 가진 권한은 없다.
8절
"기록된 바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마귀의 시험을 이겨내고 계신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를 예수님께서 회복시키시고 성취하고 계신다. "너는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는 관계에서 이 일을 하고 계신 것이다. 이 관계를 유지시켜 나가시면서 시험을 이기고 계신다. 마귀는 이 관계를 무너뜨리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세상의 것을 겸하여 섬길수 없다. 부자 청년은 재물을 포기하지 못했다. 성경은 물질과 권세와 세상 것을 하나님과 겸하여 섬길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한다.
마귀에게 절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할수 없다.
9-11절
마귀가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세웠다.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시험을 물리치셨는데, 마귀가 "기록되었으되" 말씀을 인용해서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다.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또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을어 네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시리라" 과연 그러한지 뛰어내려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신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신다. 그런데 우리가 이것을 시험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정말로 나를 지키시는가? 이것을 의심한다면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다. 마귀는 그 일을 시키고 있는 것이다.
12절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마귀가 말씀을 왜곡했다. 하나님의 말씀의 의도를 왜곡시켰다. 하나님은 환난 날에 큰 시험을 받을때, 참으로 어렵고 힘들때에도 하나님은 피난처가 되시고, 산성이 되시고, 눈동자와 같이 지켜주신다는 맥락에서 말씀을 주신 것이다. 그런데 마귀가 이것을 비틀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담겨 있다. 그런데 그 말씀을 하나님의 뜻과 전혀 상관없는 방향으로 해석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 마귀의 의도를 간파하시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대답하신 것이다.
이 모든 시험을 예수님은 말씀으로 승리하셨다. 마귀가 말씀을 왜곡시켜서 시험하더라도 예수님은 단번에 흔들리지 않으신다. 예수님이 말씀 그 자체이시다. 태초 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의 주인이시기에 마귀의 시험에 넘어가지 않으신 것이다.
우리의 열심은 성경 말씀의 지식에 기반되어야 한다. 순수한 성경 말씀 그대로를 기초로 해야 한다.
9절에 "또 이끌고"라고 했다. 예수님이 시험받으시는 내내 "이끌고"라는 단어가 반복되어서 나타나고 있다.
이사야 53:2-3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모진 고통을 당하셨다. 마귀에게 이끌려 다니시면서 시험을 당하셨다.
왜 이 시험을 당하신다고 했는가? 우리가 실패한 것을 성취하시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이길수 없는 시험에서 승리하셔서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이다. 하나님 아버지은 예수님께서 그 시험을 받으시도록 광야로 보내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다. 우리에게 시험과 곤난이 필수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 없다. 예수님이 앞서 가셨다. 우리를 위해 구원의 길을 다 닦아 놓으셨다. 마귀는 자기가 할수 있는 범위 안에서 우리를 괴롭히겠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질 가능성은 전혀 없다.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다.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할수 있다.
요한일서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3절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점과 흠없이 완전하게 이기셨다. 구약의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인용하셨다.
고난과 시험은 성도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할수 있는 귀한 은혜의 시간이다. 어떤 고난과 환나이 있더라도 믿음 잃지 말아야 한다. 진리를 더욱 사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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