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818 수요예배 설교(누가복음 4장 14-30절/예수님께서 전도하심)
페이지 정보
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1-08-18 21:05
조회1,029회
댓글0건
관련링크
본문
유튜브 동영상: https://youtu.be/liI2T7uEYN4
예수님께서 40일간 기도하시고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다. 주님은 더욱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지셨다.
14-15절
주님은 갈릴리로 돌아가셔서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갈릴리는 주님의 첫 사역지이다. 마귀의 시험을 이기고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을 증거하실때 큰 역사가 나타났다. 이것이 주님의 힘이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서 말씀을 증거하셨다. 그랬더니 좋은 소문이 사방에 퍼지고 많은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신 것이다. 주님의 사역을 크게 세가지로 구분하면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치셨다.
가르치신 것은 믿는 자들을 모아놓고 말씀을 가르치신 것이고, 전파하신 것은 믿지 않는 자에게 복음을 전하신 것이고, 병든 자들을 고치셨다.
주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시자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좋은 반응이 나왔다. 많은 사람이 은혜받고 주님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칭찬하는 모습들이 생겨났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도 성령 충만한 가운데서 힘써 복음을 전하고 믿는 일을 할때 칭찬 듣는 일이 많았다. 온 이웃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칭찬 받으려고 의도하지 않아도 믿음으로 살고, 선을 행하면 칭찬을 받게 되어 있다.
16절
나사렛은 갈릴리 지방 안에 있는 작은 마을인데, 주님께서 자라나신 곳이다.
"늘 하시던대로" 습관적인 모습이다. 무엇을 하셨나? 안식일에 회당에 가셨다. 이것이 주님께서 늘 하시던 일이었다. 안식일에 회당에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도 주일에 교회에 모여서 예배 드리는 일에 힘써야 한다. 이것은 주님께서도 늘 노력하신 일이다.
그리고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으셨다. 다른 날에도 늘 읽으셨을 것이다. 그런데 안식일에 성경을 읽은 것을 더 강조한 것이다. 우리도 매일 성경을 읽고 주일에 성경을 더욱 읽어야 한다.
누가복음 22:39 예수께서 나가서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주님께서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하셨다. 이것이 주님의 습관이었다. 참 좋은 습관이다. 기도하는 습관, 안식일에 예배 드리고, 성경을 읽고, 가르치시는 습관을 가지셨다. 우리도 이런 경건의 습관을 가지면 신앙에 큰 유익이 있다. 반대로 나쁜 습관이 있다며 빨리 고쳐야 한다. 좋지 않은 습관은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 믿음에 해를 주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된다.
17-19절
예수님께서 이사야 61장의 말씀을 읽으셨다. 장차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실 일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이다. 여기에 대한 두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는 신령한 올바른 해석이다. 다른 하나는 해방신학자, 자유주의자들의 해석이 있다.
올바른 해석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심령의 가난한 자로 본다. 마태복음 5:3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영적인 것을 사모하고 말씀을 잘 받아들인다. 물질적으로 부요해도 심령이 가난한 자가 있을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세상적인 것이 없고 물질적으로 가난하면 심령이 가난해지기가 쉬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돈이 많든 적든 한나님이 주신 것으로 알고 잘 사용하고, 심령이 가난해져야 은혜와 복을 받는 길로 갈수 있다.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라는 말은 성령충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라는 의미가 있다. 예수님이 메시야, 구세주가 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구약시대 왕, 선지자, 제사장 직분을 세울때 기름을 부었다. 예수님께서 세가지 직분을 가지시고 하나님와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되셔서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신다는 의미이다.
포로가 된 자는 마귀에게 포로된 자, 죄의 종노릇하는 자들이다. 이런 자를 구원해서 자유를 주신다는 것이다.
요 8:34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했고. 요 8:44에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고 했다. 마귀와 죄의 종된 자리에서 구원하신 다는 것이다.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한다는 것은 영적 눈이 먼자, 신령한 눈을 뜨지 못하고 사는 자의 영안이 열리게 하셔서 신령한 세계를 보게 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안이 열려서 하나님과 천국과 영적인 신령한 세계를 알게 된다. 그 전에는 영적인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눈먼자를 다시 보게하신다는 것이다.
눌린 자는 죄로 인해서 마음이 눌려 사는 사람이다. 죄를 지으면 크게 눌리는 것이 있다. 죄의 가책과 두려움이 있다.
시편 32:3-4 다윗이 범죄하고 눌렸다고 표현했다.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고 괴로운지 견딜수 없는 상태가 되었음을 고백했다.
이런 자를 건져서 자유롭게 하고 해방시킨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와 마귀의 종살이하는데서 해방시켜주셔서 자유롭게 해주셨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는 죄와 마귀의 종살이하는데로 들어가면 안된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말씀을 지키는 것을 억압 받고, 속박 받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영적 자유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물고기는 물 속에 살아야 자유롭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면 숨도 쉬지 못하고 죽게 된다.
거듭난 성도는 진리 안에서 자유롭고 말씀 안에서 평안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떠나면 답답하고 괴로울수 밖에 없다.
여기 자유를 육신적인 자유로 생각하며 안된다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주의 은혜의 해는 희년을 가리킨다. 매 50년 마다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면 종들을 해방시켜주고 토지를 원주인들에게 다 돌려준다. 모든 것을 원상회복시킨다. 이것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죄에서 해방시키고 모든 잃었던 것을 다 되찾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6: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지금은 은혜의 때가 다 지나고 환난의 때가 오고 있다. 은혜의 때 말씀으로 잘 무장하면 환난의 때가 와도 믿음으로 승리할수 있다.
이 구절을 해방신학자들은 아주 다르게 해석한다.
이 구절을 근거로 예수님을 해방자라고 주장한다. 기독교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인종적으로 계급사회에서 억압당하고 박해받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일을 예수님이 한다고 말한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따라 해방 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쉽게 말해 정치적으로 억압받는 민중들을 해방시키고, 경제적으로 가난해서 어려움 당하고 박해 당하고 자유롭게 살지 못하는 자들을 도와줘야 한다고 말한다. 부자들의 돈을 빼앗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한다고 말한다.
여성과 아이들과 같이 탄압당하는 자들을 해방시켜 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폭력, 비폭력의 방법도 다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산주의와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예수님은 해방자가 아니다.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을 하시지 않았다. 주님은 복음 전하시고 구속운동을 하셨다.
공산주의는 성경과 반대이다. 공산주의는 무신론자이다. 하나님 자체를 부인한다. 성경을 완전히 거부한다. 성경 파괴하고 찢어버리고 불태우는 운동을 한다. 북한과 중국은 교회 탄압하는 일을 강력하게 하고 있다. 공산주의는 기독교 대적하는 일을 끊임없이 한다. 공산주의는 유물론주의이다.
계시록 13장에 두 짐승이 나오는데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은 공산주의, 땅에서 나오는 짐승은 천주교로 볼수 있다. 이 두 단체가 손잡아서 성도들을 탄압하고 엄청난 죄를 짓는 일들을 일으킬 것이다.
공산주의 세력이 많이 무너지고 약해졌었는데 다시 힘을 내서 강해지고 있다. 공산주의가 득세하고 기독교 박해하는 운동을 시작하고 있다.
말세가 되면 이 공산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고 기독교를 탄압하는 일이 크게 일어날 것으로 예측된다.
20-21절
말씀을 읽으신 다음에 앉으셔서 그 말씀을 해석하시고 설명해주셨다.
"이 글이 오늘 너희 위에 응하였느니라" 말씀을 읽어주시고 설명하시는데 짧게 정리해주셨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이 다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메시야이신데, 그 메시야가 오셔서 복음 전하는 일을 하고 계시기에 그 일이 이루어졌음을 선포하신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리신 것이다.
22절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들의 반응이 나온다. 첫번째 반응은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아주 놀라워했다. 그러나 단지 놀라워할 뿐이다. 언제 말씀을 배워서 저렇게 은혜로운 말씀을 전할수 있을까? 놀라워 했다.
또 하나의 반응은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했다.
마가복음 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와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라고 말한 의미가 뭐냐면 "예수님을 배척한 것"이다. 말씀을 들어보니 신기하고 놀라운데 요셉의 아들이기에 배척을 한다.
갈릴라 다른 지역에서 말씀을 전할때에는 사람들이 칭송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이 감사하면서 좋아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려서 자란 동네 사람들은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하면서 예수님을 배척했다.
예수님의 육신적인 면, 인간적인 면만 보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로 믿지 않고 거부했다.
오늘날도 이렇게 두가지 반응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때 은혜 받고 구원받고 복받는 자가 있는가 하면 반대하고 기독교를 배척하는 반응이 있다.
23-24절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해서 말할 것이다. 자기 병도 못고치면서 남을 고치고 다니냐? 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예수님이 권능을 많이 행해도 비난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 처럼 여기서도 기적을 행하라고 트집을 잡을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 말씀 전하실 때에는 다 환영 받았다.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존경을 받았다. 그런데 고향 나사렛에서는 오히려 배척하고 미워했다.
선지자가 다른 곳에서는 환영을 받는다. 그런데 가족들, 가까운 친지들, 잘 아는 사람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25-26절
왜 이스라엘의 과부들에게 보냄을 받지 않았는가? 환영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먼 나라 사렙다 과부는 엘리야 선지자를 환영하고 잘 대접함으로 복받았다.
27절
이스라엘의 많은 나병 환자들은 고침을 받지 못했지만 수리아 사람 나아만은 고침을 받았다.
이와같인 먼데 있는 사람들이 선지자를 환영하고 말씀을 잘 받았다.
중요한 것은 가까운데 살아도, 인간적인 모습을 잘 안다고 해서 신령한 것을 부인하면 안된다. 하나님의 일꾼 인것을 인정하고 말씀을 잘 받으면 은혜 받고 복받을 수 있다.
28-30절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주님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말씀을 잘 받지 않고 요셉의 아들 아니냐 고 무시할때 주님께서 책망했더니 화를 냈다. 책망을 듣고 회개하고 마음을 고쳐 먹었으면 유익이 있었을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끌고 가서 낭떨어지에서 밀쳐 떨어뜨려 죽이려고 했다.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했다. 그런데 복음을 듣겠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겠나?
말씀을 들을때 이런 두가지 반응이 나타났다.
말씀을 듣고 존경하고 칭송하는 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무시하고, 책망했더니 죽이려고까지 했다.
우리도 말씀을 듣고 좋은 반응을 보여야 한다. 책망하는 말씀도 있다. 어떤 말씀이던지 잘 받으면 은혜와 복을 받을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직접 복음을 전하시고 말씀을 가르치셨는데도 받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우리는 늘 겸손한 마음,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잘 받고 은혜받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예수님께서 40일간 기도하시고 마귀의 시험을 이기셨다. 주님은 더욱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해지셨다.
14-15절
주님은 갈릴리로 돌아가셔서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다. 갈릴리는 주님의 첫 사역지이다. 마귀의 시험을 이기고 성령의 능력으로 말씀을 증거하실때 큰 역사가 나타났다. 이것이 주님의 힘이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서 말씀을 증거하셨다. 그랬더니 좋은 소문이 사방에 퍼지고 많은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신 것이다. 주님의 사역을 크게 세가지로 구분하면 가르치시고, 전파하시고, 고치셨다.
가르치신 것은 믿는 자들을 모아놓고 말씀을 가르치신 것이고, 전파하신 것은 믿지 않는 자에게 복음을 전하신 것이고, 병든 자들을 고치셨다.
주님께서 이렇게 가르치시자 뭇 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셨다. 좋은 반응이 나왔다. 많은 사람이 은혜받고 주님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칭찬하는 모습들이 생겨났다. 사도행전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도 성령 충만한 가운데서 힘써 복음을 전하고 믿는 일을 할때 칭찬 듣는 일이 많았다. 온 이웃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다. 칭찬 받으려고 의도하지 않아도 믿음으로 살고, 선을 행하면 칭찬을 받게 되어 있다.
16절
나사렛은 갈릴리 지방 안에 있는 작은 마을인데, 주님께서 자라나신 곳이다.
"늘 하시던대로" 습관적인 모습이다. 무엇을 하셨나? 안식일에 회당에 가셨다. 이것이 주님께서 늘 하시던 일이었다. 안식일에 회당에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도 주일에 교회에 모여서 예배 드리는 일에 힘써야 한다. 이것은 주님께서도 늘 노력하신 일이다.
그리고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으셨다. 다른 날에도 늘 읽으셨을 것이다. 그런데 안식일에 성경을 읽은 것을 더 강조한 것이다. 우리도 매일 성경을 읽고 주일에 성경을 더욱 읽어야 한다.
누가복음 22:39 예수께서 나가서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따라갔더니
주님께서 감람산에 가셔서 기도하셨다. 이것이 주님의 습관이었다. 참 좋은 습관이다. 기도하는 습관, 안식일에 예배 드리고, 성경을 읽고, 가르치시는 습관을 가지셨다. 우리도 이런 경건의 습관을 가지면 신앙에 큰 유익이 있다. 반대로 나쁜 습관이 있다며 빨리 고쳐야 한다. 좋지 않은 습관은 우리의 삶을 파괴하고 믿음에 해를 주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된다.
17-19절
예수님께서 이사야 61장의 말씀을 읽으셨다. 장차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하실 일을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이다. 여기에 대한 두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는 신령한 올바른 해석이다. 다른 하나는 해방신학자, 자유주의자들의 해석이 있다.
올바른 해석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신다는 것은 심령의 가난한 자로 본다. 마태복음 5:3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영적인 것을 사모하고 말씀을 잘 받아들인다. 물질적으로 부요해도 심령이 가난한 자가 있을수 있다. 일반적으로는 세상적인 것이 없고 물질적으로 가난하면 심령이 가난해지기가 쉬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돈이 많든 적든 한나님이 주신 것으로 알고 잘 사용하고, 심령이 가난해져야 은혜와 복을 받는 길로 갈수 있다.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라는 말은 성령충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라는 의미가 있다. 예수님이 메시야, 구세주가 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구약시대 왕, 선지자, 제사장 직분을 세울때 기름을 부었다. 예수님께서 세가지 직분을 가지시고 하나님와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되셔서 구세주의 사명을 감당하신다는 의미이다.
포로가 된 자는 마귀에게 포로된 자, 죄의 종노릇하는 자들이다. 이런 자를 구원해서 자유를 주신다는 것이다.
요 8:34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고 했고. 요 8:44에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고 했다. 마귀와 죄의 종된 자리에서 구원하신 다는 것이다.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한다는 것은 영적 눈이 먼자, 신령한 눈을 뜨지 못하고 사는 자의 영안이 열리게 하셔서 신령한 세계를 보게 하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안이 열려서 하나님과 천국과 영적인 신령한 세계를 알게 된다. 그 전에는 영적인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눈먼자를 다시 보게하신다는 것이다.
눌린 자는 죄로 인해서 마음이 눌려 사는 사람이다. 죄를 지으면 크게 눌리는 것이 있다. 죄의 가책과 두려움이 있다.
시편 32:3-4 다윗이 범죄하고 눌렸다고 표현했다.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고 괴로운지 견딜수 없는 상태가 되었음을 고백했다.
이런 자를 건져서 자유롭게 하고 해방시킨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와 마귀의 종살이하는데서 해방시켜주셔서 자유롭게 해주셨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는 죄와 마귀의 종살이하는데로 들어가면 안된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말씀을 지키는 것을 억압 받고, 속박 받는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데, 영적 자유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물고기는 물 속에 살아야 자유롭다. 물고기는 물을 떠나면 숨도 쉬지 못하고 죽게 된다.
거듭난 성도는 진리 안에서 자유롭고 말씀 안에서 평안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떠나면 답답하고 괴로울수 밖에 없다.
여기 자유를 육신적인 자유로 생각하며 안된다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주의 은혜의 해는 희년을 가리킨다. 매 50년 마다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면 종들을 해방시켜주고 토지를 원주인들에게 다 돌려준다. 모든 것을 원상회복시킨다. 이것은 장차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죄에서 해방시키고 모든 잃었던 것을 다 되찾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6: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지금은 은혜의 때가 다 지나고 환난의 때가 오고 있다. 은혜의 때 말씀으로 잘 무장하면 환난의 때가 와도 믿음으로 승리할수 있다.
이 구절을 해방신학자들은 아주 다르게 해석한다.
이 구절을 근거로 예수님을 해방자라고 주장한다. 기독교는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인종적으로 계급사회에서 억압당하고 박해받는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일을 예수님이 한다고 말한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따라 해방 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쉽게 말해 정치적으로 억압받는 민중들을 해방시키고, 경제적으로 가난해서 어려움 당하고 박해 당하고 자유롭게 살지 못하는 자들을 도와줘야 한다고 말한다. 부자들의 돈을 빼앗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한다고 말한다.
여성과 아이들과 같이 탄압당하는 자들을 해방시켜 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폭력, 비폭력의 방법도 다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공산주의와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예수님은 해방자가 아니다.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을 하시지 않았다. 주님은 복음 전하시고 구속운동을 하셨다.
공산주의는 성경과 반대이다. 공산주의는 무신론자이다. 하나님 자체를 부인한다. 성경을 완전히 거부한다. 성경 파괴하고 찢어버리고 불태우는 운동을 한다. 북한과 중국은 교회 탄압하는 일을 강력하게 하고 있다. 공산주의는 기독교 대적하는 일을 끊임없이 한다. 공산주의는 유물론주의이다.
계시록 13장에 두 짐승이 나오는데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은 공산주의, 땅에서 나오는 짐승은 천주교로 볼수 있다. 이 두 단체가 손잡아서 성도들을 탄압하고 엄청난 죄를 짓는 일들을 일으킬 것이다.
공산주의 세력이 많이 무너지고 약해졌었는데 다시 힘을 내서 강해지고 있다. 공산주의가 득세하고 기독교 박해하는 운동을 시작하고 있다.
말세가 되면 이 공산주의가 세계를 지배하고 기독교를 탄압하는 일이 크게 일어날 것으로 예측된다.
20-21절
말씀을 읽으신 다음에 앉으셔서 그 말씀을 해석하시고 설명해주셨다.
"이 글이 오늘 너희 위에 응하였느니라" 말씀을 읽어주시고 설명하시는데 짧게 정리해주셨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이 다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메시야이신데, 그 메시야가 오셔서 복음 전하는 일을 하고 계시기에 그 일이 이루어졌음을 선포하신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알리신 것이다.
22절
주님의 말씀을 듣고 배운 사람들의 반응이 나온다. 첫번째 반응은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아주 놀라워했다. 그러나 단지 놀라워할 뿐이다. 언제 말씀을 배워서 저렇게 은혜로운 말씀을 전할수 있을까? 놀라워 했다.
또 하나의 반응은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라고 했다.
마가복음 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와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라고 말한 의미가 뭐냐면 "예수님을 배척한 것"이다. 말씀을 들어보니 신기하고 놀라운데 요셉의 아들이기에 배척을 한다.
갈릴라 다른 지역에서 말씀을 전할때에는 사람들이 칭송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이 감사하면서 좋아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려서 자란 동네 사람들은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고 하면서 예수님을 배척했다.
예수님의 육신적인 면, 인간적인 면만 보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로 믿지 않고 거부했다.
오늘날도 이렇게 두가지 반응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때 은혜 받고 구원받고 복받는 자가 있는가 하면 반대하고 기독교를 배척하는 반응이 있다.
23-24절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해서 말할 것이다. 자기 병도 못고치면서 남을 고치고 다니냐? 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예수님이 권능을 많이 행해도 비난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 처럼 여기서도 기적을 행하라고 트집을 잡을 것이다.
다른 지역에서 말씀 전하실 때에는 다 환영 받았다.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존경을 받았다. 그런데 고향 나사렛에서는 오히려 배척하고 미워했다.
선지자가 다른 곳에서는 환영을 받는다. 그런데 가족들, 가까운 친지들, 잘 아는 사람들에게는 환영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25-26절
왜 이스라엘의 과부들에게 보냄을 받지 않았는가? 환영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먼 나라 사렙다 과부는 엘리야 선지자를 환영하고 잘 대접함으로 복받았다.
27절
이스라엘의 많은 나병 환자들은 고침을 받지 못했지만 수리아 사람 나아만은 고침을 받았다.
이와같인 먼데 있는 사람들이 선지자를 환영하고 말씀을 잘 받았다.
중요한 것은 가까운데 살아도, 인간적인 모습을 잘 안다고 해서 신령한 것을 부인하면 안된다. 하나님의 일꾼 인것을 인정하고 말씀을 잘 받으면 은혜 받고 복받을 수 있다.
28-30절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주님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말씀을 잘 받지 않고 요셉의 아들 아니냐 고 무시할때 주님께서 책망했더니 화를 냈다. 책망을 듣고 회개하고 마음을 고쳐 먹었으면 유익이 있었을텐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끌고 가서 낭떨어지에서 밀쳐 떨어뜨려 죽이려고 했다.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했다. 그런데 복음을 듣겠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겠나?
말씀을 들을때 이런 두가지 반응이 나타났다.
말씀을 듣고 존경하고 칭송하는 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무시하고, 책망했더니 죽이려고까지 했다.
우리도 말씀을 듣고 좋은 반응을 보여야 한다. 책망하는 말씀도 있다. 어떤 말씀이던지 잘 받으면 은혜와 복을 받을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직접 복음을 전하시고 말씀을 가르치셨는데도 받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우리는 늘 겸손한 마음,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잘 받고 은혜받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