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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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22 탄방교회 주일예배 설교(누가복음 15장 11-24절/돌아온 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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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1-08-22 14:55 조회1,0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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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https://youtu.be/qxYbrPpiEWM

본문은 유명한 탕자의 비유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고, 아무리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는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그 내용은 어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 둘째 아들이 자기 몫의 재산을 달라고 해서 먼 나라로 가서 허랑방탕하다 다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 담긴 교훈을 살펴보겠습니다.

1. 아버지를 떠나는 탕자
11-13절에 보면 둘째 아들이 자기 몫의 재산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 우선 생각할 것은 이 둘째 아들은 왜 아버지를 떠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기로 한 것은 집안이 너무 가난해서 먹고 살기가 힘들어서 나가려고 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아버지 집에는 종들도 많고 물질도 풍족했습니다. 또 아버지가 너무 엄하고 무서워서 아버지 밑에서 살기가 힘들어서 가출하려고 한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이 아버지가 아들의 의사를 존중해서 재산을 나눠주고, 나중에 방탕하다가 돌아왔을 때 사랑으로 맞이하는 것을 보면 이 아버지는 참 좋은 아버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 없이도 잘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혼자 힘으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가 보이지 않고, 아버지의 간섭이 없는 곳으로 가서 자기 멋대로 살아보려고 한 것입니다. 아무의 제재도 받지 않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 마음대로 살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가 가고 싶은 곳에 가서, 자기가 하고 싶은 데로 하고, 자기 기분대로 살아보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참으로 교만하고 악한 생각입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하나님을 비유하고 둘째 아들은 죄인인 우리를 비유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 둘째 아들처럼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고 싶어하고, 부모를 떠나고 싶어 하고, 자기 집을 떠나고 싶어 합니다. 자유라는 것에 대한 허황된 망상에 속아서 하나님을 떠나 방탕하는 인생들이 많습니다. 그것이 죄의 종이 되고 마귀의 종이 되는 것인 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마음입니다. 먼 나라는 하나님으로부터 먼 곳을 의미합니다. 방탕과 불신앙의 세계는 하나님께로부터 먼 곳입니다. 아버지를 떠나는 순간부터 실패와 불행의 길을 갑니다. 아버지를 떠나면서 그는 모든 것을 잃습니다. 아버지를 떠나면서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게 되고, 자신의 행복과 축복들도 함께 잃게 됩니다. 예레미야 2:13에 보면 인간의 근본적인 죄와 불행의 원인을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를 떠나면 자유로울 수 있고, 마음껏 즐길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스스로 속은 것입니다.

2. 방탕하며 낭비하는 탕자
아버지를 떠난 탕자는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며 그 재산을 낭비했습니다(13절). 여기에 두 가지를 말씀합니다. 하나는 ‘허랑방탕하여’란 말입니다. 아버지를 떠난 탕자는 규범도 없고, 기준도 없고, 도덕도 없고, 양심도 없고, 말씀도 없는 무절제한 생활을 했습니다. 이렇게 하고 싶어서 아버지를 떠난 것입니다. 이렇게 아버지를 떠나자마자 그의 삶은 무너집니다. 돈을 다 잃고, 친구를 다 잃고, 건강을 잃고, 힘을 잃고, 자기 자신을 다 잃기까지 방탕했습니다. 14절에 “다 탕진해 버렸을 때”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죄란 적당히 지을 수가 없습니다. 방탕에 빠졌던 삼손을 보십시오. 머리까락도 잃고, 눈도 뽑히고, 힘도 잃고, 여자도 잃고, 명예도 잃고, 믿음도 잃고, 생명도 잃습니다. 또 하나는 ‘낭비하더니’라는 말입니다. 탕자는 아버지가 그에게 준 모든 것을 낭비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는 순간부터 그의 인생은 낭비하는 인생이 됩니다. 돈만 낭비한 것이 아닙니다. 시간도 낭비하고, 젊음도 낭비하고, 자신의 삶을 낭비하고, 자기의 인생 전체를 낭비합니다. 그러나 탕자는 이것을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즐겼다고 생각하고, 자기를 위해서 쓴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무엇이 낭비이고 무엇이 유익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시간을 바치고, 물질을 바치고, 힘을 바치고, 예배드리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방탕하고, 술 마시고, 죄 지으면서 노는 것은 낭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은지 모릅니다. 무서운 착각입니다.
탕자는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비참한 자리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보통의 흉년이 아니라 심각한 흉년이었습니다.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그는 어떤 사람의 집에서 돼지를 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이 돼지를 친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유대인은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여겼습니다. 돼지고기를 먹지도 않았고, 돼지를 기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돼지를 치는 일을 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비참한 신세가 되었는가를 보여줍니다. 더군다나 먹을 것이 없어서 돼지가 먹는 쥐염 열매라도 먹으려고 했으나 그것조차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이 아들의 신세가 얼마나 비참해졌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3. 뉘우치며 돌아오는 탕자
그가 스스로 돌이켰습니다(17절). 즉 제정신이 들었다는 말입니다. 아버지를 버리고 떠날 때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탕자는 모든 것을 다 잃고 죽게 된 처지에서 비로소 정신을 차렸습니다. 돼지우리 곁에 앉아서 비로소 자기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가난하고 배고프고 외롭게 된 처지에서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이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자기 모습을 돌아보고,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했는지, 자신의 처지가 어떤지 깨닫는 것이 회개의 시작입니다. 자기를 돌아보지 않는 자는 회개하지 못합니다. 우리도 날마다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돌아봐야 합니다.
그런데 탕자가 이렇게 자신을 돌아보게 된 동기가 무엇입니까? 모든 것 다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흉년이 들어 죽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흉년이 그에게 고통이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흉년 때문에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합니다. 만약에 흉년이 없었다면 어떠했을까요?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버지께 돌아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탕자에게 이 흉년은 고난이면서 축복입니다. 흉년 때문에 그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난을 변장된 축복이라고 말합니다. 고난 중에 사람들은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사람들은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흉년이 왔다고 생각하거든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생각하십시오.
탕자는 아버지 집을 생각했습니다. 아버지 집에서는 품꾼들까지 양식을 풍족하게 먹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풍족합니다. 그곳에는 거할 곳이 많습니다. 그곳에서는 배부르게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행복이 있고, 기쁨이 있고, 만족이 있습니다. 인생들이 찾고 바라는 모든 것이 아버지 집에 다 있습니다. 탕자는 비로소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가 좋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진정한 자유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행복이며,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이 안식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탕자가 아버지 집에 있을 때는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아버지 집이 이렇게 좋은 곳인 줄 몰랐습니다. 먼 나라에 가서 고생해보니 그때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집은 천국입니다.
이때부터 탕자는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탕자는 아버지께로 돌아갈 결심을 합니다. 18-19절에 보면 탕자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서 이렇게 말해야겠다고 혼잣말을 하고 있습니다. 탕자는 자신의 죄를 인정했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것이 잘못이었음을 고백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아들의 자격이 없음을 인정했습니다. 품꾼으로라도 써 주기만 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종으로라도 받아만 주신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참으로 겸손해졌습니다. 탕자가 이렇게 결심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 갈등하며 고민했겠습니까? 그러나 마침내 결심하고 마음을 굳혔습니다. 우리에게도 갈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많은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복을 받습니다.

4. 탕자를 영접하는 아버지
20절에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a) “아직도 거리가 먼데” 실제로 거리가 멀다는 의미도 있고 상징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돌아오려고 할 때 언제나 멀게 느껴집니다. 탕자의 마음에 면목이 없고, 쑥스럽고, 낯을 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와 거리가 얼마나 멀게 느껴졌겠습니까?
b) “아버지가 그를 보고” 아버지는 아들의 모든 삶을 다 보셨습니다. 아버지를 떠나는 당당한 아들의 모습, 재산을 허비하며 방탕하는 아들의 모습, 창기와 함께 웃고 즐기는 아들의 모습, 술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먹고 마시며 비틀거리는 아들의 모습, 돼지우리 곁에서 앉아 있는 불쌍한 아들의 모습, 배고픔과 굶주림에서 힘들어하는 아들의 모습, 잠 못 자며 번민하며 갈등하는 아들의 모습, 지치고 피곤한 그의 삶을 다 보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방황도, 우리의 죄악도, 우리의 실패도, 우리의 눈물도, 우리의 슬픔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도 다 보고 계십니다.
c) “측은히 여겨” 아버지는 아들을 측은히 여겼습니다. 아버지를 떠나서 방탕하다가 고통당하는 탕자보다, 떠나보낸 아들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고통이 더 컸을 것입니다. 탕자가 굶주리며 배고픔 속에서 아버지를 생각하며 찾은 것보다 아버지가 더 애타게 찾았을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보고 싶어 한 것보다 아버지가 탕자를 더 보고 싶어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로 달려갔습니다.
d)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버지는 냄새나는 추한 아들의 몸을 끌어 앉았습니다. 때 묻고 더러운 아들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습니다. 아버지는 모든 것을 용납하고 용서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과거를 묻지 않았습니다. 탕진한 재물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돌아온 것으로 다 용서했습니다. 아버지에게 소중한 것은 재산이 아니라 아들이었습니다. 어떤 죄를 지었더라도, 아무리 큰 잘못을 했더라도,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다 용서하십니다.
e) 아버지는 제일 좋은 옷을 입혔습니다(22-24절). 냄새나고 더러운 옷을 벗기고 깨끗하고 의로운 옷을 입혔습니다. 예수님의 구속으로 만든 의의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웠습니다. 아들로 인정하고 받아주는 표이며 언약을 상징하는 반지입니다. 발에 신을 신겼습니다. 복음의 신입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굶주리고 배고팠을 아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먹이십니다. 아버지는 너무나 기쁘고 즐거워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탕자는 기뻤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보다 더 기뻐하셨습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고 돌아오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한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오십시오.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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