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0 주일예배 설교(창세기 3장 8-10절/네가 어디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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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1-10-10 15:37
조회99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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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생사화복 모든 것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좌우됩니다. 아담 하와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 때 참 행복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듬뿍 받았고 모든 것에 만족과 기쁨을 누렸습니다. 부부관계도 좋았고 자연과의 관계도 좋았습니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좋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아담 하와는 그때부터 하나님을 슬슬 피하게 되고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두렵고 무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찾아오는 것조차 싫었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깨어지니까 모든 것이 뒤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아직 에덴동산에 살고 있었지만 더 이상 기쁨이나 만족이 없습니다. 낙원에 있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자기 심령에도 고통이 찾아오고, 부부관계도 깨어지고 자연과의 관계도 파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상태에 있는 아담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아담을 부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에 담긴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1. 아담을 부르신 하나님
첫째. 아담의 영적인 상태를 깨우치는 질문.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 자신이 자신의 영적인 상태와 영적인 위치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것을 보셨고,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피하는 것을 보셨고, 무화과나무 뒤에 숨어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다 보시고 아시면서도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신 것은 좀 더 깊은 의도가 숨어있는 질문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는 ‘너는 지금 네가 있을 자리에 있느냐? 네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느냐? 왜 너는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느냐? 하나님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하고 한 선악과를 왜 먹었느냐? 그런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선악과 따먹고 얼마나 행복해졌느냐?' ‘네가 왜 그렇게 초라해졌느냐? 네가 왜 그렇게 불행해졌느냐? 네가 왜 그렇게 고생덩어리가 됐느냐? 네가 왜 그렇게 죽을 지경에 빠졌느냐?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 때도 그렇게 불행하더냐?’ 이런 의미가 담긴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수천 년 전 아담에게 한 것이지만, 성경 말씀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유명한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다가 재산을 다 낭비하고 비로소 궁핍해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크게 흉년들어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돼지우리 옆에서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돼지가 먹는 쥐염 열매로 배를 채웁니다. 그리고 돼지 주인에게 구박을 받으며 눈물을 흘리면서 살아갑니다. 잠을 못 자고 고민을 해도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가 돼지우리 옆에서 이런 신세타령을 합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탕자가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가 왜 돼지우리 곁에서 살아야 되고, 그가 왜 돼지가 먹는 쥐염 열매를 먹어야 되고, 그가 왜 돼지 주인에게 구박 받으면서 사는 신세가 되었습니까? 근원을 따지고 올라가 보면 아버지와 관계를 끊어버리고, 아버지 집을 떠난 거기에서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탕자의 모든 고난과 모든 문제는 그가 아버지 집을 떠났기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근본문제는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직장입니까? 이웃이 문제입니까? 친구가 문제입니까? 부모가 문제입니까? 자녀가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는 생수의 근원 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아버지를 멀리 떠나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전도서를 보면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수고가 헛되다고 했습니다. 해 아래서 즉 하나님 없이 하는 모든 것이 다 헛되다는 의미입니다. 인생의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돌아보고 자신의 영적인 위치를 바로 찾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아담의 회개를 촉구하시는 질문. 10절에 보면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에 두려워하여 무화과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아담은 범죄한 후 양심의 가책이 있었고 마음에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무화과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억누르고 죄를 숨기려고 하였습니다. 그런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아담의 죄를 찾아내시고 회개하라고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윤리적인 것이나 도덕적인 것보다 더 근본적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라는 단어를 히브리 원어로는 “하말티아”라고 하는데 그 뜻은 ‘과녁을 못 맞추었다. 빗나갔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삐뚤어지니까 그 결과로 모든 잘못된 행동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어 있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나오는 모든 행동은 다 죄악 된 결과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도덕적인 죄, 윤리적인 죄는 다 하나님을 떠난 결과입니다. 예레미야 2:13에 생수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2:19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그가 하는 모든 일과 행동이 다 죄입니다.
따라서 회개의 개념도 다릅니다. 죄인이니까 죄를 짓습니까?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입니까? 아담은 죄를 지었으니까 죄인이지만 우리는 죄인이니까 죄를 짓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서 평생 죄를 짓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어 있으니까 죄를 짓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 회개는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면 하나님이 손해나는 것이 아니라 아담 자신이 죽습니다.
아담의 문제는 나무 뒤에 숨는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는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아내와 다투지 않고 화해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돈만 많이 벌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이 진정으로 사는 길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 먹고 죽을 수밖에 없는 아담에게 살길을 주시려고 그를 찾아오시고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 길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아모스 5:4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셋째. 아담의 행복을 위한 질문. 하나님께서 인생을 찾아오시는 것만큼 귀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찾아오시는 것이 사랑이고 은혜입니다.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기르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가 고생하는 것 좋아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불행하게 되는 것 원치 않습니다. 우리의 가슴속에 근심과 걱정을 가지고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 범죄하고 고민하고 있는 아담에게 찾아오셔서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범죄 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가까이 오시는 것이 싫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찾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기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가 드러날까 봐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고통과 슬픔이 가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믈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들을 괴롭히려고 찾아가셨습니까?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려고 부르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끝없이 방황하다가 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들에게 죄 용서함을 주시고, 평안을 주시고, 자유를 주시고, 생명을 주시려고 찾아가신 것입니다. 아담 하와를 찾아가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놀라운 복음을 주십니다. 창세기 3:15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여자의 후손으로 보내어 마귀의 머리를 깨뜨리고 구원과 승리를 주실 것을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가죽옷을 입히셨습니다. 가죽옷은 짐승을 죽여서 피를 흘리고 얻을 수 있는 옷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의 생명과 자유와 평안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2.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실 때는 직접 찾아오셔서 음성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부를 때는 그렇게 부르지 않습니다.
첫째, 양심을 통해 우리를 부르심. 양심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능이며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입니다. 범죄 후에 양심도 타락하고 그 기능이 무디어졌지만 아무튼 하나님께서 창조할 때의 형상의 일부가 남아서 선과 악을 분별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양심을 통해서 하루에도 수백 번, 수천 번씩 우리를 부르십니다.
둘째, 역사와 사건과 환경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심.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는 지난 뒤에 깨닫게 됩니다. 지금 일을 당하고 있을 때는 그것이 좋은 일이든지 나쁜 일이든지 간에 그 속에 하나님의 무슨 메시지가 들어있는지 모르지만 지나고 나면 ‘아하 이 일은 이렇게 하시기 위해서 있었구나. 저 일을 저렇게 하시기 위해서 주셨구나.’하고 깨닫게 됩니다. 언제나 지나간 다음에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동안 겪은 모든 사건과, 지나간 역사에는 하나님의 교훈과 음성이 분명히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당하든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슨 교훈을 하시려고 이 사건을 주셨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의 가시(질병) 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욥의 고난 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요나가 만난 폭풍 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십시오. 그 속에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숨어있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를 보십시오. 그 속에 하나님의 교훈이 있습니다.
셋째,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심. 성경의 말씀마다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어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가슴이 뜨거워지고, 감동을 받고 주먹을 불끈 쥐게 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것은 전부가 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구절구절마다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성경을 풀어 가르칠 때 그때 선포되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찾아와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아담을 찾아오셔서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신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오디 있느냐?” 오늘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생사화복 모든 것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좌우됩니다. 아담 하와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 때 참 행복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만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갈 때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듬뿍 받았고 모든 것에 만족과 기쁨을 누렸습니다. 부부관계도 좋았고 자연과의 관계도 좋았습니다. 모든 것이 아름답고 좋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아담 하와는 그때부터 하나님을 슬슬 피하게 되고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두렵고 무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찾아오는 것조차 싫었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깨어지니까 모든 것이 뒤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아직 에덴동산에 살고 있었지만 더 이상 기쁨이나 만족이 없습니다. 낙원에 있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불안하고 두려웠습니다. 자기 심령에도 고통이 찾아오고, 부부관계도 깨어지고 자연과의 관계도 파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상태에 있는 아담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아담을 부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에 담긴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1. 아담을 부르신 하나님
첫째. 아담의 영적인 상태를 깨우치는 질문.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이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 자신이 자신의 영적인 상태와 영적인 위치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것을 보셨고,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피하는 것을 보셨고, 무화과나무 뒤에 숨어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다 보시고 아시면서도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신 것은 좀 더 깊은 의도가 숨어있는 질문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는 ‘너는 지금 네가 있을 자리에 있느냐? 네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느냐? 왜 너는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느냐? 하나님 없이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하고 한 선악과를 왜 먹었느냐? 그런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선악과 따먹고 얼마나 행복해졌느냐?' ‘네가 왜 그렇게 초라해졌느냐? 네가 왜 그렇게 불행해졌느냐? 네가 왜 그렇게 고생덩어리가 됐느냐? 네가 왜 그렇게 죽을 지경에 빠졌느냐?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 때도 그렇게 불행하더냐?’ 이런 의미가 담긴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수천 년 전 아담에게 한 것이지만, 성경 말씀을 통해서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유명한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다가 재산을 다 낭비하고 비로소 궁핍해졌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 나라에 크게 흉년들어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돼지우리 옆에서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돼지가 먹는 쥐염 열매로 배를 채웁니다. 그리고 돼지 주인에게 구박을 받으며 눈물을 흘리면서 살아갑니다. 잠을 못 자고 고민을 해도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가 돼지우리 옆에서 이런 신세타령을 합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탕자가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가 왜 돼지우리 곁에서 살아야 되고, 그가 왜 돼지가 먹는 쥐염 열매를 먹어야 되고, 그가 왜 돼지 주인에게 구박 받으면서 사는 신세가 되었습니까? 근원을 따지고 올라가 보면 아버지와 관계를 끊어버리고, 아버지 집을 떠난 거기에서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탕자의 모든 고난과 모든 문제는 그가 아버지 집을 떠났기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근본문제는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직장입니까? 이웃이 문제입니까? 친구가 문제입니까? 부모가 문제입니까? 자녀가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는 생수의 근원 되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딸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아버지를 멀리 떠나 하나님 없이 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전도서를 보면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수고가 헛되다고 했습니다. 해 아래서 즉 하나님 없이 하는 모든 것이 다 헛되다는 의미입니다. 인생의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돌아보고 자신의 영적인 위치를 바로 찾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아담의 회개를 촉구하시는 질문. 10절에 보면 아담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다음에 두려워하여 무화과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아담은 범죄한 후 양심의 가책이 있었고 마음에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무화과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그는 양심의 가책을 억누르고 죄를 숨기려고 하였습니다. 그런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물었습니다.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아담의 죄를 찾아내시고 회개하라고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는 윤리적인 것이나 도덕적인 것보다 더 근본적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죄라는 단어를 히브리 원어로는 “하말티아”라고 하는데 그 뜻은 ‘과녁을 못 맞추었다. 빗나갔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가 삐뚤어지니까 그 결과로 모든 잘못된 행동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어 있는 것’을 죄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나오는 모든 행동은 다 죄악 된 결과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도덕적인 죄, 윤리적인 죄는 다 하나님을 떠난 결과입니다. 예레미야 2:13에 생수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이 죄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2:19에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그가 하는 모든 일과 행동이 다 죄입니다.
따라서 회개의 개념도 다릅니다. 죄인이니까 죄를 짓습니까?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입니까? 아담은 죄를 지었으니까 죄인이지만 우리는 죄인이니까 죄를 짓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나서 평생 죄를 짓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어 있으니까 죄를 짓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된 회개는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참된 회개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면 하나님이 손해나는 것이 아니라 아담 자신이 죽습니다.
아담의 문제는 나무 뒤에 숨는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나뭇잎으로 치마를 해 입는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아내와 다투지 않고 화해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돈만 많이 벌면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이 진정으로 사는 길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악과를 따 먹고 죽을 수밖에 없는 아담에게 살길을 주시려고 그를 찾아오시고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 길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아모스 5:4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셋째. 아담의 행복을 위한 질문. 하나님께서 인생을 찾아오시는 것만큼 귀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찾아오시는 것이 사랑이고 은혜입니다.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기르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가 고생하는 것 좋아하지 않으시고, 우리가 불행하게 되는 것 원치 않습니다. 우리의 가슴속에 근심과 걱정을 가지고 사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떠나 범죄하고 고민하고 있는 아담에게 찾아오셔서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신 것입니다. 범죄 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가까이 오시는 것이 싫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들을 찾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기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가 드러날까 봐 두렵고 무서웠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고통과 슬픔이 가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믈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들을 괴롭히려고 찾아가셨습니까?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려고 부르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시지 않았다면 그들은 끝없이 방황하다가 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그들에게 죄 용서함을 주시고, 평안을 주시고, 자유를 주시고, 생명을 주시려고 찾아가신 것입니다. 아담 하와를 찾아가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놀라운 복음을 주십니다. 창세기 3:15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여자의 후손으로 보내어 마귀의 머리를 깨뜨리고 구원과 승리를 주실 것을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가죽옷을 입히셨습니다. 가죽옷은 짐승을 죽여서 피를 흘리고 얻을 수 있는 옷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의 생명과 자유와 평안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날마다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2.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실 때는 직접 찾아오셔서 음성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부를 때는 그렇게 부르지 않습니다.
첫째, 양심을 통해 우리를 부르심. 양심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능이며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입니다. 범죄 후에 양심도 타락하고 그 기능이 무디어졌지만 아무튼 하나님께서 창조할 때의 형상의 일부가 남아서 선과 악을 분별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양심을 통해서 하루에도 수백 번, 수천 번씩 우리를 부르십니다.
둘째, 역사와 사건과 환경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심. 하나님의 역사와 섭리는 지난 뒤에 깨닫게 됩니다. 지금 일을 당하고 있을 때는 그것이 좋은 일이든지 나쁜 일이든지 간에 그 속에 하나님의 무슨 메시지가 들어있는지 모르지만 지나고 나면 ‘아하 이 일은 이렇게 하시기 위해서 있었구나. 저 일을 저렇게 하시기 위해서 주셨구나.’하고 깨닫게 됩니다. 언제나 지나간 다음에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 동안 겪은 모든 사건과, 지나간 역사에는 하나님의 교훈과 음성이 분명히 담겨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당하든지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슨 교훈을 하시려고 이 사건을 주셨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바울의 가시(질병) 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욥의 고난 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요나가 만난 폭풍 속에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십시오. 그 속에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숨어있습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를 보십시오. 그 속에 하나님의 교훈이 있습니다.
셋째,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심. 성경의 말씀마다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어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가슴이 뜨거워지고, 감동을 받고 주먹을 불끈 쥐게 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는 것은 전부가 날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구절구절마다 하나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성경을 풀어 가르칠 때 그때 선포되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찾아와 말씀하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아담을 찾아오셔서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신 하나님, 오늘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오디 있느냐?” 오늘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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