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06 주일오전예배 설교(요한복음 5장 1-9절/네가 낫고자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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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0-09-06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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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세 번째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양문이라는 문이 있는데 그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고 하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 은혜의 집, 긍휼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 베데스다 연못 곁에 행각 다섯이 있고 그곳에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맹인들, 다리 저는 사람들,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서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서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물이 움직인 후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다 낫게 된다는 것입니다(4절).
베데스다 연못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오랫동안 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재산을 잃은 사람들, 돌아볼 가족이 없는 사람들, 가난해서 의료혜택을 누릴 수 없는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사실 이들은 가장 소외되고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모인 곳이 베데스다입니다. 그러나 이 베데스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자비의 집이라는 그 이름과는 달리 생존 경쟁이 심한 곳이었습니다. 우리들이 모두 베데스다에 모인 병자들일 수 있습니다. 교회에 모여서 희망을 가지고 우리들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육신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다 병든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나름대로 희망을 가지고 교회에 나와서 은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1. 베데스다의 실상
이렇게 희망을 가지고 모인 베데스다에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베다스다 못으로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4절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7절에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여러분,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들어간 사람은 어떤 병자였을까요? 소경이었을까요? 절뚝발이었을까요? 혈기마른 자였을까요? 38년된 병자였을까요? 아마도 가장 덜 아픈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왜냐면 중한 병자일수록 연못까지 가기가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베데스다는 치유의 장소이면서도 가장 치유가 필요한 사람은 치유될 수 없는 곳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먼저 들어가야 낫기 때문입니다.
오직 1등만이 살아남는 살벌한 경쟁 원리가 지배하는 곳이 베데스다입니다. 그 경쟁에서 뒤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먼저” 갔다고 말하면서 원망과 불평만 늘어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이 베데스다는 사실 가장 소외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있고, 불쌍한 사람들이 모여 있고, 소외된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까 서로를 가장 잘 배려할 것 같은데 이들 간에도 치열한 경쟁만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가장 자비함이 넘치는 곳이어야 합니다. 죄인들이 찾아올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죄인 중에서도 가장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보면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면 좋아합니까?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교회는 부자들만 모이는 교회도 있고, 어떤 교회는 배운 사람들끼리만 모이고 어울리는 교회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도 “먼저” 나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공을 해도, 복을 받아도, 직분을 받아도, 내가 먼저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합니다.
“나”만 생각하고 이기적으로 살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늘 이기고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십니까? 1등 한 학생이 가장 불안하다고 합니다. 서로 이기려고 경쟁하고 다투다 보니 스트레스가 너무 많습니다. 조금씩 양보하고 함께 잘 사는 세상을 꿈꾸면 좋겠습니다. 또 세상은 다 그런 줄 알고 소망을 주님께 두어야 합니다. 나의 사정을 알아주시고, 도와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낭패와 실망을 당한 사람이라도 주님께 나오면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13장에 보면 롯은 아브라함보다 먼저 좋은 곳을 선택하였습니다. 롯이 먼저 좋은 곳을 골랐습니다. 그리고 롯은 아브라함을 떠났습니다. 롯은 성공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소돔 고모라가 망할 때 롯은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조카 롯에게 우선권을 주고 모든 것을 양보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가나안의 동서남북 모든 것을 보장받습니다. 먼저가 늘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이기심을 벗어나야 우리가 행복해집니다. 내가 먼저 들어가겠다고 발버둥 치다가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갔다고 원망하고 불평한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2. 삼십팔 년 된 병자
5절에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38년 된 병자! 38년 동안이나 병을 앓았으니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습니까? 그의 처지가 참으로 비참합니다. 혼자 일어서지도 못하고, 혼자 걷지도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의사를 찾아다녔을 것이고, 많은 약을 쓰면서 백방으로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치지 못하고 이제 마지막으로 베데스다 연못에 들어가서 병을 고쳐보려고 찾아온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할 것은 38년 된 병자는 누구냐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 병자의 이름도 없고, 병명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병자의 신상 정보가 전혀 없습니다. 당시 실제로 그 병자가 있었고 주님께서 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 사람의 이름이나 병명을 밝히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이 병자를 통해 나를 보게 합니다. 38년 된 병자가 “나” 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가셔서 38년 된 병자 앞에 다가섰습니다. 그곳에는 많은 병자들이 있었지만 주님은 다른 사람은 다 제쳐두고 가장 불쌍한 사람인 38년 된 병자를 찾아가셨습니다. 6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진찰도 하지 않고 어떤 검사도 하지 않았지만 그 병자의 상태를 다 아셨습니다. 주님은 말하지 않아도 다 아시는 분입니다. 병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아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문제도 아십니다. 우리의 형편과 사정도 아시고, 우리의 슬픔과 아픔도 아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의 영적 상태도 아십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의 형편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왜 이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병자가 낫기 원하는 것은 당연한데 왜 이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낫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사람은 너무 오래 병든 상태로 있다 보니 이미 병 낫기를 포기한 것 같습니다. 나을 수 있다는 생각도 다 사라지고, 낫기를 바라는 마음조차 없어진 것 같습니다. 아마도 병을 팔자나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희망을 잃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병자에게 주님은 먼저 희망을 주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낫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고, 주님께서 주실 은혜를 기대하게 만들고, 주님께 소망을 두게 하려고’ 이런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몇 번 해보다 안 되면 낙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도하다가 안 되면 낙심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다가 안 되면 포기합니다. 낫고자 하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나도 고침을 받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수십 년 이렇게 살아왔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아무리 오래된 문제, 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해결하신다는 깨우쳐 주십니다. 주님이 주실 은혜를 기대하고 변화를 기대해야 합니다. 주님께 나올 때마다 “주님 나를 고쳐주십시오.” 기대하며 믿어야 합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었을 때 병자가 대답했습니다. 7절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먼저 생각할 것은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라는 말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탄식을 했습니다. 자기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부축해주고, 조금만 도와주면 못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자기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도 안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그 연못 주변에도 많은 환자들이 모여 있었고, 예루살렘 성 안에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38년 된 병자의 입장에서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 얼마나 사람이 많습니까? 그러나 내가 어려움을 당해서 도움을 요청하려고 보면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친구들이 많고 친척들도 많지만 내가 어려움 당할 때 정말로 나를 도와줄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심지어는 남편이나 아내도 도움이 안될 때가 있습니다. 자식이나 부모도 도움이 안될 때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나의 문제를 해결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나의 죄를 해결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나의 고민을 해결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나를 구원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탄식과 고통을 가지고 있는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실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우리를 치료하실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우리를 살리실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38된 병자 옆에 주님이 찾아오신 것처럼 우리 곁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일어서십시오.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시편 46:1에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와 힘이시니 환난 날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하나님이 우리 힘입니다.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주님이 도와주시면 됩니다. 주님의 말씀이면 다 됩니다.
3.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8-9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주님의 말씀 한마디에 38년 된 병자는 일어났습니다. 그의 오랜 병이 완전히 나았습니다. 그의 무릎이 펴지고, 발목에 힘이 생기고, 걷지 못하던 상태에서 일어나 걸어갔습니다. 주님은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주셨고, 자리를 들고 걸어갈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곧 나아서” 라는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렇게 즉각적으로 이루어지고,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만이 능력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병이 완전히 나아서 힘이 생겼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래된 병자는 병이 나아도 회복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러나 38년된 병자는 즉시 나았고 즉시 회복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병자로 하여금 누워서 앓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병들어 누워있던 자리, 환자 노릇 하던 자리를 치우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놓아두면 또 누울 생각이 나게 되므로 그 자리를 정리하고 치워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은 다음 과거에 죄에 빠져 살던 생활을 다 청산해야 합니다. 죄짓던 환경, 방탕 생활하던 것들 다 버려야 합니다. 건전치 못한 사업, 직장, 환경, 분위기를 걷어치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찾아주셨습니다. 그에게 낫고자 하는 소망을 주시고, 기적을 베풀어 치료해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주님을 만나 고침을 받고 문제 해결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세 번째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명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양문이라는 문이 있는데 그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고 하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 은혜의 집, 긍휼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 베데스다 연못 곁에 행각 다섯이 있고 그곳에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맹인들, 다리 저는 사람들,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서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서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물이 움직인 후에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다 낫게 된다는 것입니다(4절).
베데스다 연못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오랫동안 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재산을 잃은 사람들, 돌아볼 가족이 없는 사람들, 가난해서 의료혜택을 누릴 수 없는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사실 이들은 가장 소외되고 가장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모인 곳이 베데스다입니다. 그러나 이 베데스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자비의 집이라는 그 이름과는 달리 생존 경쟁이 심한 곳이었습니다. 우리들이 모두 베데스다에 모인 병자들일 수 있습니다. 교회에 모여서 희망을 가지고 우리들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육신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다 병든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나름대로 희망을 가지고 교회에 나와서 은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1. 베데스다의 실상
이렇게 희망을 가지고 모인 베데스다에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베다스다 못으로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4절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7절에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여러분,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들어간 사람은 어떤 병자였을까요? 소경이었을까요? 절뚝발이었을까요? 혈기마른 자였을까요? 38년된 병자였을까요? 아마도 가장 덜 아픈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왜냐면 중한 병자일수록 연못까지 가기가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베데스다는 치유의 장소이면서도 가장 치유가 필요한 사람은 치유될 수 없는 곳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먼저 들어가야 낫기 때문입니다.
오직 1등만이 살아남는 살벌한 경쟁 원리가 지배하는 곳이 베데스다입니다. 그 경쟁에서 뒤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먼저” 갔다고 말하면서 원망과 불평만 늘어놓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모습과 비슷합니다. 이 베데스다는 사실 가장 소외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있고, 불쌍한 사람들이 모여 있고, 소외된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까 서로를 가장 잘 배려할 것 같은데 이들 간에도 치열한 경쟁만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교회는 가장 자비함이 넘치는 곳이어야 합니다. 죄인들이 찾아올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죄인 중에서도 가장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이 가장 먼저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보면 큰 죄를 지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면 좋아합니까?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교회는 부자들만 모이는 교회도 있고, 어떤 교회는 배운 사람들끼리만 모이고 어울리는 교회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교회도 “먼저” 나만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공을 해도, 복을 받아도, 직분을 받아도, 내가 먼저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불행하게 합니다.
“나”만 생각하고 이기적으로 살면 행복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늘 이기고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십니까? 1등 한 학생이 가장 불안하다고 합니다. 서로 이기려고 경쟁하고 다투다 보니 스트레스가 너무 많습니다. 조금씩 양보하고 함께 잘 사는 세상을 꿈꾸면 좋겠습니다. 또 세상은 다 그런 줄 알고 소망을 주님께 두어야 합니다. 나의 사정을 알아주시고, 도와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낭패와 실망을 당한 사람이라도 주님께 나오면 소망이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창세기 13장에 보면 롯은 아브라함보다 먼저 좋은 곳을 선택하였습니다. 롯이 먼저 좋은 곳을 골랐습니다. 그리고 롯은 아브라함을 떠났습니다. 롯은 성공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소돔 고모라가 망할 때 롯은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어떻습니까? 조카 롯에게 우선권을 주고 모든 것을 양보했던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가나안의 동서남북 모든 것을 보장받습니다. 먼저가 늘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이기심을 벗어나야 우리가 행복해집니다. 내가 먼저 들어가겠다고 발버둥 치다가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갔다고 원망하고 불평한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2. 삼십팔 년 된 병자
5절에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38년 된 병자! 38년 동안이나 병을 앓았으니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습니까? 그의 처지가 참으로 비참합니다. 혼자 일어서지도 못하고, 혼자 걷지도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병을 고치기 위해 많은 의사를 찾아다녔을 것이고, 많은 약을 쓰면서 백방으로 노력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치지 못하고 이제 마지막으로 베데스다 연못에 들어가서 병을 고쳐보려고 찾아온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할 것은 38년 된 병자는 누구냐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그 병자의 이름도 없고, 병명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병자의 신상 정보가 전혀 없습니다. 당시 실제로 그 병자가 있었고 주님께서 그 사람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 사람의 이름이나 병명을 밝히지 않았을까요? 아마도 이 병자를 통해 나를 보게 합니다. 38년 된 병자가 “나” 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에 가셔서 38년 된 병자 앞에 다가섰습니다. 그곳에는 많은 병자들이 있었지만 주님은 다른 사람은 다 제쳐두고 가장 불쌍한 사람인 38년 된 병자를 찾아가셨습니다. 6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셨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진찰도 하지 않고 어떤 검사도 하지 않았지만 그 병자의 상태를 다 아셨습니다. 주님은 말하지 않아도 다 아시는 분입니다. 병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아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문제도 아십니다. 우리의 형편과 사정도 아시고, 우리의 슬픔과 아픔도 아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의 영적 상태도 아십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의 형편을 다 아시는 주님께서 왜 이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병자가 낫기 원하는 것은 당연한데 왜 이런 질문을 하셨을까요? 낫고자 하는 소망을 가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사람은 너무 오래 병든 상태로 있다 보니 이미 병 낫기를 포기한 것 같습니다. 나을 수 있다는 생각도 다 사라지고, 낫기를 바라는 마음조차 없어진 것 같습니다. 아마도 병을 팔자나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희망을 잃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병자에게 주님은 먼저 희망을 주려고 하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낫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하고, 주님께서 주실 은혜를 기대하게 만들고, 주님께 소망을 두게 하려고’ 이런 질문을 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몇 번 해보다 안 되면 낙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도하다가 안 되면 낙심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다가 안 되면 포기합니다. 낫고자 하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나도 고침을 받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수십 년 이렇게 살아왔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아무리 오래된 문제, 아무리 어려운 문제도 해결하신다는 깨우쳐 주십니다. 주님이 주실 은혜를 기대하고 변화를 기대해야 합니다. 주님께 나올 때마다 “주님 나를 고쳐주십시오.” 기대하며 믿어야 합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었을 때 병자가 대답했습니다. 7절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먼저 생각할 것은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라는 말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탄식을 했습니다. 자기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조금만 부축해주고, 조금만 도와주면 못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자기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도 안 도와준다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그 연못 주변에도 많은 환자들이 모여 있었고, 예루살렘 성 안에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38년 된 병자의 입장에서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에 얼마나 사람이 많습니까? 그러나 내가 어려움을 당해서 도움을 요청하려고 보면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친구들이 많고 친척들도 많지만 내가 어려움 당할 때 정말로 나를 도와줄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심지어는 남편이나 아내도 도움이 안될 때가 있습니다. 자식이나 부모도 도움이 안될 때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없습니다. 나의 문제를 해결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나의 죄를 해결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나의 고민을 해결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나를 구원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탄식과 고통을 가지고 있는 38년 된 병자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도와주실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우리를 치료하실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분은 예수님뿐입니다. 우리를 살리실 분은 오직 예수님뿐입니다. 38된 병자 옆에 주님이 찾아오신 것처럼 우리 곁에는 주님이 계십니다. 주님을 의지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일어서십시오.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시편 46:1에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와 힘이시니 환난 날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하나님이 우리 힘입니다.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주님이 도와주시면 됩니다. 주님의 말씀이면 다 됩니다.
3.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8-9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주님의 말씀 한마디에 38년 된 병자는 일어났습니다. 그의 오랜 병이 완전히 나았습니다. 그의 무릎이 펴지고, 발목에 힘이 생기고, 걷지 못하던 상태에서 일어나 걸어갔습니다. 주님은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주셨고, 자리를 들고 걸어갈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곧 나아서” 라는 단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이렇게 즉각적으로 이루어지고,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오직 주님의 말씀만이 능력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병이 완전히 나아서 힘이 생겼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래된 병자는 병이 나아도 회복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러나 38년된 병자는 즉시 나았고 즉시 회복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병자로 하여금 누워서 앓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것입니다. 병들어 누워있던 자리, 환자 노릇 하던 자리를 치우라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놓아두면 또 누울 생각이 나게 되므로 그 자리를 정리하고 치워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은 다음 과거에 죄에 빠져 살던 생활을 다 청산해야 합니다. 죄짓던 환경, 방탕 생활하던 것들 다 버려야 합니다. 건전치 못한 사업, 직장, 환경, 분위기를 걷어치워야 합니다.
주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찾아주셨습니다. 그에게 낫고자 하는 소망을 주시고, 기적을 베풀어 치료해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주님을 만나 고침을 받고 문제 해결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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