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927 주일오전예배 설교(시편 23편 1-6절/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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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0-09-27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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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3편은 성도들이 가장 사랑하고 가장 많이 암송하는 시입니다. 이 시편 가사로 만든 찬송가도 여럿 있는데 참 은혜롭습니다. 사람이 지을 수 있는 시 가운데 이보다 더 아름답고 위대한 시는 없을 것입니다. 단순하면서도 심오하고 평범하면서도 영감이 넘치는 시입니다. 그냥 읽기만 해도 은혜가 되고 묵상하기만 해도 큰 위로가 됩니다.
1. 나의 목자이신 주님
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양을 치던 목동 다윗은 하나님을 목자로, 자신을 양으로 비유했습니다. “나의 목자”라는 말은 다윗이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삼고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삼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하나님이 멀리 계시는 하나님 아니라 나와 직접적 관계를 맺고 나의 보호자이며 나의 인도자이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양에게 목자란 단순히 풀이나 뜯기고 존재가 아닙니다. 목자는 양과 함께 살면서 양을 먹이고, 돌보고, 기르고, 양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피며 도와주는 것이 목자입니다. 목자는 양을 구원해 주시며, 양을 사랑하고, 양을 위해 모든 것을 아끼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는 다윗은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나는 만족합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사는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우리에게는 가장 즐겁고 만족스러운 순간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을 아무리 많이 가져도 그것은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의 심령을 채우고 우리를 만족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호와를 목자로 모신 사람만 참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양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목자라는 사실입니다. 목자가 없는 양이란 죽음뿐입니다. 목자 없이 양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목자가 있음으로 양이 살고 양이 행복합니다. 양은 방향감각이 없습니다. 집 밖에 내놓으면 스스로 집을 찾아오지 못합니다. 양은 자기 자신을 지키고 보호할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목자가 보호하고 지켜주어야만 합니다.
양은 스스로 먹이를 구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양은 목자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꼴이 아무리 많아도, 물이 아무리 많아도, 집이 아무리 좋아도 목자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양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목자입니다.
따라서 목자 없는 양, 목자를 잃은 양이 가장 불쌍합니다.
시편 34:9-10에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사는 성도,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는 성도에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을 때 법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날마다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양은 좋은 목자를 만날 때 행복할 수 있는 것처럼 인생도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살아야 만족할 수 있습니다.
2. 인도자이신 주님
목자의 하는 일은 양을 인도하는 일입니다(2절, 3절). 목자는 거칠고 급하게 양을 몰아가지 않고 천천히 인도합니다. 양들이 풀을 뜯어 먹으면서 따라올 수 있도록 앞에서 서서히 인도해 가시는 다정한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목자가 앞서가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갑니다. 요한복음 10:4에 보면 목자가 자기 양들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간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으면서 누리는 은혜 중 한 가지는 삶을 인도받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갈 때, 앞이 보이지 않을 때, 갈 길을 찾을 수 없을 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그럴 때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목자 되시는 주님의 인도를 받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을 어떻게 살았습니까?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를 받았습니다. 느헤미야 9:19에 “주께서는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이 그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길을 인도하며 밤에는 불기둥이 그들이 갈 길을 비추게 하셨사오며” 느헤미야 9:21에 “사십 년 동안 들에서 기르시되 부족함이 없게 하시므로” 여러분의 삶의 인도자는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누구를 따라가며 살고 있습니까? 광야 같은 세상. 사막 같은 곳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데, 물어볼 사람이 없고, 인도받을 사람이 없다면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마태복음 9:36에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첫째,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십니다(2절). 이스라엘은 대부분 풀이 없는 사막입니다. 그런데 목자가 푸른 풀밭으로 인도합니다. 푸른 풀밭은 양들이 먹기에 좋은 연한 풀들이 있는 곳이며 먹을 것이 풍부한 곳입니다. 목자가 그곳으로 인도하면 양들은 연한 풀들을 배불리 먹고 푸른 초장에 누워 쉽니다. 에스겔 34:14에 “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리니 그것들이 그 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영적으로는 양들이 먹고 영혼이 살 수 있는 신령한 진리의 말씀으로 인도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와 전통과 세상 초등학문은 영혼을 살리지 못하고 만족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목자이신 하나님은 우리 성도의 영혼이 주리지 않도록 영양가 높은 진리의 말씀으로 먹이고 기르십니다. 요한복음 6:35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둘째,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쉴 만한 물은 천천히 흐르는 물이므로 양들이 마시기에 편하고 유익한 것입니다. 빠르지도 않고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이 아니기 때문에 두렵지도 않고 빠질 염려도 없습니다. 이 물은 마르지 않고 늘 풍부합니다. 양들은 이 물가에서 물을 마시고 쉼을 얻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생명의 역사를 비유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4:14에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양들이 목자에게서 풀을 얻고 마실 물도 얻는 것처럼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풍성한 은혜로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3절에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죄로 인하여 죽었던 영혼을 다시 살리고, 약하여 피곤해질 때마다 새 힘을 주십니다. 그리고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의의 길’이란 곧은 길, 바른길, 믿음의 길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길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하나님의 양입니다. 양들이 잘못되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집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성도를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3. 보호자이신 주님
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죽음의 골짜기, 즉 살아나올 가망이 없는 절망의 상황을 의미합니다. 이런 죽음의 골짜기는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나고 싶지도 않고, 지나가고 싶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일생에는 이런 고난의 시기가 많았습니다. 언제나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인생은 파란만장했습니다. 죽음의 위협을 느낀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은 참 고난을 많이 당했습니다. 죽음의 위험도 많았습니다. 양을 치면서 곰이나 사자와 싸워야 했습니다. 젊을 때는 불레셋의 거인 골리앗과 싸웠습니다. 사울 왕에게 죽을 뻔한 것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미친 척하고 겨우 살아난 적도 있습니다. 압살롬의 반역으로 죽을 뻔한 일도 있습니다. 다윗은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피해 가지 못했습니다.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우회해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그 골짜기 안으로 들어갔고, 그 골짜기 속을 걸었습니다. “다닐지라도” 그 골짜기 안에서 걸어다녔습니다. 참으로 위험하고 무서운 곳인데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다윗이 걸어가고 있는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주님이 찾아오시고 함께해주셨습니다. 다윗은 그 죽음의 골짜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자기를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자기 곁에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자기를 항상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깨달았습니다. 다윗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졌을 때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사자의 입을 봉하고 자기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풀무불 속에 들어가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했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나는 그런 날들이 있습니다.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고 암담하고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빠진 것처럼 무섭고 절망적이고 슬플 때가 있습니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재난과 질병과 사고와 코로나까지 겹쳐서 어렵고 힘든 상황입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주께서 나와 함께하시고 나를 안위하십니다.
이사야 43:2에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여기 보면 “물 가운데 지날 때” “불 가운데로 지날 때”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그런 곳을 지나가는 순간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그래서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 타지도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물속이라도 불속이라도 하나님 함께 하시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8:20에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히브리서 13:5에 보면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이 말씀이 얼마나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까?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다녀도 주님께서 함께하시면 겁날 것이 없습니다. 비바람이 치고 폭풍우가 몰려와도 성도들은 평안과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4. 승리자이신 주님
5절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기 ‘상을 차려주신다’는 말은 잔치상을 차려준다는 의미로 연회를 베풀어주신다는 뜻입니다. 주께서 상을 차려 주시는데 그것도 원수를 이기고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승리의 잔치를 베풀어주십니다. 시편 42편에 보면 원수들은 다윗에게 “너희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하면서 종일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다윗은 그럴 때마다 눈물로 음식을 삼고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환난을 당하고 핍박 중에 지내던 다윗이 마침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고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당시는 연회에서 귀빈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풍속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핍박받던 다윗을 연회에 귀빈처럼 대우하고 영광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것은 마음에 기쁨이 넘친다는 뜻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와 감격이 넘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 차고,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넘치기를 바랍니다. 세상 것들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참된 만족이 없고, 아무리 채우려고 해도 더욱 공허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기쁨의 잔이 넘칩니다.
5. 안식주시는 주님
6절에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선하심’이라는 말은 우리를 선하게 대우하고 유익하게 해주시는 것을 가리키고 ‘인자하심’이란 사랑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받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앞날을 내다봅니다. 양들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은 평생토록 계속됩니다. 다윗은 이처럼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여기 우리의 평생을 향하신 여호와의 인도와 사랑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를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까?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다윗은 천국을 여호와의 집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집처럼 편안하고 좋은 곳이 어디 있습니까? 집은 평안한 안식처입니다. 더구나 천국은 여호와 하나님의 집입니다. 생명과 기쁨이 넘치는 여호와의 집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소망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여러분은 영원한 미래를 누구와 함께 보내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십니까?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막연하게 상상하지 말고 다윗처럼 나의 목자로 삼고 친밀하게 사귀시기 바랍니다. 하루하루 목자 되시는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면서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시편 23편은 성도들이 가장 사랑하고 가장 많이 암송하는 시입니다. 이 시편 가사로 만든 찬송가도 여럿 있는데 참 은혜롭습니다. 사람이 지을 수 있는 시 가운데 이보다 더 아름답고 위대한 시는 없을 것입니다. 단순하면서도 심오하고 평범하면서도 영감이 넘치는 시입니다. 그냥 읽기만 해도 은혜가 되고 묵상하기만 해도 큰 위로가 됩니다.
1. 나의 목자이신 주님
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양을 치던 목동 다윗은 하나님을 목자로, 자신을 양으로 비유했습니다. “나의 목자”라는 말은 다윗이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삼고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삼고 산다는 것은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하나님이 멀리 계시는 하나님 아니라 나와 직접적 관계를 맺고 나의 보호자이며 나의 인도자이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양에게 목자란 단순히 풀이나 뜯기고 존재가 아닙니다. 목자는 양과 함께 살면서 양을 먹이고, 돌보고, 기르고, 양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살피며 도와주는 것이 목자입니다. 목자는 양을 구원해 주시며, 양을 사랑하고, 양을 위해 모든 것을 아끼지 않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는 다윗은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말은 “나는 만족합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사는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우리에게는 가장 즐겁고 만족스러운 순간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을 아무리 많이 가져도 그것은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는 우리의 심령을 채우고 우리를 만족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여호와를 목자로 모신 사람만 참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양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목자라는 사실입니다. 목자가 없는 양이란 죽음뿐입니다. 목자 없이 양이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목자가 있음으로 양이 살고 양이 행복합니다. 양은 방향감각이 없습니다. 집 밖에 내놓으면 스스로 집을 찾아오지 못합니다. 양은 자기 자신을 지키고 보호할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목자가 보호하고 지켜주어야만 합니다.
양은 스스로 먹이를 구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양은 목자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꼴이 아무리 많아도, 물이 아무리 많아도, 집이 아무리 좋아도 목자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양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목자입니다.
따라서 목자 없는 양, 목자를 잃은 양이 가장 불쌍합니다.
시편 34:9-10에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사는 성도,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는 성도에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을 때 법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날마다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양은 좋은 목자를 만날 때 행복할 수 있는 것처럼 인생도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살아야 만족할 수 있습니다.
2. 인도자이신 주님
목자의 하는 일은 양을 인도하는 일입니다(2절, 3절). 목자는 거칠고 급하게 양을 몰아가지 않고 천천히 인도합니다. 양들이 풀을 뜯어 먹으면서 따라올 수 있도록 앞에서 서서히 인도해 가시는 다정한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목자가 앞서가면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라갑니다. 요한복음 10:4에 보면 목자가 자기 양들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간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으면서 누리는 은혜 중 한 가지는 삶을 인도받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갈 때, 앞이 보이지 않을 때, 갈 길을 찾을 수 없을 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을 때, 그럴 때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목자 되시는 주님의 인도를 받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을 어떻게 살았습니까?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를 받았습니다. 느헤미야 9:19에 “주께서는 주의 크신 긍휼로 그들을 광야에 버리지 아니하시고 낮에는 구름 기둥이 그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길을 인도하며 밤에는 불기둥이 그들이 갈 길을 비추게 하셨사오며” 느헤미야 9:21에 “사십 년 동안 들에서 기르시되 부족함이 없게 하시므로” 여러분의 삶의 인도자는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누구를 따라가며 살고 있습니까? 광야 같은 세상. 사막 같은 곳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데, 물어볼 사람이 없고, 인도받을 사람이 없다면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마태복음 9:36에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첫째,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십니다(2절). 이스라엘은 대부분 풀이 없는 사막입니다. 그런데 목자가 푸른 풀밭으로 인도합니다. 푸른 풀밭은 양들이 먹기에 좋은 연한 풀들이 있는 곳이며 먹을 것이 풍부한 곳입니다. 목자가 그곳으로 인도하면 양들은 연한 풀들을 배불리 먹고 푸른 초장에 누워 쉽니다. 에스겔 34:14에 “좋은 꼴을 먹이고 그 우리를 이스라엘 높은 산에 두리니 그것들이 그 곳에 있는 좋은 우리에 누워 있으며 이스라엘 산에서 살진 꼴을 먹으리라”
영적으로는 양들이 먹고 영혼이 살 수 있는 신령한 진리의 말씀으로 인도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와 전통과 세상 초등학문은 영혼을 살리지 못하고 만족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목자이신 하나님은 우리 성도의 영혼이 주리지 않도록 영양가 높은 진리의 말씀으로 먹이고 기르십니다. 요한복음 6:35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둘째,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쉴 만한 물은 천천히 흐르는 물이므로 양들이 마시기에 편하고 유익한 것입니다. 빠르지도 않고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이 아니기 때문에 두렵지도 않고 빠질 염려도 없습니다. 이 물은 마르지 않고 늘 풍부합니다. 양들은 이 물가에서 물을 마시고 쉼을 얻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생명의 역사를 비유한 것입니다. 요한복음 4:14에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양들이 목자에게서 풀을 얻고 마실 물도 얻는 것처럼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풍성한 은혜로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3절에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죄로 인하여 죽었던 영혼을 다시 살리고, 약하여 피곤해질 때마다 새 힘을 주십니다. 그리고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의의 길’이란 곧은 길, 바른길, 믿음의 길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길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컫는 하나님의 양입니다. 양들이 잘못되면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집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성도를 의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3. 보호자이신 주님
4절에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죽음의 골짜기, 즉 살아나올 가망이 없는 절망의 상황을 의미합니다. 이런 죽음의 골짜기는 누구도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나고 싶지도 않고, 지나가고 싶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일생에는 이런 고난의 시기가 많았습니다. 언제나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의 인생은 파란만장했습니다. 죽음의 위협을 느낀 것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은 참 고난을 많이 당했습니다. 죽음의 위험도 많았습니다. 양을 치면서 곰이나 사자와 싸워야 했습니다. 젊을 때는 불레셋의 거인 골리앗과 싸웠습니다. 사울 왕에게 죽을 뻔한 것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미친 척하고 겨우 살아난 적도 있습니다. 압살롬의 반역으로 죽을 뻔한 일도 있습니다. 다윗은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피해 가지 못했습니다.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우회해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그 골짜기 안으로 들어갔고, 그 골짜기 속을 걸었습니다. “다닐지라도” 그 골짜기 안에서 걸어다녔습니다. 참으로 위험하고 무서운 곳인데 다윗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다윗이 걸어가고 있는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주님이 찾아오시고 함께해주셨습니다. 다윗은 그 죽음의 골짜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자기를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자기 곁에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 자기를 항상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깨달았습니다. 다윗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굴에 던졌을 때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사자의 입을 봉하고 자기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체험했습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풀무불 속에 들어가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했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만나는 그런 날들이 있습니다.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고 암담하고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빠진 것처럼 무섭고 절망적이고 슬플 때가 있습니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재난과 질병과 사고와 코로나까지 겹쳐서 어렵고 힘든 상황입니다. 이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주께서 나와 함께하시고 나를 안위하십니다.
이사야 43:2에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여기 보면 “물 가운데 지날 때” “불 가운데로 지날 때”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같은 그런 곳을 지나가는 순간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그래서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 타지도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물속이라도 불속이라도 하나님 함께 하시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28:20에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히브리서 13:5에 보면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이 말씀이 얼마나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까?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아다녀도 주님께서 함께하시면 겁날 것이 없습니다. 비바람이 치고 폭풍우가 몰려와도 성도들은 평안과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4. 승리자이신 주님
5절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기 ‘상을 차려주신다’는 말은 잔치상을 차려준다는 의미로 연회를 베풀어주신다는 뜻입니다. 주께서 상을 차려 주시는데 그것도 원수를 이기고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승리의 잔치를 베풀어주십니다. 시편 42편에 보면 원수들은 다윗에게 “너희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 하면서 종일 조롱하고 비웃었습니다. 다윗은 그럴 때마다 눈물로 음식을 삼고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환난을 당하고 핍박 중에 지내던 다윗이 마침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고 원수들 앞에서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당시는 연회에서 귀빈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풍속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핍박받던 다윗을 연회에 귀빈처럼 대우하고 영광을 누리게 하신 것입니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것은 마음에 기쁨이 넘친다는 뜻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와 감격이 넘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 차고,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넘치기를 바랍니다. 세상 것들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참된 만족이 없고, 아무리 채우려고 해도 더욱 공허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기쁨의 잔이 넘칩니다.
5. 안식주시는 주님
6절에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선하심’이라는 말은 우리를 선하게 대우하고 유익하게 해주시는 것을 가리키고 ‘인자하심’이란 사랑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받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하면서 믿음으로 앞날을 내다봅니다. 양들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은 평생토록 계속됩니다. 다윗은 이처럼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체험하며 살았습니다. 여기 우리의 평생을 향하신 여호와의 인도와 사랑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평생에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를 것이라는 확신이 있습니까?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다윗은 천국을 여호와의 집이라고 묘사했습니다. 집처럼 편안하고 좋은 곳이 어디 있습니까? 집은 평안한 안식처입니다. 더구나 천국은 여호와 하나님의 집입니다. 생명과 기쁨이 넘치는 여호와의 집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소망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여러분은 영원한 미래를 누구와 함께 보내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십니까? 여호와를 나의 목자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막연하게 상상하지 말고 다윗처럼 나의 목자로 삼고 친밀하게 사귀시기 바랍니다. 하루하루 목자 되시는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면서 여호와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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