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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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1 주일오전예배 설교(시편 73편 1-14절/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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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0-10-11 15:18 조회1,1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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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https://youtu.be/_fZkj4dbuEo

이 시편에는 “아삽의 시”라는 설명이 붙어있습니다. 아삽은 다윗 시대에 성전에서 찬송하는 일을 담당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신앙생활 하다가 이해가 안 되고, 납득이 안가는, 그래서 큰 시험에 빠질 뻔한 일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1절에 보면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는 분인데 그것을 잘 모르고 오해하여 시험에 들뻔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착하고 의로운 사람, 하나님을 잘 믿는 성도에게 복을 주시고 악인을 벌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깨달음이고 올바른 신앙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이유이고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2절에 보면 그가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다는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함 때문입니다.

1. 아삽의 고민과 갈등
첫째, 악인의 형통함 때문입니다. 3절에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아삽이 악인이 형통함을 보면서 갈등이 생겼습니다. 악인의 오만함을 보면서 질투심이 생겼습니다. 이런 형통함과 평안은 하나님을 잘 믿는 자들 즉 의인들이 받아 누려야 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것을 악인들이 누리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했습니다. 이때 그의 믿음이 흔들렸습니다.
4-7절에 보면 그들은 악인이면서도 건강하게 살고,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이 평안히 죽습니다. 죽을 때라도 벌 받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그러면 그렇지 그렇게 악을 행하더니 결국은 벌을 받는구나’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악인들은 누구나 다 당하는 고통을 당하지 않을뿐더러 죽을 때도 고통 없이 평안히 죽습니다. 그것이 이해가 안되는 것입니다. 악인 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과 같은 환난도 없고 재앙이 없습니다. 교만을 목걸이처럼 자랑거리로 알고 나갑니다. 날마다 강포로 옷 입는 것처럼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하며 살아갑니다. 눈두덩이가 튀어나와 보일 정도로 피둥피둥하게 살찌고, 끝없이 욕심을 부리고 악을 행하면서도 벌도 받지 않고 평안하게 잘 지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일이 더 잘되고 돈은 많이 법니다.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8-9절에 보면 그 악인들은 다른 사람을 능욕하고 악하게 말합니다. 자신은 높은 사람인 듯 행세하고 다른 사람은 낮은 사람인 것처럼 무시하며 거만하게 말합니다. 의로운 사람을 압제하고 핍박합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대적합니다. 자기를 하늘과 같이 높이고 자랑합니다. 거침없이 다른 사람들을 비방하고 훼방합니다.
10-11절에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여기서 “물”은 악인의 사상과 교훈을 의미합니다. 악인들은 사람들을 향해 자기의 악한 교훈을 생명수나 되는 것처럼 떠들어댔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말을 받아들이고 따라갑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악인들을 추종하는 것은 그들이 현실에서 번영하고 부와 권세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교만하고 포악한 자들이 많이 생겨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하면서 거침없이 하나님을 멸시하며 비방하는 말을 합니다. 아삽은 하나님께서 왜 이런 악인들을 벌하지 않고 가만히 두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둘째, 의인의 고난 때문입니다. 13절에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아삽은 마음에 욕심을 품지 않고 악한 마음을 갖지 않았습니다. 깨끗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다른 사람을 해치는 그런 악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지키려고 애쓰고 욕심부리지 않고 나쁜 짓 하지 않고, 착하고 선하게 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결과가 다 헛되고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14절에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아삽은 복은커녕 어려운 일만 더 많이 생겼습니다. 그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습니다. 아삽은 이러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하며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아삽은 이렇게 묻고 싶었습니다. ‘악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평안하고 잘사는데, 나는 경건하고 의롭게 살아보려고 애쓰는데 왜 나에게는 보상이 없습니까? 왜 나는 끊임없이 고난을 당해야 합니까? 왜 내 생활은 어려움과 고난만 계속됩니까? 하나님, 과연 그렇다면 신앙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경건하게 살고 의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다 헛된 일이 아닙니까?’ 이러한 문제와 갈등 속에서 아삽은 마음이 흔들리고 신앙이 무너질 것 같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항의하고 따지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는구나 깨닫는 때가 있고, 반면에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드는 순간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상을 보면서 이런 갈등이나 고민이 없습니까? 그러나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이 아삽은 넘어질 뻔했으나 실제로 넘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미끄러질 뻔했으나 진짜 미끄러지지는 않았습니다. 아삽은 이 갈등과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2. 아삽의 고민 해결 방법
첫째. 깊이 묵상하고 신중하게 생각했습니다. 15절에 “내가 그들처럼 말하리라 하였더라면” ‘나도 그들처럼 살아야지 말했다면’ ‘악인들처럼 함부로 말하고 교만하게 말했더라면’ ‘의문과 고민과 갈등이 생겼을 때, 다른 사람에게 자기 생각을 다 말하고 교만한 말을 함부로 말했더라면’ 큰 죄를 지을 뻔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주의 아들들의 세대에 대하여 악행을 행하였으리이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 대하여 악을 행하고, 거짓을 말하였을 뻔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의인이 고난받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고 경건하게 사는 것은 다 헛된 일입니다. 죄짓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이 더 형통하고 잘 삽니다.’ 이렇게 말했더라면 자기가 큰 죄를 짓고 말았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는 쉽게 판단하지 않고 단정 짓지 않았습니다.
16절에 “내가 어쩌면 이를 알까 하여 생각한즉 그것이 내게 심한 고통이 되었더니” 아삽은 고민했습니다. 깊이 생각했습니다. 마음에는 번민과 갈등이 사라지지 않았고, 의심과 유혹이 끊임없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 문제를 바르게 이해하고 해답을 얻으려고 노력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쉽게 단정해 버립니다. 너무 경솔히 결론을 내립니다. 내가 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진짜를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일 죽음 이후의 일을 모릅니다. 너무 조급하게 생각해서 일을 그르칩니다. 바로 알지도 못하면서 다 아는 것처럼 말합니다. 아삽처럼 깊이 생각하고 오래 기도하고 신중하게 판단하십시오.

둘째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습니다. 17절에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아삽은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고 갈등하다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그들의 마지막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소는 뭐하는 곳입니까? 하나님께 예배하는 곳이고, 기도하는 곳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곳입니다. 아삽은 성소에서 기도하고 말씀을 듣다가 깨달았습니다.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삽이 갈등하면서도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회의가 느껴지고, 번민이 생길 때에도 하나님의 성소에 나갔습니다. 그가 번민과 갈등의 순간에 다른 곳으로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삽은 다른 데로 가지 않고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도 마음에 회의가 일어날 때, 신앙이 갈등이 생길 때,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시편 20:1-2에 “환난 날에 여호와께서 네게 응답하시고 야곱의 하나님의 이름이 너를 높이 드시며 성소에서 너를 도와주시고 시온에서 너를 붙드시며” 지금도 하나님은 성소에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성소에서 은혜를 주십니다.

3. 아삽이 깨달은 해답
첫째 악인의 결국을 깨달았습니다. 18-19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악인을 미끄러운 곳에 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파멸에 던진다는 것입니다. 악인은 결국 망한다는 것입니다. 악인은 어찌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지 놀랄 정도로 전멸했다고 말합니다. 악인은 일시적으로 형통하지만 그러나 끝까지 가보면 결국은 파멸하고 갑자기 망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악인에게는 진정한 의미에서 미래가 없습니다. 악인들의 미래에는 심판과 재앙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토록 좋게만 보였던 악인들의 삶이 참된 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20절에 보면 “주께서 깨신 후에”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주님이 일어나 심판한다는 뜻입니다. 악인이 형통하고 성도가 고난 받을 때는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고, 주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한동안 가만히 두고 보시다가 일어나 갑자기 심판하십니다.
전도서 8:11~13에 “악한 일에 관한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아니하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는 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 성경은 악인의 형통함을 복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죄라고 말합니다. 잠언 21:4에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이 형통한 것은 다 죄니라.” 야고보서 5:1에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으로 말미암아 울고 통곡하라” 그러므로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할 것 없다고 말씀합니다. 시편 37:1-2에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 그들은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당할 것이며 푸른 채소 같이 쇠잔할 것임이로다”
이렇게 깨달은 아삽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21-22절에 보면 마음이 산란했습니다. 양심이 찔렸습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부러워하며 따르려고 했던 자신에 대해서 가책과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잠시이기는 하지만 악인들의 형통함을 보고 미혹되어 그들처럼 살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아삽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우매하고 미련한 존재인지를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마치 하나님 앞에서 미련한 짐승처럼 느껴졌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그는 지금 미련한 짐승처럼 악인과 하나가 되어 불법과 폭력을 휘두르면서, 자기를 자랑하며 거만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둘째, 의인의 결국도 깨달았습니다. 23-24절에서 아삽은 믿음을 지키는 성도가 어떻게 되는지 그 결국도 깨달았습니다. a)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참된 복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b)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하나님이 성도의 오른손을 붙들고 인도하시면 얼마나 안전하겠습니까? c)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의로운 말씀으로 깨우치고 교훈하시며 올바른 생명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d)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얼마나 큰 영광인지, 얼마나 놀라운 상급인지, 우리는 상상할 수도 없는 좋은 것입니다. 세상을 사는 동안 주께서 평생 함께하시고 인도해 주시다가 죽은 후에서 천국의 영광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결론: 그러므로 성도들은 현재의 고난과 핍박 속에서 믿음을 지키면서 미래에 주어질 영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성도에게 참된 미래가 있고 참된 소망이 있습니다. 저 천국에 성도를 위해 예비하신 상급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믿음 지키고 의롭게 산 것에 대해서 후에는 영광으로 영접해주실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그들의 분 깃을 받지만 성도는 천국에 가서 상급을 받습니다. 시편 17:14에 “여호와여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아이들에게 물려주는 자니이다”
25-26절에 아삽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주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믿고 소망할 분은 오직 하나님뿐임을 깨달았습니다. 27-28절에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 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다 멸하셨나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다” 어떤 이유로든지 주님을 멀리하고 떠나는 것은 망하는 것입니다. 아삽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진정한 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이 자신과 가까이 계시며 선한 분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 가까이하여 그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사는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아삽의 믿음은 더 견고해지고 마음에 큰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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