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22 주일오전예배 설교(마태복음 11장 16-24절/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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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0-11-22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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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이 세대에 대해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내용을 한마디로 말하면 감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감각이 없다는 것은 신경세포가 죽었거나 마비되었다는 뜻입니다. 감각이 전혀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산 사람은 누구나 의식이 있고 감각이 있습니다. 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것 다 감각이 살아있어야 가능합니다. 성도는 영적인 감각이 살아서 영적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슬퍼하고 애통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대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죄악에 물들었고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 반응이 없는 무감각한 세대요 심령이 어두워지고 감각이 둔해져서 분별을 못하는 세대라는 것입니다.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음
16-17절에 보면 주님은 아이들이 장터에서 놀이하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한 편에서 피리를 불면 그에 따라 상대편 아이들이 일어나서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함께 즐거워해야 하고, 슬피 울면 사람이 죽은 것처럼 가슴을 치며 애곡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서로 장단을 맞추고 흥을 돋우고 반응을 보여야 신나게 놀 수 있는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이 세대 사람들은 기쁜 일이 있어서 기뻐하지 않고 슬픈 일이 있어도 애곡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고 진심이 통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주님의 답답한 심정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아무 감정이 통하지 않는 냉소적인 세상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첫째, 복음을 듣고도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라는 뜻인데,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죄인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죄인을 구원해준다는 이 소식이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누가복음 2:10에 보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을 전한다고 하시고는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전합니다. 즉 예수님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최우선적이고 영원한 복음입니다. 모든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복음입니다. 모든 인류에게 최고의 기쁜 소식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죄인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고통과 불행은 죄 때문입니다. 죄로 인하여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죄 때문에 죽게 되었습니다. 죄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죄 때문에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절망에 빠진 죄인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죄에서 해방시키고 우리에게 자유와 평안을 주셨습니다. 죄인들에게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소식입니까? 그런데 실제 예수님이 오셔서 이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했지만 사람들은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큰 은혜를 받고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에 “감사치 아니하며” 디모데후서 3:2에 “감사치 아니하며”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도 감사치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다. 43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해방시켜 주시고, 광야 생활 40년 동안 이적과 능력으로 인도해주시고, 날마다 기적의 양식을 먹이고 은혜의 물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기는커녕 항상 원망과 불평뿐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럼에도 감사가 없다면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것입니다.
2.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아니함
17절에 보면 초상집에 가면 상주들이 슬퍼하며 웁니다. 그 슬퍼하며 우는 소리를 들을 때 함께 슬퍼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무감각한 이 세대는 슬픈 일을 슬퍼할 줄 모릅니다. 애통해야 할 때 애통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슬픈 일을 당해도 슬퍼하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죄를 짓고도 회개치 않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양심에 찔림이 있고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남들 앞에 부끄럽고 창피합니다. 그런데 이 세대 사람들은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가슴을 치지 않습니다. 자기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슬퍼합니다. 그런데 정작 죄지은 사람은 슬퍼하지도 않고 눈물을 흘리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죄를 즐거워합니다. 잠언 14:9에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 죄 때문에 슬퍼하고 탄식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양심이 살아있고 영혼이 깨어 있는 사람은 죄 때문에 슬퍼하며 탄식합니다.
둘째, 책망을 받고도 회개치 않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아주 심하게 책망한 말씀이 나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하면서 7번이나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책망을 듣고 회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미워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습니다. 정말로 애통해하며 회개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날 이 세대도 그렇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악할 수가 없습니다. 죄인들이 의인을 에워싸고 정의를 굽게 만듭니다. 잘못을 지적하면 부끄러워하거나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했다고 지적한 사람을 고소합니다. 양심이 화인 맞아 회개가 없는 세대입니다.
3. 바로 분별하지 못함
이 세대는 다른 사람을 비판만 하고 자기의 죄에 대해서는 회개하지 않는 세대입니다. 깨닫는 것도 없고 분별하는 것도 없습니다.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고 옳은 것을 다 버립니다.
첫째,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귀신이 들렸다 했습니다(18절).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생활하면서 옷은 약대 털옷을 입었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금욕생활과 절제 생활을 했습니다. 그 세례요한이 말씀을 전하면서 주의 길을 예비하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기는커녕 그 요한을 귀신들렸다고 하면서 비난했습니다. 세례요한의 절제생활, 금욕생활, 기도생활, 경건생활을 본받으려고 하지 않고 귀신들렸다고 비난만 한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먹고 마시자 예수님도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같이 금욕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40일 금식 기도한 적은 있지만 항상 그렇게 살지는 않았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죄인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때로는 전도하기 위해서 세리와도 어울리고 창기에게도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세리 마태가 회개하고 제자가 된 후 예수님을 모시고 잔치를 베풀 때 주님은 그 집에 가서 먹고 마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향해서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라고 비난하면서 정죄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나 악해졌습니다. 염치나 윤리나 예의나 상식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나타나는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기뻐하며 춤을 추거나 아니면 탄식하며 우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으면 기뻐하며 춤을 추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죄가 깨달아지면 탄식하며 울어야 합니다. 그런데 비난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해도 비난하고 저렇게 해도 비난합니다. 좋은 것도 자주 보면 좋은 줄 모르는 무감각에 빠집니다. 나쁜 것도 자꾸 하다 보면 나쁜 줄 모르고 계속합니다. 좋은 것을 보면서 좋다고 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악한 것은 슬퍼하고 멀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감각이 마비된 자들은 기뻐하지도 못하고 슬퍼하지도 못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영적 감각이 죽는 것입니다. 무덤덤해지는 것입니다. 예배의 감격도, 구원의 기쁨도, 회개의 눈물도 말라버리는 것입니다.
4. 지혜로 옳다 함을 얻지 못함
19절에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말씀인 지혜는 행하여 봐야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7:17에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그 말씀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아닌지 분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말씀을 잘못 전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성도들이 진리의 말씀을 행해야 옳다 함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이 말씀을 아무리 많이 알고 아무리 귀한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도 행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달았다면 행해야 합니다. 믿음을 가졌다면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인정을 받고 옳다 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나의 행함으로 진리를 드러내고 나의 행함으로 예수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5.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을 책망하심
예수님께서 3년 반의 공생애를 사역을 하시면서 특별히 권능을 많이 행한 고을들이 있습니다. 자주 찾아가서 말씀을 전하시고, 많은 이적과 능력을 베풀어 주신 고을들입니다. 그들을 회개시켜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적을 많이 보고도 회개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고을들을 향해서 책망하셨습니다.
첫째. 고라신과 벳새다를 책망하셨습니다. 21-22절에 보면 고라신과 벳새다는 예수님께서 전도를 많이 하신 가버나움에서 가까운 곳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전도도 많이 하고 권능도 많이 베푼 지방이었지만 그 지방 사람들이 회개치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그들의 완악함을 보시고 탄식하시며 책망하신 것입니다. 고라신과 벳새다에서 행한 이적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했다면 그들이 회개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가버나움을 책망하셨습니다 23-24절에 보면 가버나움에 예수님의 집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지방 사람들에게 많은 권능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인 것과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잘 알고 있다고 하면서 육신적인 선입감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행한 권능을 소돔성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회개하였을 것이요, 그 성이 망하지 않고 오늘까지 있었을 것이라고 책망했습니다.
결론: 이런 세대를 가리켜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누가복음 11:29에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하나님을 버리고 떠난 세대가 악한 세대이고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는 세대가 악한 세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고 복을 받지 못하게 될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은 마음이 굳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라도 생명에서 떠나게 됩니다(엡 4:18-19). 감각 없는 자가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두려움이나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행하다가 스스로 망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복을 받을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입니까? 마음이 온유해지고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게 되고 결국 은혜와 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온유하고 부드러워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죄를 찾아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대에 대해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그 내용을 한마디로 말하면 감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감각이 없다는 것은 신경세포가 죽었거나 마비되었다는 뜻입니다. 감각이 전혀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산 사람은 누구나 의식이 있고 감각이 있습니다. 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것 다 감각이 살아있어야 가능합니다. 성도는 영적인 감각이 살아서 영적으로 보고 듣고 느끼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슬퍼하고 애통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대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죄악에 물들었고 예수님에 대해서 아무 반응이 없는 무감각한 세대요 심령이 어두워지고 감각이 둔해져서 분별을 못하는 세대라는 것입니다.
1.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음
16-17절에 보면 주님은 아이들이 장터에서 놀이하는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한 편에서 피리를 불면 그에 따라 상대편 아이들이 일어나서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함께 즐거워해야 하고, 슬피 울면 사람이 죽은 것처럼 가슴을 치며 애곡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서로 장단을 맞추고 흥을 돋우고 반응을 보여야 신나게 놀 수 있는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이 세대 사람들은 기쁜 일이 있어서 기뻐하지 않고 슬픈 일이 있어도 애곡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이 통하지 않고 진심이 통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주님의 답답한 심정을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아무 감정이 통하지 않는 냉소적인 세상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첫째, 복음을 듣고도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복음은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라는 뜻인데,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죄인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죄인을 구원해준다는 이 소식이 가장 기쁜 소식입니다. 누가복음 2:10에 보면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소식을 전한다고 하시고는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전합니다. 즉 예수님이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최우선적이고 영원한 복음입니다. 모든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는 복음입니다. 모든 인류에게 최고의 기쁜 소식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죄인을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인류의 고통과 불행은 죄 때문입니다. 죄로 인하여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죄 때문에 죽게 되었습니다. 죄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죄 때문에 지옥에 떨어져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절망에 빠진 죄인들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죄에서 해방시키고 우리에게 자유와 평안을 주셨습니다. 죄인들에게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소식입니까? 그런데 실제 예수님이 오셔서 이 구원의 복된 소식을 전했지만 사람들은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큰 은혜를 받고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로마서 1:21에 “감사치 아니하며” 디모데후서 3:2에 “감사치 아니하며”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도 감사치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십시다. 430년간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해방시켜 주시고, 광야 생활 40년 동안 이적과 능력으로 인도해주시고, 날마다 기적의 양식을 먹이고 은혜의 물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기는커녕 항상 원망과 불평뿐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럼에도 감사가 없다면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것입니다.
2. 슬피 울어도 가슴을 치지 아니함
17절에 보면 초상집에 가면 상주들이 슬퍼하며 웁니다. 그 슬퍼하며 우는 소리를 들을 때 함께 슬퍼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무감각한 이 세대는 슬픈 일을 슬퍼할 줄 모릅니다. 애통해야 할 때 애통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슬픈 일을 당해도 슬퍼하지 않고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죄를 짓고도 회개치 않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 양심에 찔림이 있고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남들 앞에 부끄럽고 창피합니다. 그런데 이 세대 사람들은 죄를 짓고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가슴을 치지 않습니다. 자기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슬퍼합니다. 그런데 정작 죄지은 사람은 슬퍼하지도 않고 눈물을 흘리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죄를 즐거워합니다. 잠언 14:9에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 죄 때문에 슬퍼하고 탄식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양심이 살아있고 영혼이 깨어 있는 사람은 죄 때문에 슬퍼하며 탄식합니다.
둘째, 책망을 받고도 회개치 않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아주 심하게 책망한 말씀이 나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하면서 7번이나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책망을 듣고 회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미워하여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렸습니다. 정말로 애통해하며 회개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늘날 이 세대도 그렇습니다. 세상이 이렇게 악할 수가 없습니다. 죄인들이 의인을 에워싸고 정의를 굽게 만듭니다. 잘못을 지적하면 부끄러워하거나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했다고 지적한 사람을 고소합니다. 양심이 화인 맞아 회개가 없는 세대입니다.
3. 바로 분별하지 못함
이 세대는 다른 사람을 비판만 하고 자기의 죄에 대해서는 회개하지 않는 세대입니다. 깨닫는 것도 없고 분별하는 것도 없습니다.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고 옳은 것을 다 버립니다.
첫째,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귀신이 들렸다 했습니다(18절).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생활하면서 옷은 약대 털옷을 입었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금욕생활과 절제 생활을 했습니다. 그 세례요한이 말씀을 전하면서 주의 길을 예비하고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기는커녕 그 요한을 귀신들렸다고 하면서 비난했습니다. 세례요한의 절제생활, 금욕생활, 기도생활, 경건생활을 본받으려고 하지 않고 귀신들렸다고 비난만 한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이 먹고 마시자 예수님도 비난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례요한같이 금욕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40일 금식 기도한 적은 있지만 항상 그렇게 살지는 않았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죄인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때로는 전도하기 위해서 세리와도 어울리고 창기에게도 찾아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세리 마태가 회개하고 제자가 된 후 예수님을 모시고 잔치를 베풀 때 주님은 그 집에 가서 먹고 마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향해서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라고 비난하면서 정죄했습니다. 사람들이 너무나 악해졌습니다. 염치나 윤리나 예의나 상식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나타나는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기뻐하며 춤을 추거나 아니면 탄식하며 우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으면 기뻐하며 춤을 추어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죄가 깨달아지면 탄식하며 울어야 합니다. 그런데 비난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해도 비난하고 저렇게 해도 비난합니다. 좋은 것도 자주 보면 좋은 줄 모르는 무감각에 빠집니다. 나쁜 것도 자꾸 하다 보면 나쁜 줄 모르고 계속합니다. 좋은 것을 보면서 좋다고 말하고 즐거워해야 합니다. 악한 것은 슬퍼하고 멀리해야 합니다. 그런데 감각이 마비된 자들은 기뻐하지도 못하고 슬퍼하지도 못합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영적 감각이 죽는 것입니다. 무덤덤해지는 것입니다. 예배의 감격도, 구원의 기쁨도, 회개의 눈물도 말라버리는 것입니다.
4. 지혜로 옳다 함을 얻지 못함
19절에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말씀인 지혜는 행하여 봐야 그것이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7:17에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 그 말씀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아닌지 분별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말씀을 잘못 전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성도들이 진리의 말씀을 행해야 옳다 함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이 말씀을 아무리 많이 알고 아무리 귀한 진리를 깨달았다고 해도 행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깨달았다면 행해야 합니다. 믿음을 가졌다면 경건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인정을 받고 옳다 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나의 행함으로 진리를 드러내고 나의 행함으로 예수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5.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을 책망하심
예수님께서 3년 반의 공생애를 사역을 하시면서 특별히 권능을 많이 행한 고을들이 있습니다. 자주 찾아가서 말씀을 전하시고, 많은 이적과 능력을 베풀어 주신 고을들입니다. 그들을 회개시켜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적을 많이 보고도 회개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고을들을 향해서 책망하셨습니다.
첫째. 고라신과 벳새다를 책망하셨습니다. 21-22절에 보면 고라신과 벳새다는 예수님께서 전도를 많이 하신 가버나움에서 가까운 곳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전도도 많이 하고 권능도 많이 베푼 지방이었지만 그 지방 사람들이 회개치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그들의 완악함을 보시고 탄식하시며 책망하신 것입니다. 고라신과 벳새다에서 행한 이적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했다면 그들이 회개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둘째. 가버나움을 책망하셨습니다 23-24절에 보면 가버나움에 예수님의 집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지방 사람들에게 많은 권능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목수의 아들인 것과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잘 알고 있다고 하면서 육신적인 선입감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행한 권능을 소돔성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회개하였을 것이요, 그 성이 망하지 않고 오늘까지 있었을 것이라고 책망했습니다.
결론: 이런 세대를 가리켜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누가복음 11:29에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하나님을 버리고 떠난 세대가 악한 세대이고 하나님 말씀을 믿지 않는 세대가 악한 세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고 복을 받지 못하게 될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은 마음이 굳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에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라도 생명에서 떠나게 됩니다(엡 4:18-19). 감각 없는 자가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두려움이나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행하다가 스스로 망합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복을 받을 때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입니까? 마음이 온유해지고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게 되고 결국 은혜와 복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이 온유하고 부드러워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죄를 찾아 회개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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