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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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03 수요저녁예배(롬 12:9-21 / 악을 이기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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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4-07-03 21:28 조회33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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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링크 : https://youtu.be/P6yuw_RiyxU?si=pwXT0uNCQqqZ5YUq


구원받은 성도들이 세상 사는 동안 힘쓸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다.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율법의 강령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라고 알려주셨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러나 세상을 보면 온통 미워하고 흠잡고 죽이려고 하는 일들이 가득하다. 흑암과 어두움 속에서 다투고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된다. 사랑은 빛과 생명의 세계이다. 빛이 비추면 어두움이 물러가고, 모든 절망과 갈등이 다 사라진다. 우리 힘으로는 어두움을 이길 수 없지만 빛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 어두움을 다 이기고 물리칠 수 있다. 주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 된다. 사랑에는 신기한 힘과 능력이 있어서 사람을 치유하는 역사가 일어난다. 병을 고치고 고통이 사라지고 새 힘이 생겨서 고난을 이기는 능력이 나온다.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사랑이다. 


9절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 사랑은 진실하고 순수한 것이다. 서로 속이고 이용해 먹으려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참 사랑은 희생하고 주는 것이다. 그래서 거짓이 없이 진실하게 나타난다. 우리가 희생하지 않고 말로만 사랑하면 공허하다. 열매가 없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희생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주셨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 이 사랑이 참 사랑이고 위대한 사랑이다. 우리는 이 사랑을 받았다. 따라서 우리도 이 사랑을 나누고 베풀고 진실한 사랑을 행해야 한다.

사랑의 특징은 악을 미워하고 선을 행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보면서 마귀도 사랑하고 죄도 사랑하고 공산주의도 사랑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렇지 않다. 사랑은 악은 미워하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대적을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고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고 구체적으로 지목하신 것이다. 개인적인 원수, 나를 괴롭히는 원수는 사랑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마귀, 죄, 공산주의는 사랑하면 안된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시 97:10)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악을 미워하고 죄를 멀리 떠나야 한다. 참 사랑은 선을 행하는 것이다. 참 사랑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악을 행할 때 거기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고, 타이르고 권면해서 악을 떠나게 만들어야 한다. 


10절

강조하는 것은 "서로"이다.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라고 했다.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상대방이 사랑하면 나도 사랑해야 되겠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이 사과하면 용서해 주겠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이 먼저 인사하면 나도 인사해야 되겠다고 생각한다. 성경은 내가 먼저 하라고 말씀한다. 먼저 사랑하고 먼저 사과하고 먼서 인사하라고 말씀한다. 어떤 경우는 존경할만해야 존경할 수 있다고 말한다. 존경할 수 없는 자를 어떻게 존경하냐고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사랑할만한 면이 있었을까? 거룩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 죄인을 볼 때 사랑할만한 것이 뭐가 있었겠는가?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털끝 만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먼저 사랑하셨다. 아무 이유없이 일방적으로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셨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먼저 하고 무례하게 하지 말라고 했다. 친하다고 오래 사귀었다고 가깝다고 무례하게 행동하면 상처가 되고 섭섭하고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서로 존경하고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러려면 무례하게 행하지 말아야 한다. 먼저 하라는 말씀을 조금 다르게 적용해볼 수 있다.

“[23]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24]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마 5:23~24)

화해하는 것이 먼저인가? 예물 드리는 것이 먼저인가? 먼저 가서 형제와 화해하라고 했다.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예배는 화해한 가운데, 화목한 가운데 한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하나님과 죄인인 우리를 화목하게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들을 화목하게 해주셨다. 


11절

주님을 위해서 가져야 될 태도를 설명한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라고 했다. 주님을 참 사랑한다면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고 열심을 품고 섬기게 된다. 사람 간에도 사랑하면 열심이 생기고 부지런해 진다. 몸에서 힘이 나온다. 내 몸이 깨어나는 것 같다. 힘든 것도 힘들지 않고 어려운 것도 어렵지 않다. 참 사랑할 때에는 희생을 감수하고 열심을 낸다. 열심이 다 식어버리면 사랑이 식은 것과 같다. 그러면 게으름을 피우게 된다. 게으름을 피우면 죄짓는 일이 많아진다. 사람이 할 일이 없어지면 쓸데 없는 일을 하고 방탕하게 되고 죄를 더 많이 짓게 된다. 그래서 부지런히 일하면 죄지을 기회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부지런하여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말씀한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여 기도하고 복음 전하고 믿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하겠다. 


12절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고 했다. 환난 중에 소망을 갖고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환난이 없을 때 즐거워해야 하고,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라는 것이다. 주님의 구원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라는 말씀이다. 믿는 성도들의 궁극적 소망이 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그 날 우리의 기도를 다 응답하시고 억울한 것을 다 신원하시고 갚아주실 것이다. 모든 수고에 대해서 은혜와 복으로 갚아 주실 것이다. 주님의 재림이 궁극적 소망이다. 부활과 천국과 하늘나라 상급이 소망이다. 이 세상에서 고난 당할 수 있고 순교 당할 수 있고 억울한 일 당할 수 있지만 소망이 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고 환난 중에도 참고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은혜를 주실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고전 13:4)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다. 사랑이 끝나면 참는 것도 끝난다. 사랑하는만큼 참게 되어 있다. 인재하지 못하면 사랑이 부족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하루가 천년같이 천년이 하루같이 참고 기다리신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살 것을 말씀하신다. 그렇게 참으면서 할 일은 기도하는 것이다. 참으면서 억울해하거나 낙심하거나 속상해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며 참는 것이다. 


13절

사랑으로 서로 대접하고 공급하라고 하셨다. 초대 교회 당시에는 신앙문제로 핍박 받는 사람들이 많았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고난을 당하고 유리 방황하는 자들이 많았다. 떠돌아 다니면서 굶주리고 헐벗은 자들이 있었다. 그들을 구제하고 섬기라고 하셨다. 그것이 참 사랑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다. 사랑의 본을 보이시고 사랑으로 섬기셨다. 아브라함은 부지 중에 천사를 대접하는 위대한 일을 했다. 우리도 사랑을 실천하며 선을 행하는 일에 힘써야 하겠다. 


14절

핍박을 당할 때 기도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핍박을 받을 때 우리 마음 속에 생기는 것이 미움과 분노일 것이다.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으면 미워하는 마음과 분노가 생길 수 있다. 그런데 미움과 분노에 사로 잡히면 신앙에 큰 손해가 찾아온다. 하나님과 멀어지고 은혜를 다 잃어버린다. 내 자신이 파괴된다. 내 인격과 성품과 모든 것이 무너진다. 우리의 얼굴이 굳어진다. 마음이 차갑고 냉랭해진다. 싸우는 전투적인 사람이 되고 만다. 나 자신만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도 불행하게 만든다. 성경에서는 우리에게 분노하지 말고 미워하지 말라고 말씀한다. 사랑하게 될 때 이유가 없다. 그냥 사랑하게 된다. 미움도 비슷하다. 이유 없이 미울 수 있다. 근거도 없이 미워한다. 그런데 미워하다가 한평생 헛되게 보내고 내 인생을 무너뜨린다. 그런 길로 가면 안된다. 

핍박자, 미워할 수 밖에 없는 자가 생길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축복해주고 기도해줘야 한다. 성경대로 해야 승리할 수 있다. 미움으로 이기려고 하지 말고 박해하는 자를 축복해 줘야 한다. 그러면 우리 마음 속에 은혜가 임하고 성령이 임하고 우리 마음을 축복해 주신다. 이것이 승리하는 방법이다. 주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시옵소서.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4)

원수를 위해서,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해줘야 한다. 그들을 축복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도 복을 주시겠지만 나에게 은혜가 임한다. 성령께서 충만한 역사를 채워주신다. 이것이 원수를 이기는 비결이다. 


15절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했다. 이웃이 즐거워할 때, 복받고 형통할 때 함께 즐거워하라고 했다. 그것을 보면서 시기하고 미워하고 속상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잘되면 배가 아프지 않다. 자식이 잘된다고 배 아픈 부모는 없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나보다 더 잘 되기를 원하고 나보다 더 잘 살기를 기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면 이웃이 잘 될 때 함께 기뻐할 것이다. 우리 마음이 시기 질투하는 마음 다 버리고 기쁨에 동참하는 길을 걸어갈 수 있어야 하겠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했다. 실패해서 울고, 고난 당해서 울고, 어려움 당해서 우는 자들을 보면 함께 울라고 했다. 비난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고 그럴줄 알았다고 하지 말고 함께 울어줘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다. 참 간단한 말씀인데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 속에 욕심과 시기와 질투하는 마음이 있어서 이렇게 잘하지 못한다. 


16절

서로 마음을 같이 하라고 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마음을 같이 하라고 했다. 어떻게 마음이 같아질 수 있을까?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하면 절대로 같아질 수 없다. 다툼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마음이 같아지는 방법은 나의 마음은 버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되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비우시고 낮아지셔서 하나님의 뜻만 이루기를 힘쓰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셨다. 나도 그 마음을 갖고 상대방도 그 마음을 갖고 모두가 그 마음을 가지면 마음이 같아질 수 있다. 이것이 믿음생활, 교회생활을 잘 하는 비결이다.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한다. 내가 더 높아지고 내 마음이 더 옳다, 내가 더 잘되야지 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하나될 수 없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없다. 서로 낮아져서 종이 되겠다고 하면 싫어할 사람 없다. 그렇게 낮은 데에 처해야 한다.

스스로 지혜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낮아져서 섬기라고 했다.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지혜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다툼이 일어난다. 나는 어리석습니다, 부족합니다 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싸우지 않는다. 


17절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했다. 세상은 악을 악으로 갚는 것에 익숙하다. 그것이 법칙인줄 알고 그렇게 힘써 하려고 한다. 상대방이 나에게 욕하면 나도 욕하고 나를 때리면 나도 때려야 되겠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악으로 악으로 갚는 것이다. 한대 맞으면 두대 때리려고 한다. 그러다보면 악이 점점 성행해서 악이 가득한 세상이 되고 만다. 그려면 결국 다 같이 망하게 된다. 악을 악으로 갚으면 안된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복수하는 것이다. 

반면에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했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모든 사람 앞에서 선을 행해야 한다. 누구에게든지 선을 행해야 한다. 


18절

"할 수 있거든"이라는 단서를 붙인 것은 내가 노력해도 안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화목은 쌍방이 서로 마음이 맞아야 한다. 내가 아무리 용서하고 화목하려고 해도 상대방이 마음을 닫고 용납하지 않으면 화목할 수 없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화목하기를 힘쓰고 용서해야 한다. 상대방이 안받아주면 할 수 없다. 나는 내 할바를 해야 한다. 


19절

원수 갚는 것을 하지 말라고 하셨다. 원수가 생겼을 때 내가 직접 갚아야되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원수 갚는 일이다. 원수 갚아봤는가? 집에서부터 모진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다. 그리고 얼굴을 굳게 만들고 눈에 살기 등등하게 만들고 말도 공격적으로 하고 미운 마음으로 쏘아 부쳐야 한다. 이것이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하면 자신이 은혜를 다 잃어버리고 성령의 감동이 다 떠나고 자신이 망가진다. 한없이 무너진다. 상대방에게도 고통을 주고 해를 끼치게 된다. 그런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복수 갚는 일이 나에게 절대로 유익이 없다. 상대방도 또 복수하고 원수 갚겠다고 한다. 싸움이 강해지다가 결국 다 망하게 된다. 하나님은 그런 일을 하지 말라고 말씀한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하면서 원수 갚지 말라고 한다. 하나님이 원수를 갚아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시 3:7)

하나님이 이렇게 해주신다. 내가 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하나님이 원수를 갚아주신다. 내가 하는 것보다 더 무섭게 갚아주신다. 그러므로 내가 원수를 갚을 필요가 없다. 죄인에 대해서 벌하는 것은 심판자이신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심판자가 아니다. 


20절

우리가 할 일은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라는 것이다. 원수가 어려움 당할 때 잘 도와주라는 것이다. 사랑을 베풀고 선을 행하고 잘해주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고, 사랑으로 감동 받게 만들어서 변화받게 할 수 있다. 숯불을 쌓아 놓으면 감동을 받는다. 그러면 풀어지고 녹아지는 상태가 될 수 있다.

엘리사 선지자가 아람이 침략하려는 것을 미리 다 알고 왕에게 보고한다. 원수가 침략하려고 하고, 어느 길로 오려고 한다는 것을 다 알려주니까 아람이 침략할 수 없다. 그래서 엘리사부터 잡으려고 도단을 포위한다. 엘리사가 기도할 때 그들의 눈이 어두워지고 그들을 다 사마리아로 끌고 간다. 왕이 죽이냐고 할 때 오히려 떡을 먹이고 잘 돌려 보냈다. 선으로 악을 이긴 것이다. 하나님의 방법이 최고의 방법이다.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면 완전하게 이길 수 있다. 원수를 갚으면 더 힘들고 괴롭고 신앙생활이 무너지고 기도가 안된다. 


21절

악인에게 지지 말라고 하지 않고 악에게 지지 말라고 했다. 악인에게 이기려고 하다가 악에게 지는 경우가 있다. 원수 갚고 복수하는 것 자체가 악이다. 그런 것 하지 말고 그냥 선을 행하라고 했다.

요점은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이고, 사랑을 실천할 때 구체적인 방법들을 말씀해주는 내용이다. 간단하고 쉬운 말씀인데 이대로 살기 어렵다. 이렇게 살기만 하면 예수님을 닮아가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고, 교회가 은혜 충만한 상태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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