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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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1 수요저녁예배 설교(약 1:1-4 / 여러 가지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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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4-09-11 21:21 조회1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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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링크 : https://youtu.be/STKquL6SCfQ?si=ZzXFWvDqYsTjqWUN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기록했다.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와는 다른 사람이다. 후에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 되고 초대교회의 기둥 역할을 했던 귀한 인물이다. 예수님의 동생들이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요 7:5)

친형제들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30여년 같이 형제로 한집에서 지냈다. 인간적으로 잘 알고 친한 사이였을 것이다. 그런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믿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 어떻게 믿었을까?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다는 말씀이 있다.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고전 15:7)

부활 후에 야고보에게 나타내 보여주셨다. 사도바울에게 나타내 보여주신 것처럼 야고보를 만나주신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야고보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것으로 보여진다. 그 야고보가 기록한 말씀이 야고보서이다. 


1절

야고보는 자신을 소개하기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이라고 했다. 자신을 하나님과 예수님의 종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믿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신앙고백으로 주님을 섬긴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종이라고 했다. 종은 노예이다. 주인의 소유물이다. 과거에 노예는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다. 짐승처럼 취급 받는 정말 비천한 사람이었다. 오늘날 주의 종이라고 하면 존경의 의미를 담아서 말하는데 원래 의미는 그렇지 않다. 우리도 예수님을 이렇게 나의 주님으로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살아야 한다. 우리는 종의 위치에서 주님을 잘 받들고 순종하고 섬기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주인 자리에 앉아서 주인 노릇을 하려고 한다. 정말 종의 위치에서 종처럼 살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 것이 많다. 종에게는 세가지가 없다. 첫째. 자기 주장, 자기 생각, 자기 의견이 없다. 주인이 말하면 그냥 해야 한다. 자기 생각을 주장하는 것은 종이 아니다. 종은 절대 복종, 절대 순종이다. 그리고 종에게는 자기 소유가 없다. 내 것이 없다. 자기 몸도 시간도 돈도 자기 것이 아니다. 전부 주인 것이다. 결혼하면 아내도, 자녀도 주인 것이 된다. 그렇게 철저하게 주인에게 속한 것이 종이다. 셋째. 자기를 위하는 삶이 없다. '나를 위해서 무엇을 좀 해야 되겠다. 나를 위해서 시간을 써야 되겠다'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100% 주인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이런 기준으로 보면 우리는 종처럼 살지 못하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내가 주인 자리에 있고 예수님을 이용하는 삶을 살 때가 있다. 우리가 종의 자리를 떠나서 살고 있다. 아무튼 사도바울이나 야고보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고백했다.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종으로 살았고 종 역할을 잘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으로 있었고, 예루살렘 공회 때 야고보가 나서서 주도적으로 발언하고 초대교회의 기둥 역할을 했다. 야고보는 귀하게 쓰임받은 사람이다.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 믿음 지키다가 박해를 받고 사방으로 흩어진 성도들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는데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신다. 오순절에 보혜사 성령 강림의 역사가 일어나고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게 된다. 유대인들이 그냥 두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고, 스데반의 순교를 계기로 무섭게 박해하기 시작한다. 그러자 예루살렘의 많은 성도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흩어진 곳에서 믿음을 지키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한다. 영적으로는 하나지만 여러 곳에서 복음을 전하며 믿음을 지켰다. 그들에게 야고보서를 기록해서 보낸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붙들고 환난과 시험을 이기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현재성을 가진다. 하나님이 이 시간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무슨 말씀이든지 나를 위해서 기록하셨고 나를 위해서 주신 말씀으로 믿어야 믿음생활을 바르게 할 수 있다. 


2절

"여러 가지 시험" 다양하고 다체롭게 많은 시험이 있을 것을 전제로 말하고 있다. 신앙적 박해, 육신적 질병, 경제적 가난, 개인적 시험, 가정적 시험, 국가적 시험, 환경적 어려움, 재난, 지진, 홍수, 전쟁 등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성도들에게 다양한 시험들이 여기저기에서 닥쳐 올 수 있다. 시험 없는 자는 없고 시험 안당하는 자도 없다. 이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시험 당할 때 많은 사람들이 '왜 나만 이런 어려움을 당하게 하실까?',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생길까?' 라고 생각하는데 틀린 생각이다. 시험 걱정 모든 괴로움 없는 사람 누군가? 어른 뿐 아니라 어린 아이들도 시험을 당한다. 믿음 없는 자만 시험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강한 자도 시험을 당한다. 예수님도 시험을 받으셨다. 

시험을 당할 때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다. 시험 당할 때 낙심하지 말고 원망 불평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으로는 낙심하고 두려워하고 원망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성경은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다. 모든 시험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주어진다고 믿어야 한다. 큰 시험이든 작은 시험이든 우연히, 재수 없어서 만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허락 하에 시험을 당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절대적인 주권으로. 계획과 뜻이 있어서 허락하신 것이다. 사람의 머리카락 하나 빠지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해야만 일어나는 일이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으면 기뻐할 수 있다. 

또 하나 믿어야 할 것은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주신다고 했다. 감당 못할 시험, 너무너무 크고 어려운 시험을 주셔서 쓰러뜨리고 낙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다. 감당할 시험만 주신다. 시험이 올 때 감당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 시험 자체만 보면 힘들고 괴롭고 어렵다. 그런데 시험과 이후에 만날 일들을 합쳐서 보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합쳐서 보면 유익과 복이 된다. 세상의 것과 하늘의 것을 합쳐서 보면 좋은 것만 이루게 하신다. 그렇게 성경 말씀대로 다 종합해서 보면 시험 자체가 나쁘게 여겨지지 않게 된다. 결론적으로는 어떻게 하시는가?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신 8:16)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시험이 오고, 하나님은 감당할 시험만 주시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며, 마침내 복을 이루신다. 그러므로 시험이 올 때 기쁘게 여길 수 있다. 이 말씀을 잊어버리고 시험만 생각하면 기쁘게 여길 수 없다.

또 하나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마귀가 믿는 성도를 미혹한다. 욥의 모든 재산을 앗아가고 열 자녀를 다 죽게 하고 큰 병을 들게 해서 고통 당하게 한다. 마귀의 목적은 욥이 하나님을 욕하고 대적하고 하나님을 떠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때 욥이 하나님을 욕하고 원망했다면 마귀의 시험에 지는 것이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을 찬양했다. 어리석게 원망하지 않았다. 원망했더라면 지는 건데, 원망하지 않고 감사하고 찬송하므로 승리했다. 시험이 올 때 원망 낙심 슬퍼하면 시험에 지는 길로 가는 것이다. 온전히 기쁘게 여기고 믿음으로 감당할 수 있다. 하나님이 복주시려고 한다는 것을 믿으면 기뻐할 수 있다. 조금 기쁘게 흉내만 내지 말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했다. 여기라는 말 속에는 다르게 보라는 의미가 있다. 시험 자체만 보지 말고 시험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고 바라보라는 것이다. 보이는대로, 느끼는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시험을 허락하신 이유와 시험을 통해 주시려는 뜻이 뭔지를 생각해야 한다. 


3-4절

시련은 연단시키는 것이다. 쇠를 불에 녹여서 찌꺼기를 제거하는 것처럼 믿음생활하는 중에 생긴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서 시련을 주시는 것이다. 믿음생활에 시험을 통해서 우리를 연단하신다. 불에 여러 번 집어 넣었다 꺼내는 것을 반복하면 쇠가 단단해진다. 그것처럼 시험을 당하고 또 당하고 또 당하면서 우리가 강해지고 능력 있는 믿음의 사람으로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아무 시험이 없으면 아주 연약하고 약한 모습으로 지낼 수 밖에 없다. 필요한 쓸만한 그릇으로 만들려고 시험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연단 시켜서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인격의 신자로 만들려는 것이다.

인내는 참는 것이다. 잘 참고 견디는 과정 속에서 연단이 되고 그 속에서 시련이 되어서 강하고 담대한 믿음의 사람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참고 인내하는 것이다. 인내를 통해서 복을 받는 것이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시험을 잘 참고 견디면 인내가 이루어진다. 하나님 앞에서 귀한 성품과 믿음을 가진 자가 된다. 성령의 열매 가운데 오래 참음이 있다. 인내는 주님의 성품이다. 하나님 아버지는 오래 참으신다. 하루가 천년같이 천년이 하루같이 참아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성품의 특성이 오래 참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오래 참는 성품을 갖길 원하신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고 25년 후에 아들을 주셨다. 요셉을 애굽의 통치자로 쓰시기 위해서 13년 동안 많은 시련을 겪게 하셨다. 모세가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 받아 귀하게 쓰임 받기까지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서 연단을 받았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에 사울에게 10년 동안 도망다녔다. 훌륭한 믿음의 사람에게는 연단의 과정이 있었다. 연단을 잘 받아서 능력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져서 귀하게 쓰임 받았다.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면 쉽게 부서진다. 불로 구워내야 단단해 진다. 연단과 시련의 과정을 거쳐야 강한 인격체가 될 수 있다.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3~4)

시험이 있어야 인내를 하고 인내해야 연단을 받고 연단 받으면 소망이 이루어진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야 한다. 조금 참다가 그만 두면 안된다. 끝까지 인내를 이루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 앞에 쓸만한 일꾼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참는 과정을 통해서 인격이 성숙하고 믿음이 강해지고 하나님 보시기에 복받을만한 쓸만한 사람으로 자라날 수 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은 인내를 잘하는 사람이다. 연단을 많이 받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하나님 앞에 복받을만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딤후 2:11~12)

참으면 함께 왕노릇할 수 있다. 잘 참고 인내하면 연단이 이루어지고 소망이 이루어지는 사람이 된다. 그런데 환난 시험 중에 참고 견디지 못하고 주님을 부인하면 주님도 우리를 부인하신다. 중요한 말씀은 참으면 함께 왕노릇한다는 것이다. 참고 인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려주는 말씀이다.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한다. 무조건 기쁘게 여겨야 한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야 한다. 잘 참고 견뎌야 한다. 우리에게는 능력이 없다. 참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냥 참고 견뎌야 한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께 다 맡기고 참고 견디면 하나님이 다 이루시고 시험이 끝나게 하시고 은혜와 복을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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