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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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31 주일오전예배 설교(고린도후서 12장 7-10절/가시와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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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0-05-31 17:04 조회1,73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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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https://youtu.be/P-7kzgUCkiU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는 체험을 했습니다. 사도의 직분을 맡아서 신약성경 14권을 기록했습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내가 깨끗하다’고 할 만큼 전도에 힘썼고 교회도 많이 세웠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나고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고침을 받고 그가 기도할 때 죽은 자가 살아나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셋째하늘까지 이끌려갔다 오는 신비한 체험을 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엄청난 은혜를 받았던 사도였습니다.

1. 바울에게 가시를 주심
이런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가시’를 주셨습니다. 바울은 그 가시 때문에 남모르는 고통을 당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가시는 바울에게 있었던 눈병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갈라디아서 4:14-15에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다“고 했고 ‘교인들은 자기 눈이라고 빼주려’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6:11에 바울이 성경을 기록할 때 다른 사람을 시켜서 대필하게 하고 “끝에 자기 손으로 큰 글자로 써서” 자기 글임을 확인했습니다. 가시는 일반적으로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작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고통과 불편을 주는 것이 가시입니다. 남 보기에는 멀쩡한 것 같으면서도 속으로 앓게 하는 것이 가시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가시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육체적인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행복해 보이는 부부 사이에 수십 년 묵은 가시가 있어서 남모르게 한숨 쉬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가시노릇 할 수도 있습니다. 자식이 가시노릇 할 수도 있습니다. 직장에 괴롭히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7절을 보면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곧 사탄의 사자’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예수님 믿기 전,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면서 마귀의 종노릇할 때 생긴 것이기 때문에 사탄의 사자라고 한 것 같습니다. 바울(사울)이 다메섹으로 갈 때 강한 빛을 비취었습니다. 그리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때 바울의 눈이 멀어버렸습니다. 후에 아나니아 선지자에게 안수를 받고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 다시 보게 되었는데 완전히 다 낫지 않고 눈병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봅니다. 가시를 ‘사탄의 사자’라고 한 또 하나의 이유는 사탄이 이 가시를 이용해서 자주자주 바울을 시험하고, 낙심하게 만들고, 약해지게 만들고, 믿음을 흔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가시 때문에 고통을 당하였고, 교인들에게 시험이 되기도 했고, 비방거리가 되기도 했습니다. 가시가 없었다면 하나님의 일도 더 잘하고, 믿음도 더 잘 지키고, 전도도 더 잘하고, 사람들에게 비방도 안당하고, 하나님의 영광도 더 많이 드러낼 것 같은데 가시를 왜 주셨을까요?

2. 세 번 주께 간구함
어떤 사람은 자기 힘으로 가시를 뽑아보려고 가시와 싸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시는 우리가 뽑을 수도 없고, 뽑을 수 있다고 해도 뽑아내면 내가 손해입니다. 나무 멍에 꺾어 버리면 쇠 멍에를 주십니다. 어떤 사람은 가시와 싸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먹으로 치고 발로 차면 자기만 더 아플 것입니다. 가시는 건드릴수록 자신이 상처를 받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시가 팔자이려니 하고 참고 삽니다. 참는 것은 좋으나 그냥 참고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가시를 통해서 주시고자 하시는 은혜와 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기도했습니다. 8절에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찌르는 아픔을 인하여 세 번이나 특별히 기도를 했습니다. 가시를 없애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도 가시가 있을 때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시를 다루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기도에 응답해주셨는데 가시를 없애주지 않고 가시를 주신 이유를 알려주셨습니다.

3. 하나님께서 주신 응답
첫째.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7절에 보면 두 번이나 강조한 말씀이 있는데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입니다. 즉 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면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평생 가시를 지니고 살지언정 자만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신앙의 가장 큰 적은 교만입니다. 잠언 6:16-17에 보면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예닐곱 가지라고 하시면서 그 첫 번째가 “교만한 눈”이라고 했습니다. 잠언 8:13에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잠언 16:5에 “무릇 마음이 교만한 자를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니” 하나님께서는 모든 죄를 미워하시지만 성경에 하나님이 특별히 미워한다고 말한 것은 ‘교만’입니다.
사람이 교만해지면 자기가 사람이 아닌 것처럼 행동합니다.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심지어 하나님까지 무시합니다. 교만하면 말씀을 순종하지 않습니다. 교만하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교만하면 회개를 못합니다. 교만하면 은혜 받을 수도 없습니다. 교만하면 고집을 부리고 계속 악을 행합니다. 따라서 교만하면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천사가 타락하여 마귀가 된 것은 교만했기 때문이고 사울 왕이 타락하여 망하게 된 것도 교만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겸손해야 귀하게 쓰임을 받습니다.
그런데 겸손해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수 없이 듣고 배워서 다 알면서도 겸손해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타락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가만히 두면 저절로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가시를 주어서 강제로 낮추고 겸손케 만드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가시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은혜로 주신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육체적인 질병, 부부간의 갈등, 경제적인 어려움, 자녀들의 속 썩이는 일, 직장에 원수 같은 사람이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 수없이 엎으려 기도했는데도 해결해주지 않고 그냥 남겨두고 있는 문제가 있다면, 나의 겸손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가시로 주신 것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결국에는 그것이 나에게 은혜의 도구가 되고 축복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둘째, 약한 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9-10절에 보면 약하다는 말이 4번 나옵니다. 바울은 자기 몸에 가시를 보면서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고, 능력을 행할 때 자기가 굉장한 사람인 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가시를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작고 시시한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방에 고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힘써도 안 되고, 노력해도 안 되고, 기도해도 안 됩니다. 도대체 방법이 없습니다. 바울은 가시를 보면서 깨닫습니다. ‘나는 약한 사람이구나. 나는 별 것 아니구나. 하나님이 도와주시고 함께하셔서 능력도 행하고, 병도 고치고, 기족도 행한 것이지, 내가 한 것이 아니었구나.’ 이것을 깨닫습니다. 이것이 가시가 주는 은혜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약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약점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약점이 드러나면 치명적인 손해가 된다고 생각하면서 어떻게든지 약점을 감추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자기의 약점 때문에 열등감에 사로 잡혀서 살아갑니다. 목회하면서 보면, 시험이 안 될 문제, 아주 사사로운 문제로 시험에 드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대부분 열등감과 관련이 있습니다. 자기가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큰소리치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바울은 크게 기뻐하면서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합니다(9절). 사람들에게 내놓기 부끄럽고 남들이 알까봐 쉬쉬하는 것인데 그것을 드러내며 자랑합니다.
내가 약할 때 주님의 은혜가 나에게 온전해지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기도 하면서 받은 응답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기 몸에 있는 가시 하나 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면에서 주님을 의지했습니다. “주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께서 해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문제는 내가 약하다는 것을 잘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 힘으로 다 하려고 합니다. 자기 힘으로 성공할 줄 알고, 자기 힘으로 행복하려고 하고, 자기 힘으로 얻으려 합니다.
많은 사람이 너무 늦게 깨닫습니다. 자기가 약하다는 것을. 어떤 부부는 배우자를 자기가 고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살면서 지적하고 다투고 싸웁니다. 늙어서 기운 다 빠지고 나면 그때 깨닫습니다. ‘이것은 내 힘으로 되는 일이 아니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구나.’ 우리는 사람입니다. 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약합니다. 이것을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연약한 인생인 것을 깨닫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약하다는 것을 온전히 깨달으면 그때부터 주님을 의지합니다. 그리고 그때 주님께서 다 도와주십니다. 여러분 숨 쉬는 것, 말하는 것, 걸어 다니는 것, 잠자는 것, 밥 먹는 것, 생각하는 것, 여러분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가 연약함을 깨닫는 것이 은혜입니다. 약함 때문에 열등감에 사로잡혀 살지 말고 나의 약함을 자랑하고 나의 어리석고 부족한 점을 자랑합시다. 그것이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될 것입니다.

셋째. 은혜와 능력이 머물게 하려고
바울이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셨습니다. 9절에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가시를 없애준 것이 아니고 그 가시는 너에게 필요해서 은혜로 준 것이니까 그냥 그 가시를 가지고 살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셨습니다. 가시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더 많이 받게 되고, 또 받은 능력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가시를 은혜라고 말씀하십니다. 병든 것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고통을 은혜라고 말합니다. 가시 때문에 더 겸손해지고 약함을 깨달아서 하나님을 더욱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연약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낄 때,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음을 느낄 때, 가시로 인하여 고통을 당할 때, 그때는 약한 것 같으나 실상은 강하고, 근심하는 것 같으나 기뻐하고, 가난한 것 같으나 부요하고, 죽는 것 같으나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누군가를 귀히 쓰시려고 할 때 먼저 가시를 주십니다. 이 세상에서 크게 쓰임 받은 사람을 보면 아무 어려움이 없고 평안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가시로 인하여 많은 고통을 당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한나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그에게 가시 노릇한 브닌나였습니다. 다윗을 위대하게 만든 것은 그에게 가시 노릇한 사울이었습니다. 요셉을 위대하게 만든 것은 그를 애굽에 팔아먹은 형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을 위대하게 만든 것은 그 몸에 있었던 가시였습니다.

결론, 이렇게 응답을 받은 바울은 마음에 평강을 얻었습니다. 바울은 가시가 있어도 기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로 더 이상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가시를 주님의 섭리를 받아들이고 가시를 주심을 감사했습니다. 바울은 영적으로 더욱 성장하고 성숙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기가 고통을 당하는 것도 영광스럽게 받아들이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가시는 더 이상 원수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를 도와주고 자기를 살려주는 고마운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시와 함께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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