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621 주일오전예배 설교(요한복음 3장 1-8절/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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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0-06-21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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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 중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고 유대인의 지도자(관원)이고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10절). 이런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면서 이 분이야말로 보통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2절에 보면 예수님을 “랍비여”라고 부르고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합니다. 그가 아직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지 못하고, 구세주로 믿은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호의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소문만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자신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자신의 지위와 신분 때문에 낮에 찾아오지 못하고 밤에 찾아왔습니다. 아마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주님을 만나려고 한 것 같습니다.
그는 당시 유대 사회의 분위기가 어떤지 알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예수님을 경계하고 위험시하는 자들이 많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출교할 정도로 예수님을 극렬히 반대하는 때였습니다. 그래서 대낮에 찾아오지 못하고 밤에 찾아온 것입니다. 혹시라도 어떤 불이익을 당할까 걱정했던 것 같습니다. 아직은 의심스럽고, 아직은 조심스럽고, 주님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주변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니고데모에게 주님은 참으로 귀한 진리를 말씀해주셨습니다. 니고데모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복된 말씀을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당에 나왔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셨던 그 말씀 다시 들으면서 은혜받기 원합니다.
1. 거듭남의 정의
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에 관심을 보이며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하늘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듭남의 문제이며 거듭나야 믿음생활을 할 수 있고,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거듭나는 것은 아이가 태어나는 것처럼 새 생명이 출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었던 영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위로부터 다시 나는 것” “중생”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의미하며 ‘구원받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즉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향해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는 사회적으로 출세한 사람이고, 상당히 종교적이며,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이고, 교양도 갖추었고, 높은 지위에 올라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금식하고 기도하고 십일조생활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고 있습니다. 거듭나지 못하여 생명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새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거듭나서 하늘나라에 들어가 영원히 사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2. 거듭남의 필요성
첫째. 영혼이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엡 2:1). 모든 사람의 영혼은 허물과 죄로 죽어있습니다. 사람이 부모에게서 태어날 때에 영혼은 죽은 상태로 태어납니다. 영혼이 죽었다는 말은 멸절되었다거나 영혼이 없어졌다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과 단절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영혼이 있기는 있으나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죽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모든 사람의 영혼이 죽어서 하나님도 모르고, 천국도 모르고, 내세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나야 합니다.
둘째.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3절).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것은 육신의 눈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깨닫고 안다는 의미입니다. 거듭나야 진리를 깨닫고 영적 세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이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천국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말씀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만나서 대화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진리를 논하면서도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의 자격을 말씀해주는데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가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셋째.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5절).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육신은 땅에 묻혀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천국이나 지옥에 들어갑니다. 영혼이 갈 곳은 천국이나 지옥 둘 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예수님 믿고 거듭난 사람입니다. 영이 산 사람만 하늘나라에 들어갑니다. 영이 죽어있는 사람,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닙니다. 나그네처럼 잠깐 머물다가 떠날 곳입니다. 이 세상을 떠날 때 나의 갈 곳은 어디입니까?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그런데 니고데모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니고데모는 거듭나는 것을 육신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오해해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반문했습니다.
3. 거듭남의 요소
5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첫째.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베드로전서 1:23에 보면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새 생명이 탄생하려면 생명의 씨가 있어야 하는데 그 씨가 바로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1:18에 보면“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복음 속에 생명의 씨가 있고,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을 들을 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1:12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둘째. 성령의 역사로 됩니다. 성령에 의해서,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위로부터 나는 것입니다. 성령이 복음을 듣게 하고, 예수님이 믿어지게 하고, 죽은 영을 살려서 거듭나게 만드십니다. 에베소서 1:13에 보면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처럼 거듭나려면 반드시 복음을 들어야 하고 그때 성령이 역사하셔서 믿어지게 하고 거듭나게 합니다. 사도행전 16:14에 보면 바울이 전도할 때 루디아라는 사람이 듣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서 말씀이 믿어지게 했습니다. 6절에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육을 아무리 훈련시켜도 영이 되지 못합니다. 인격이 성숙해진다고 거듭날 수 있는 것 아닙니다. 지식이 많아진다고 거듭날 수 있는 것 아닙니다. 육으로 난 것은 100번 다시 태어나도 여전히 육입니다.
영으로 태어나야 영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변화입니다. 사람이 약간 변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리에게 양의 탈을 씌우면 양이 됩니까? 아닙니다. 염소의 뿔을 자른다고 양이 됩니까? 아닙니다. 양이 되려면 양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크리스천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육받고, 훈련하고, 노력하고, 힘쓴다고 되는 것 아닙니다. 크리스천은 태어나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참 크리스천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역사를 바람에 비유하셨습니다(7-8절). 바람이 불 때 사람이 바람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성령으로 나는 것도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구원파 이단에서는 구원 받은 날짜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이 구절에 맞지 않습니다. 거듭나는 것은 성령으로 되는 일이기 때문에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고 느낌도 없습니다. 몸이 뜨거워지고 눈물을 흘리고 굉장한 체험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체험을 주는 사람도 있지만 조용히 거듭나게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날짜를 알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바람 자체는 볼 수가 없으나 바람이 해놓은 결과를 보고 바람이 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도 결과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주로 믿어집니다. 예수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고린도전서 12:3).
4. 거듭남의 특징
거듭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냥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됩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마음을 열고 주실 은혜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첫째. 거듭남은 찰나적인(순간적인) 사건입니다. 서서히 점진적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출생은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것처럼 거듭나는 것도 순간적인 사건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이 시간에 거듭날 수 있습니다. 거듭났다고 해서 금방 믿음이 좋아지고 성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어리기 때문에 생활면에서는 부족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거듭남은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두 번, 세 번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한 번의 거듭남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중생한 영혼은 다시 죽지 않습니다. 다시 타락하여 지옥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0:28에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거듭난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5:18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거듭난 사람은 일시적으로 넘어질 수는 있지만 다시 회개하고 믿음에 섭니다.
셋째. 거듭난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요한일서 5:11-13에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거듭난 사람은 모든 분야에서 기본적인 개념들이 달라지고 바뀝니다. 자기의 정체성이 달라집니다. 전에는 ‘내가 박 아무개, 김 아무개’라고 생각하지만 거듭난 후에는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고 확신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가치관도 달라지고 인생관이 달라집니다. 모든 것의 기준이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세상 중심에서 말씀 중심으로 변합니다. 전에 귀하게 여기던 것을 천하게 여기고 전에 좋아하던 것을 싫어하게 됩니다. 삶의 방향이 바뀝니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교회에 나가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말씀을 좋아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성경이 읽어지고 기도가 됩니다. 입술에서 찬송이 나옵니다. 모든 생명체는 자라납니다. 거듭난 영혼도 말씀의 젖을 먹고 자라나야 합니다. 이렇게 자라나야 천국에서 큰 자가 되고 왕 노릇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 중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고 유대인의 지도자(관원)이고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10절). 이런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을 보면서 이 분이야말로 보통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분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2절에 보면 예수님을 “랍비여”라고 부르고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이라고 합니다. 그가 아직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지 못하고, 구세주로 믿은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께 호의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소문만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고 자신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는 자신의 지위와 신분 때문에 낮에 찾아오지 못하고 밤에 찾아왔습니다. 아마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주님을 만나려고 한 것 같습니다.
그는 당시 유대 사회의 분위기가 어떤지 알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예수님을 경계하고 위험시하는 자들이 많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출교할 정도로 예수님을 극렬히 반대하는 때였습니다. 그래서 대낮에 찾아오지 못하고 밤에 찾아온 것입니다. 혹시라도 어떤 불이익을 당할까 걱정했던 것 같습니다. 아직은 의심스럽고, 아직은 조심스럽고, 주님에 대한 확신이 없기에 주변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니고데모에게 주님은 참으로 귀한 진리를 말씀해주셨습니다. 니고데모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복된 말씀을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당에 나왔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주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하셨던 그 말씀 다시 들으면서 은혜받기 원합니다.
1. 거듭남의 정의
3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에 관심을 보이며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하늘나라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듭남의 문제이며 거듭나야 믿음생활을 할 수 있고,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거듭나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거듭나는 것은 아이가 태어나는 것처럼 새 생명이 출생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죽었던 영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위로부터 다시 나는 것” “중생”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의미하며 ‘구원받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즉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향해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는 사회적으로 출세한 사람이고, 상당히 종교적이며,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이고, 교양도 갖추었고, 높은 지위에 올라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금식하고 기도하고 십일조생활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고 있습니다. 거듭나지 못하여 생명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새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거듭나서 하늘나라에 들어가 영원히 사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2. 거듭남의 필요성
첫째. 영혼이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엡 2:1). 모든 사람의 영혼은 허물과 죄로 죽어있습니다. 사람이 부모에게서 태어날 때에 영혼은 죽은 상태로 태어납니다. 영혼이 죽었다는 말은 멸절되었다거나 영혼이 없어졌다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과 단절되었다는 뜻입니다. 우리 안에 영혼이 있기는 있으나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네가 정녕 죽으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죽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습니다. 모든 사람의 영혼이 죽어서 하나님도 모르고, 천국도 모르고, 내세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나야 합니다.
둘째.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3절). 하나님 나라를 본다는 것은 육신의 눈으로 본다는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깨닫고 안다는 의미입니다. 거듭나야 진리를 깨닫고 영적 세계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이 깨달아지지 않습니다. 천국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말씀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만나서 대화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진리를 논하면서도 그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자의 자격을 말씀해주는데 전혀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가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셋째.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5절).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 육신은 땅에 묻혀 흙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천국이나 지옥에 들어갑니다. 영혼이 갈 곳은 천국이나 지옥 둘 밖에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예수님 믿고 거듭난 사람입니다. 영이 산 사람만 하늘나라에 들어갑니다. 영이 죽어있는 사람,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닙니다. 나그네처럼 잠깐 머물다가 떠날 곳입니다. 이 세상을 떠날 때 나의 갈 곳은 어디입니까?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그런데 니고데모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니고데모는 거듭나는 것을 육신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오해해서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반문했습니다.
3. 거듭남의 요소
5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첫째.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베드로전서 1:23에 보면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새 생명이 탄생하려면 생명의 씨가 있어야 하는데 그 씨가 바로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1:18에 보면“그가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복음 속에 생명의 씨가 있고, 생명을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을 들을 때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고 거듭나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1:12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둘째. 성령의 역사로 됩니다. 성령에 의해서, 성령의 능력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위로부터 나는 것입니다. 성령이 복음을 듣게 하고, 예수님이 믿어지게 하고, 죽은 영을 살려서 거듭나게 만드십니다. 에베소서 1:13에 보면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처럼 거듭나려면 반드시 복음을 들어야 하고 그때 성령이 역사하셔서 믿어지게 하고 거듭나게 합니다. 사도행전 16:14에 보면 바울이 전도할 때 루디아라는 사람이 듣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서 말씀이 믿어지게 했습니다. 6절에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육을 아무리 훈련시켜도 영이 되지 못합니다. 인격이 성숙해진다고 거듭날 수 있는 것 아닙니다. 지식이 많아진다고 거듭날 수 있는 것 아닙니다. 육으로 난 것은 100번 다시 태어나도 여전히 육입니다.
영으로 태어나야 영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적인 변화입니다. 사람이 약간 변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리에게 양의 탈을 씌우면 양이 됩니까? 아닙니다. 염소의 뿔을 자른다고 양이 됩니까? 아닙니다. 양이 되려면 양으로 태어나야 합니다. 크리스천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육받고, 훈련하고, 노력하고, 힘쓴다고 되는 것 아닙니다. 크리스천은 태어나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참 크리스천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역사를 바람에 비유하셨습니다(7-8절). 바람이 불 때 사람이 바람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성령으로 나는 것도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구원파 이단에서는 구원 받은 날짜를 알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이 구절에 맞지 않습니다. 거듭나는 것은 성령으로 되는 일이기 때문에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고 느낌도 없습니다. 몸이 뜨거워지고 눈물을 흘리고 굉장한 체험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체험을 주는 사람도 있지만 조용히 거듭나게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날짜를 알지 못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바람 자체는 볼 수가 없으나 바람이 해놓은 결과를 보고 바람이 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도 결과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구주로 믿어집니다. 예수님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고린도전서 12:3).
4. 거듭남의 특징
거듭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냥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됩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마음을 열고 주실 은혜를 사모하는 것입니다.
첫째. 거듭남은 찰나적인(순간적인) 사건입니다. 서서히 점진적으로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출생은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것처럼 거듭나는 것도 순간적인 사건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이 시간에 거듭날 수 있습니다. 거듭났다고 해서 금방 믿음이 좋아지고 성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어리기 때문에 생활면에서는 부족한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거듭남은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거듭나는 것은 두 번, 세 번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한 번의 거듭남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중생한 영혼은 다시 죽지 않습니다. 다시 타락하여 지옥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0:28에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거듭난 사람은 영원히 멸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5:18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거듭난 사람은 일시적으로 넘어질 수는 있지만 다시 회개하고 믿음에 섭니다.
셋째. 거듭난 사람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요한일서 5:11-13에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거듭난 사람은 모든 분야에서 기본적인 개념들이 달라지고 바뀝니다. 자기의 정체성이 달라집니다. 전에는 ‘내가 박 아무개, 김 아무개’라고 생각하지만 거듭난 후에는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고 확신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가치관도 달라지고 인생관이 달라집니다. 모든 것의 기준이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세상 중심에서 말씀 중심으로 변합니다. 전에 귀하게 여기던 것을 천하게 여기고 전에 좋아하던 것을 싫어하게 됩니다. 삶의 방향이 바뀝니다.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교회에 나가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말씀을 좋아하고 말씀대로 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성경이 읽어지고 기도가 됩니다. 입술에서 찬송이 나옵니다. 모든 생명체는 자라납니다. 거듭난 영혼도 말씀의 젖을 먹고 자라나야 합니다. 이렇게 자라나야 천국에서 큰 자가 되고 왕 노릇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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