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09 주일오전예배 설교(사도행전 20장 7-12절/3층에서 떨어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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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0-08-09 16:16
조회1,28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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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https://youtu.be/sE3jweNYsXE
사도 바울이 ‘드로아’에 가서 일주일간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3층 다락에서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는데 사도 바울이 말씀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그 다음 날 떠나야 했기 때문에 저녁까지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문에 걸터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다가 설교가 길어지자 졸다가 길바닥으로 떨어져 죽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사도 바울이 죽은 이 청년을 다시 살려냅니다. 이 말씀은 여러 가지 각도에서 살필 수 있습니다만 오늘은 유두고가 3층 다락에서 떨어진 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살피겠습니다.
1. 유두고가 어디에서 떨어졌습니까?
7절에 보면 주간의 첫날에 모임이 있었습니다. 이날은 주일날입니다. 그러니까 주일날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신약의 교회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모여 있는 그 연합체가 교회입니다. 그리고 모임의 장소가 어디입니까? 8절에 ‘윗다락’이라 했고, 9절에는 3층에서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모인 장소가 3층 다락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두고가 3층 다락에서 떨어진 것은 믿음의 공동체인 그 교회에서 떨어졌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떡을 떼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음식을 먹었다는 말이 아니고 성찬식을 거행했다는 뜻입니다. 성찬식의 떡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고, 포도즙은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떡을 먹고 포도즙을 마시면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떡과 포도즙을 먹고 마실 때 주님과 신령한 영적 교통이 이루어지고 은혜를 받습니다. 또 떡을 떼면서 성도들과도 교제합니다. 그러므로 유두고가 3층에서 떨어진 것은 이런 신령한 교제가 있는 은혜의 자리에서 떨어져 분리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3층 다락에서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일은 말씀을 강론하는 일이었습니다. 7절 끝에 “그들에게 강론할새” 9절에는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강론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집회의 중심이 말씀 증거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흘러도 예배의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예배에 기도도 하고, 찬송도 부르고, 헌금도 드리고, 여러 가지 순서가 있지만 그 여러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 증거입니다. 여러분, ‘드로아’라는 곳은 작은 도시입니다. 이런 작은 도시에 바울 같은 대 사도가 와서 말씀을 전하는 기회를 얻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드로아 성도들도 조금이라도 말씀을 더 들으려고 한 것 같고, 또 바울도 조금이라도 더 말씀을 전해서 성도들이 은혜받게 만들고 믿음에 굳게 서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 몸의 피곤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저녁까지 말씀을 전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유두고가 졸다가 떨어져 죽는 사고가 난 것입니다.
2. 유두고가 어쩌다가 떨어졌습니까?
9절에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첫째. 유두고가 창문에 걸터앉았습니다. 그곳은 사람이 앉는 자리가 아닙니다. 유두고의 그 자세에 문제가 있습니다. 몸이 절반은 예배당에 절반은 세상에 있는 상태입니다. 유두고의 영적인 자세, 정신적인 자세, 신체적인 자세에 문제가 있습니다. 태도가 나쁘면 아무리 노력하고 힘써도 안됩니다. 은혜받는 사람은 예배 시간에 교회에 나와서 그 앉는 자리와 자세가 벌써 다릅니다. 예배 시간 20-30분 전에 나와서 앞자리에 앉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은혜받을 준비를 합니다. 그러나 은혜받지 못하는 사람은 시간도 늦어지고 벌써 자리 앉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목사님의 눈에 안 띄는 자리를 골라서 앉습니다. 기둥 뒤에 자리 잡고 앉거나 덩치 큰 사람 뒤에 숨어서 앉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데 창문에 걸터앉았다는 것은 벌써 그 자세에 문제가 있습니다. 정상적인 자세가 아닙니다. 몸이 절반은 안쪽에 있고 절반은 바깥으로 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유두고는 한쪽 눈으로는 사도 바울을 보고 있고 한쪽 눈으로는 바깥을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쪽 귀로는 말씀을 듣고 있고 한쪽 귀로는 저 밖에서 사람들 떠드는 소리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 말씀에 집중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어중간한 자세, 나누어진 시각, 나누어진 청각, 나누어진 마음, 이것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고 극도로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곳에 정신을 집중해도 뭐가 될까 말까 하는 판인데 나누어진 정신과 마음을 가지고는 뭘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는 하나님 앞에 앉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말씀 듣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시선을 설교자에게 집중하고 온 마음과 신경을 곤두세워서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예의일 뿐아니라 은혜받는 올바른 태도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자세가 중요합니다. 태권도를 하든지 피아노를 하든지 바이올린을 하든지 수영을 하든지 자세가 중요합니다. 자세가 잘못되면 어떤 일에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공부하는 것도 자세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 공부할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 믿는 것도 자세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 처음 시작할 때 바르게 딱 배운 사람은 얼마 안 가면 금방 성장하게 됩니다. 은혜받고자 하는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 잘 믿어야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예배 시간에 졸다가 떨어졌습니다. 정신 차리지 않고 조심하지 않다가 떨어졌습니다. 말씀 듣는 시간에 졸다가 떨어졌습니다. 일반적으로 잠은 꼭 필요하고 좋은 것입니다. 성경에도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의 잠은 치명적일 수가 있습니다. 특히 영적으로 졸거나 자는 것은 치명적인 불행을 가져옵니다. 성경에 보면 자다가 크게 실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아’는 술에 취해 잠을 자다가 큰 실수를 했고, 롯은 소돔과 고모라 성이 망할 때 두 딸을 데리고 도망쳐 나온 후 딸들이 주는 술을 먹고 자다가 그 딸들과 관계를 맺고 모압과 암몬을 낳습니다. 삼손은 들리라의 무릎을 베고 잠을 자다가 머리 밀리고, 눈이 뽑히고, 블레셋 사람들의 종이 됩니다.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 밑층에서 잠을 자다가 책망을 듣습니다.
그러더니 오늘 본문에 유두고라는 청년은 예배 시간에 졸다가 3층에서 떨어져 죽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세상에 졸다가 죽은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자기가 죽는 줄로 모르고 졸다가 죽었습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잠자는 것은 치명적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생명을 살리는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유듀고는 말씀을 듣지 않고 졸다가 죽었습니다. 시편 13:3에 보면 다윗은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라고 기도했습니다. 성도는 어떤 이유에서든 영적으로 잠자는 자리에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3. 유두고는 왜 졸았습니까?
유두고의 졸음 문제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이 언제 졸게 됩니까?
첫째, 몸이 피곤하면 졸게 됩니다. 아무리 안 졸려고 해도 육체적으로 너무 피곤하면 어쩔 수 없이 졸게 되는 것입니다. 이 유두고라는 청년도 나이가 젊은 사람입니다. 아마 일주일 내내 일을 많이 했는지 밤새워 놀았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지친 가운데 교회에 나왔는가 봅니다. 그런데 주일날 하루종일 말씀을 들으니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조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일날 예배드리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우리의 육체적인 컨디션이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건강하고 활기찬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려야 합니다. 자기 몸을 자기가 최대한 잘 관리해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지장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우선순위를 정해서 지혜롭게 일 처리해야 합니다. 무절제하게 생활하고, 자기 몸을 혹사하고, 일에 찌들게 만들고, 그래서 몸 상태가 형편없는 모습으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둘째, 마귀가 졸게 만들기도 합니다. 사람이 조는 것은 육체적인 피곤 때문에 졸기도 하지만 마귀가 은혜받지 못하게 하려고 졸게 만들기도 합니다. 마귀가 신령한 귀가 막히게 하고, 눈이 감기게 하고, 마음이 문이 닫히게 합니다. 고린도후서 4:4에 보면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예배 시간에 졸게 만드는 것은 마귀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상습적으로 조는 사람은 졸음이 마귀의 시험인 줄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비상한 결심과 각오를 가지고 졸음을 물리치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성도는 항상 말씀을 갈망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말씀이 꿀과 같이 달게 됩니다. 유두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도 없고 말씀이 귀한 줄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셋째. 유두고가 깊이 졸았습니다. 9절에 ‘깊이 졸았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유두고라는 청년이 졸기 시작해서 점점 그 졸음이 깊어져 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유두고는 자기가 졸면서 자기가 아는 것입니다. ‘아 졸린다.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계속 졸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내용을 보십시오.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이 말씀은 졸음을 이겨보려고 했는데 끝내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 졸음에 지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졸음에 삼키우고, 잡아먹혔다는 의미입니다. 졸음을 떨쳐버리고 일어났어야 했는데 그것을 못했습니다. 잠을 자든지, 술에 취하든지, 노름을 하든지, 방탕하든지, 죄를 짓든지.... 제 정신없이 엉망으로 살다가도 ‘이렇게 살다가는 내가 망하겠구나.’ 생각하고 비상한 각오로 그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그런 결심과 각오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유두고는 그것을 못 했습니다.
육체적인 잠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지으면서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계속 그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비상한 결심으로 털고 일어나지 못하고, 그냥 계속 끌려가다 보면 그것에 잡아먹힌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삼손을 보십시오. 삼손이 들릴라를 사랑했습니다. 불레셋 사람들이 들릴라를 이용해서 삼손의 힘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했습니다. 들릴라가 삼손에게 힘을 비밀을 물을 때 삼손은 몇 번이나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들리라는 계속해서 졸랐습니다. 삼손은 그때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끝끝내 들릴라의 무릎을 털고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결국 들릴라에게 힘의 비밀을 알려주고 들릴라의 무릎에서 잠을 자다가 머리 밀리고 눈 뽑히고 그러다가 결국 망했습니다. 좀 더 일찍 정신 차렸어야 합니다. 좀 더 일찍 털고 일어났어야 합니다. 유두고는 졸음이 밀려올 때 크게 각성하고 깨어났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한 채 잠에 삼키우고 말았습니다.
결론: 유두고가 있었던 그 3층 다락방에는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드리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떡을 떼는 신령한 교제가 있었고, 거기에 말씀 증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두고는 그 은혜의 자리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창문에 걸터앉았다가 떨어졌습니다. 졸음이 올 때 그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떨어졌습니다. “유두고”라는 이름은 ‘복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가 복된 자리에서 떨어져 죽어버렸으니 전혀 복되지 못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다시 살려주었으니 다행이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 될 뻔했습니다.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은 복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은혜의 자리에 불러 주셨습니다. 축복의 자리, 믿음의 자리, 은혜의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드로아’에 가서 일주일간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3층 다락에서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는데 사도 바울이 말씀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그 다음 날 떠나야 했기 때문에 저녁까지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유두고라는 청년이 창문에 걸터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다가 설교가 길어지자 졸다가 길바닥으로 떨어져 죽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러자 사도 바울이 죽은 이 청년을 다시 살려냅니다. 이 말씀은 여러 가지 각도에서 살필 수 있습니다만 오늘은 유두고가 3층 다락에서 떨어진 것에 초점을 맞추어서 살피겠습니다.
1. 유두고가 어디에서 떨어졌습니까?
7절에 보면 주간의 첫날에 모임이 있었습니다. 이날은 주일날입니다. 그러니까 주일날 성도들이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신약의 교회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모여 있는 그 연합체가 교회입니다. 그리고 모임의 장소가 어디입니까? 8절에 ‘윗다락’이라 했고, 9절에는 3층에서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모인 장소가 3층 다락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두고가 3층 다락에서 떨어진 것은 믿음의 공동체인 그 교회에서 떨어졌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떡을 떼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음식을 먹었다는 말이 아니고 성찬식을 거행했다는 뜻입니다. 성찬식의 떡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고, 포도즙은 예수님이 흘리신 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떡을 먹고 포도즙을 마시면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떡과 포도즙을 먹고 마실 때 주님과 신령한 영적 교통이 이루어지고 은혜를 받습니다. 또 떡을 떼면서 성도들과도 교제합니다. 그러므로 유두고가 3층에서 떨어진 것은 이런 신령한 교제가 있는 은혜의 자리에서 떨어져 분리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3층 다락에서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일은 말씀을 강론하는 일이었습니다. 7절 끝에 “그들에게 강론할새” 9절에는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강론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집회의 중심이 말씀 증거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시대가 흘러도 예배의 중심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예배에 기도도 하고, 찬송도 부르고, 헌금도 드리고, 여러 가지 순서가 있지만 그 여러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 증거입니다. 여러분, ‘드로아’라는 곳은 작은 도시입니다. 이런 작은 도시에 바울 같은 대 사도가 와서 말씀을 전하는 기회를 얻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드로아 성도들도 조금이라도 말씀을 더 들으려고 한 것 같고, 또 바울도 조금이라도 더 말씀을 전해서 성도들이 은혜받게 만들고 믿음에 굳게 서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 몸의 피곤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저녁까지 말씀을 전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시간에 유두고가 졸다가 떨어져 죽는 사고가 난 것입니다.
2. 유두고가 어쩌다가 떨어졌습니까?
9절에 “유두고라 하는 청년이 창에 걸터앉아 있다가 깊이 졸더니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삼 층에서 떨어지거늘 일으켜보니 죽었는지라”
첫째. 유두고가 창문에 걸터앉았습니다. 그곳은 사람이 앉는 자리가 아닙니다. 유두고의 그 자세에 문제가 있습니다. 몸이 절반은 예배당에 절반은 세상에 있는 상태입니다. 유두고의 영적인 자세, 정신적인 자세, 신체적인 자세에 문제가 있습니다. 태도가 나쁘면 아무리 노력하고 힘써도 안됩니다. 은혜받는 사람은 예배 시간에 교회에 나와서 그 앉는 자리와 자세가 벌써 다릅니다. 예배 시간 20-30분 전에 나와서 앞자리에 앉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은혜받을 준비를 합니다. 그러나 은혜받지 못하는 사람은 시간도 늦어지고 벌써 자리 앉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목사님의 눈에 안 띄는 자리를 골라서 앉습니다. 기둥 뒤에 자리 잡고 앉거나 덩치 큰 사람 뒤에 숨어서 앉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데 창문에 걸터앉았다는 것은 벌써 그 자세에 문제가 있습니다. 정상적인 자세가 아닙니다. 몸이 절반은 안쪽에 있고 절반은 바깥으로 나가 있는 것입니다. 이 유두고는 한쪽 눈으로는 사도 바울을 보고 있고 한쪽 눈으로는 바깥을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쪽 귀로는 말씀을 듣고 있고 한쪽 귀로는 저 밖에서 사람들 떠드는 소리 듣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 말씀에 집중할 수 없는 모습입니다. 어중간한 자세, 나누어진 시각, 나누어진 청각, 나누어진 마음, 이것은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고 극도로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한곳에 정신을 집중해도 뭐가 될까 말까 하는 판인데 나누어진 정신과 마음을 가지고는 뭘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는 하나님 앞에 앉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말씀 듣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시선을 설교자에게 집중하고 온 마음과 신경을 곤두세워서 말씀을 듣고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예의일 뿐아니라 은혜받는 올바른 태도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자세가 중요합니다. 태권도를 하든지 피아노를 하든지 바이올린을 하든지 수영을 하든지 자세가 중요합니다. 자세가 잘못되면 어떤 일에도 성공할 수 없습니다. 공부하는 것도 자세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 공부할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 믿는 것도 자세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 처음 시작할 때 바르게 딱 배운 사람은 얼마 안 가면 금방 성장하게 됩니다. 은혜받고자 하는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 잘 믿어야겠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예배 시간에 졸다가 떨어졌습니다. 정신 차리지 않고 조심하지 않다가 떨어졌습니다. 말씀 듣는 시간에 졸다가 떨어졌습니다. 일반적으로 잠은 꼭 필요하고 좋은 것입니다. 성경에도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때의 잠은 치명적일 수가 있습니다. 특히 영적으로 졸거나 자는 것은 치명적인 불행을 가져옵니다. 성경에 보면 자다가 크게 실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아’는 술에 취해 잠을 자다가 큰 실수를 했고, 롯은 소돔과 고모라 성이 망할 때 두 딸을 데리고 도망쳐 나온 후 딸들이 주는 술을 먹고 자다가 그 딸들과 관계를 맺고 모압과 암몬을 낳습니다. 삼손은 들리라의 무릎을 베고 잠을 자다가 머리 밀리고, 눈이 뽑히고, 블레셋 사람들의 종이 됩니다.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 밑층에서 잠을 자다가 책망을 듣습니다.
그러더니 오늘 본문에 유두고라는 청년은 예배 시간에 졸다가 3층에서 떨어져 죽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세상에 졸다가 죽은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자기가 죽는 줄로 모르고 졸다가 죽었습니다. 이처럼 영적으로 잠자는 것은 치명적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생명을 살리는 말씀을 전하고 있는데 유듀고는 말씀을 듣지 않고 졸다가 죽었습니다. 시편 13:3에 보면 다윗은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라고 기도했습니다. 성도는 어떤 이유에서든 영적으로 잠자는 자리에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3. 유두고는 왜 졸았습니까?
유두고의 졸음 문제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사람이 언제 졸게 됩니까?
첫째, 몸이 피곤하면 졸게 됩니다. 아무리 안 졸려고 해도 육체적으로 너무 피곤하면 어쩔 수 없이 졸게 되는 것입니다. 이 유두고라는 청년도 나이가 젊은 사람입니다. 아마 일주일 내내 일을 많이 했는지 밤새워 놀았는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지친 가운데 교회에 나왔는가 봅니다. 그런데 주일날 하루종일 말씀을 들으니 얼마나 피곤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조는 겁니다. 따라서 우리가 주일날 예배드리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우리의 육체적인 컨디션이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건강하고 활기찬 모습으로 주님 앞에 나와서 예배드려야 합니다. 자기 몸을 자기가 최대한 잘 관리해서 하나님을 섬기는데 지장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우선순위를 정해서 지혜롭게 일 처리해야 합니다. 무절제하게 생활하고, 자기 몸을 혹사하고, 일에 찌들게 만들고, 그래서 몸 상태가 형편없는 모습으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둘째, 마귀가 졸게 만들기도 합니다. 사람이 조는 것은 육체적인 피곤 때문에 졸기도 하지만 마귀가 은혜받지 못하게 하려고 졸게 만들기도 합니다. 마귀가 신령한 귀가 막히게 하고, 눈이 감기게 하고, 마음이 문이 닫히게 합니다. 고린도후서 4:4에 보면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예배 시간에 졸게 만드는 것은 마귀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상습적으로 조는 사람은 졸음이 마귀의 시험인 줄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비상한 결심과 각오를 가지고 졸음을 물리치고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성도는 항상 말씀을 갈망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말씀이 꿀과 같이 달게 됩니다. 유두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도 없고 말씀이 귀한 줄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은혜를 받지 못했습니다.
셋째. 유두고가 깊이 졸았습니다. 9절에 ‘깊이 졸았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것은 유두고라는 청년이 졸기 시작해서 점점 그 졸음이 깊어져 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유두고는 자기가 졸면서 자기가 아는 것입니다. ‘아 졸린다.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 계속 졸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내용을 보십시오. “바울이 강론하기를 더 오래 하매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이 말씀은 졸음을 이겨보려고 했는데 끝내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 졸음에 지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졸음에 삼키우고, 잡아먹혔다는 의미입니다. 졸음을 떨쳐버리고 일어났어야 했는데 그것을 못했습니다. 잠을 자든지, 술에 취하든지, 노름을 하든지, 방탕하든지, 죄를 짓든지.... 제 정신없이 엉망으로 살다가도 ‘이렇게 살다가는 내가 망하겠구나.’ 생각하고 비상한 각오로 그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그런 결심과 각오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유두고는 그것을 못 했습니다.
육체적인 잠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를 지으면서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계속 그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비상한 결심으로 털고 일어나지 못하고, 그냥 계속 끌려가다 보면 그것에 잡아먹힌다는 말입니다. 구약의 삼손을 보십시오. 삼손이 들릴라를 사랑했습니다. 불레셋 사람들이 들릴라를 이용해서 삼손의 힘의 비밀을 알아내려고 했습니다. 들릴라가 삼손에게 힘을 비밀을 물을 때 삼손은 몇 번이나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들리라는 계속해서 졸랐습니다. 삼손은 그때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끝끝내 들릴라의 무릎을 털고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결국 들릴라에게 힘의 비밀을 알려주고 들릴라의 무릎에서 잠을 자다가 머리 밀리고 눈 뽑히고 그러다가 결국 망했습니다. 좀 더 일찍 정신 차렸어야 합니다. 좀 더 일찍 털고 일어났어야 합니다. 유두고는 졸음이 밀려올 때 크게 각성하고 깨어났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한 채 잠에 삼키우고 말았습니다.
결론: 유두고가 있었던 그 3층 다락방에는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드리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떡을 떼는 신령한 교제가 있었고, 거기에 말씀 증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두고는 그 은혜의 자리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창문에 걸터앉았다가 떨어졌습니다. 졸음이 올 때 그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떨어졌습니다. “유두고”라는 이름은 ‘복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가 복된 자리에서 떨어져 죽어버렸으니 전혀 복되지 못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다시 살려주었으니 다행이지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 될 뻔했습니다.
여기 앉아 있는 여러분은 복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여 은혜의 자리에 불러 주셨습니다. 축복의 자리, 믿음의 자리, 은혜의 자리에서 떨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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