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16 주일오전예배 설교(마태복음 10장 24-33절/무엇을 두려워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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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0-08-16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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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26절, 28절, 31절에 3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다가 28절에서는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만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려면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으면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 없습니다. 두려워하는 것의 종이 되고 말 것입니다. 환난의 때에 믿음을 지키고 승리하려면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성도는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합니다.
1. 두려워하지 말라
첫째. 박해 고난입니다. 24절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여기서 ‘제자’나 “종”은 믿는 사람을 가리키고, ‘선생’이나 “상전”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제자가 선생보다, 종이 상전보다 나은 대접을 받으려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떤 대접을 받으셨습니까? 많은 고난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병든 사람 고치고, 기적을 베풀어 도와주고, 복음을 전하며 선을 행하셨는데 세상은 그런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우리 주인이신 예수님이 이렇게 미움을 받고 멸시 천대를 받았으니 우리가 핍박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세상은 교회를 미워합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이기 때문에 그냥 미워하고 핍박합니다. 요한복음 15:18-19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5절에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이 말은 제자들이 선생보다 고난이 컸으면 컸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만약 선생만큼만 고난을 당한다면 그것은 다행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바알세불을 힘입어 쫓아냈다고 악의에 차서 비난했습니다. ‘바알세불’은 귀신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욕을 들었다면 제자들은 더 심한 욕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아가면서 사람들로부터 “너 귀신 들렸다” “너 미쳤다” 이런 말 들은 적 있습니까? 아마 대부분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일생은 고난의 일생이었습니다. 사도들도 한평생 고난을 당하며 전도했습니다. 먼저 간 성도들도 대부분 고난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복 받기만 원하고 평안하기만 구합니다. 조금만 고난이 따르면 낙심하고 뒤로 물러서려고 하고, 조금만 힘들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예수님 믿는 것 때문에 고난을 당하면 복입니다. 교회 나가는 것 때문에 욕을 먹으면 복입니다. 말씀을 지키다가 고난을 당하면 영광입니다. 비난받고 욕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38절에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으니 우리도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버림을 당하고, 멸시 천대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고난과 핍박을 당할 때 예수님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26절에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보고 알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하고 핍박을 받아도 두려워 말고 당당히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억울한 것을 풀어주시고 진실을 밝혀주실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제자들이 전하는 그 복음이 반드시 알려지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대적들이 복음을 반대하고 감추려고 해도 결국은 다 드러나고 전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환란과 박해 속에서도 복음은 전파되고 하나님의 일은 성공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복음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27절에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어두운 데’는 골방을 가리킵니다. 골방에서 말해준 것을 세상에 나가서 전파하라는 뜻입니다. 귓속말로 들은 것을 많은 사람이 듣는 데서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핍박이 온다고 전파하는 일을 중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습니다. 씨를 뿌릴 때에 나지 아니할까 염려하지 말고 무조건 나가서 뿌려야 합니다. 뿌리기만 하면 하나님이 싹이 나고 나라게 하고 결실하게 합니다. 따라서 성공과 실패는 하나님께 맡기고 두려워하지 말고 나가서 복음을 전하면 어두운 세상에 복음의 빛이 비치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이 생명의 빛으로 나아오게 됩니다.
둘째. 사람입니다. 26절에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28절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핍박하며 위협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경우 사람을 두려워하다가 믿음을 지키지 못합니다. 사람이 두려워서 예수 믿는다는 말을 못하고, 사람이 두려워서 교회를 못 나오고, 사람이 두려워서 식사하면서 기도 못하고, 사람이 두려워서 전도 못하고, 사람이 두려워서 말씀을 지키지 못합니다. 잠언 29:25에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사람을 두려워하면 사람의 종이 됩니다. 사람을 의지하지도 말고 사람을 두려워하지도 마십시오.
시편 118:6-7에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성도를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여러분을 괴롭히고 위협하는 대적들을 하나님께서 다 막아주실 것입니다. 성도를 미워하는 자들을 다 심판하십니다. 모함을 당하고 억울함을 당할 때는 속상해서 어쩔 줄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아시고 도와주실 것입니다. 교묘하게 일을 꾸며서 해롭게 하고 성도를 죽이려 하지만 하나님은 다 아시고 보응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셋째. 죽음입니다. 29절에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앗사리온은 로마 동전의 명칭이며 데나리온의 10분의 1에 해당합니다. 당시에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고 하찮은 참새까지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돌보지 않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나를 돌보신다는 것을 정말로 믿는다면 뭘 두려워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30-31절에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여기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의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새까지 주관하시는 하나님, 머리털까지 세시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통해 구원한 성도를 왜 보호하여 주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죽으려고 해도 죽을 수 없고, 살려고 하여도 살지 못합니다. 살고 싶어서 산다면 죽을 사람 하나 없고, 죽고 싶어서 죽는다면 살 사람 하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을까봐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죽을까봐 걱정하는 사람은 자신을 참새만도 못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신명기 32:10에 보면 하나님은 성도를 눈동자처럼 지키신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신체 부위 중 가장 귀중하면서도 가장 약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눈동자입니다. 아주 예민하고 섬세한 부분이라서 작은 것에도 아주 쉽게 다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눈동자를 신비한 방법으로 보호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아무리 작은 그 무엇이라도 눈에 들어오려고 하면 눈꺼풀이 자동적으로 감겨 눈을 보호합니다. 이물질이 눈 안에 들어오려고 하면 눈썹과 속눈썹이 보호막이 되어 주며, 작은 먼지라도 들어갔다 싶으면 금세 눈물이 나와 먼지를 밖으로 밀어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여러분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것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무엇이 두렵습니까?
2. 두려워하라
28절에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3번이나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두려워하라고 말씀합니다.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한 분만을 두려워하라는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심판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그분을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이 온다고 그것을 두려워하며 예수님을 버리고 믿음을 버리면 하나님의 심판이 온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죽일 수 있는 하나님, 그리고 그 영혼을 지옥에 던져 멸할 수도 있는 하나님으로 믿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육신의 생명보다 영혼의 생명이 더 중하고 큽니다. 성도가 사람이 두려워서 진리를 양보하면 영적 생명의 역사가 중단되어 흑암을 만납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모세는 바로 왕을 한 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한 번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포로 생활하면서도 바벨론 왕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자굴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비난과 학대와 멸시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쫓겨나고 감옥에 갇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보다 크시고 전능하신 분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8:13에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그분만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두려워하는 것의 지배를 받습니다. 두려워하는 것의 종이 됩니다. 히브리서 2:15에 보면 사람들이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동안 마귀의 종노릇 합니다. 죽이겠다고 위협하면 무서워서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종살이하는 죄인들을 해방시켜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셔서 믿는 자들을 죄에서 해방시키고, 사망과 마귀의 세력을 멸하셨습니다. 세상의 권세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죽는 것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진리를 양보하지 말아야 합니다. 육신의 생명을 내놓고 신앙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살게 하십니다. 성도는 육신의 생명을 위해서 세상에서 살지 말고, 영의 생명을 위해서 영적 세계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죄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것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믿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고 세상의 쾌락을 기뻐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말씀을 어겨도 괜찮은 줄 알고, 죄를 지어도 괜찮을 줄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만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렇게나 살 수 없습니다.
벵겔이라는 신학자는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 두려움을 이기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늘 당당했습니다. 아부하거나 타협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칼도 죽음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까 그것이 두려울 뿐이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 비위 맞추려고 하다가 죄짓지 마십시오. 사람들 눈치 보다가 하나님께 버림당하지 마십시오.
32-33절에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믿는다고 시인하고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0:10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 당당하게 “나 예수 믿습니다. 나 교회 나갑니다.”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 믿음을 쓰지 못하고, 양심을 쓰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사람들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진리를 바로 증거하고 그리스도와 진리를 나타내는 길을 걸어가면 그 사람의 인격이 하늘나라에서 주님 앞에 인정을 받습니다.
33절에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입으로든, 삶으로든, 예수님을 부인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 그리스도와 진리를 부인하는 생활을 하면 하늘나라에서도 그 사람의 인격이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사람 앞에서 신앙 양심을 바로 쓰고, 그리스도와 진리를 증거하고 나타내는 생활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가서 큰 자로 인정을 받고 상급을 많이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 것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반면에 두려워하라고 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래야 경건하게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26절, 28절, 31절에 3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다가 28절에서는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만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려면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으면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 없습니다. 두려워하는 것의 종이 되고 말 것입니다. 환난의 때에 믿음을 지키고 승리하려면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성도는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해야 합니다.
1. 두려워하지 말라
첫째. 박해 고난입니다. 24절에 “제자가 그 선생보다, 또는 종이 그 상전보다 높지 못하나니” 여기서 ‘제자’나 “종”은 믿는 사람을 가리키고, ‘선생’이나 “상전”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제자가 선생보다, 종이 상전보다 나은 대접을 받으려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어떤 대접을 받으셨습니까? 많은 고난과 멸시와 천대를 받으셨습니다. 병든 사람 고치고, 기적을 베풀어 도와주고, 복음을 전하며 선을 행하셨는데 세상은 그런 예수님을 미워했습니다. 우리 주인이신 예수님이 이렇게 미움을 받고 멸시 천대를 받았으니 우리가 핍박을 받는 것은 당연합니다. 세상은 교회를 미워합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교회이기 때문에 그냥 미워하고 핍박합니다. 요한복음 15:18-19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25절에 “제자가 그 선생 같고 종이 그 상전 같으면 족하도다 집 주인을 바알세불이라 하였거든 하물며 그 집 사람들이랴” 이 말은 제자들이 선생보다 고난이 컸으면 컸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만약 선생만큼만 고난을 당한다면 그것은 다행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은 바알세불을 힘입어 쫓아냈다고 악의에 차서 비난했습니다. ‘바알세불’은 귀신의 왕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런 욕을 들었다면 제자들은 더 심한 욕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살아가면서 사람들로부터 “너 귀신 들렸다” “너 미쳤다” 이런 말 들은 적 있습니까? 아마 대부분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일생은 고난의 일생이었습니다. 사도들도 한평생 고난을 당하며 전도했습니다. 먼저 간 성도들도 대부분 고난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주님의 이름으로 복 받기만 원하고 평안하기만 구합니다. 조금만 고난이 따르면 낙심하고 뒤로 물러서려고 하고, 조금만 힘들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예수님 믿는 것 때문에 고난을 당하면 복입니다. 교회 나가는 것 때문에 욕을 먹으면 복입니다. 말씀을 지키다가 고난을 당하면 영광입니다. 비난받고 욕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38절에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으니 우리도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버림을 당하고, 멸시 천대를 당하고,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고난과 핍박을 당할 때 예수님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26절에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보고 알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하고 핍박을 받아도 두려워 말고 당당히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억울한 것을 풀어주시고 진실을 밝혀주실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제자들이 전하는 그 복음이 반드시 알려지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대적들이 복음을 반대하고 감추려고 해도 결국은 다 드러나고 전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환란과 박해 속에서도 복음은 전파되고 하나님의 일은 성공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복음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27절에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이르는 것을 광명한 데서 말하며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집 위에서 전파하라” ‘어두운 데’는 골방을 가리킵니다. 골방에서 말해준 것을 세상에 나가서 전파하라는 뜻입니다. 귓속말로 들은 것을 많은 사람이 듣는 데서 전파하라는 것입니다. 핍박이 온다고 전파하는 일을 중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습니다. 씨를 뿌릴 때에 나지 아니할까 염려하지 말고 무조건 나가서 뿌려야 합니다. 뿌리기만 하면 하나님이 싹이 나고 나라게 하고 결실하게 합니다. 따라서 성공과 실패는 하나님께 맡기고 두려워하지 말고 나가서 복음을 전하면 어두운 세상에 복음의 빛이 비치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이 생명의 빛으로 나아오게 됩니다.
둘째. 사람입니다. 26절에 “그런즉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28절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핍박하며 위협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경우 사람을 두려워하다가 믿음을 지키지 못합니다. 사람이 두려워서 예수 믿는다는 말을 못하고, 사람이 두려워서 교회를 못 나오고, 사람이 두려워서 식사하면서 기도 못하고, 사람이 두려워서 전도 못하고, 사람이 두려워서 말씀을 지키지 못합니다. 잠언 29:25에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사람을 두려워하면 사람의 종이 됩니다. 사람을 의지하지도 말고 사람을 두려워하지도 마십시오.
시편 118:6-7에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성도를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여러분을 괴롭히고 위협하는 대적들을 하나님께서 다 막아주실 것입니다. 성도를 미워하는 자들을 다 심판하십니다. 모함을 당하고 억울함을 당할 때는 속상해서 어쩔 줄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아시고 도와주실 것입니다. 교묘하게 일을 꾸며서 해롭게 하고 성도를 죽이려 하지만 하나님은 다 아시고 보응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셋째. 죽음입니다. 29절에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앗사리온은 로마 동전의 명칭이며 데나리온의 10분의 1에 해당합니다. 당시에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고 하찮은 참새까지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돌보지 않으시겠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나를 돌보신다는 것을 정말로 믿는다면 뭘 두려워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30-31절에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여기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의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참새까지 주관하시는 하나님, 머리털까지 세시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통해 구원한 성도를 왜 보호하여 주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죽으려고 해도 죽을 수 없고, 살려고 하여도 살지 못합니다. 살고 싶어서 산다면 죽을 사람 하나 없고, 죽고 싶어서 죽는다면 살 사람 하나 없을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그러므로 죽을까봐 두려워할 것 없습니다. 죽을까봐 걱정하는 사람은 자신을 참새만도 못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신명기 32:10에 보면 하나님은 성도를 눈동자처럼 지키신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신체 부위 중 가장 귀중하면서도 가장 약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눈동자입니다. 아주 예민하고 섬세한 부분이라서 작은 것에도 아주 쉽게 다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눈동자를 신비한 방법으로 보호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아무리 작은 그 무엇이라도 눈에 들어오려고 하면 눈꺼풀이 자동적으로 감겨 눈을 보호합니다. 이물질이 눈 안에 들어오려고 하면 눈썹과 속눈썹이 보호막이 되어 주며, 작은 먼지라도 들어갔다 싶으면 금세 눈물이 나와 먼지를 밖으로 밀어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여러분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것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무엇이 두렵습니까?
2. 두려워하라
28절에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3번이나 말씀하신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두려워하라고 말씀합니다.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 한 분만을 두려워하라는 말씀하십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심판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 그분을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이 온다고 그것을 두려워하며 예수님을 버리고 믿음을 버리면 하나님의 심판이 온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죽일 수 있는 하나님, 그리고 그 영혼을 지옥에 던져 멸할 수도 있는 하나님으로 믿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육신의 생명보다 영혼의 생명이 더 중하고 큽니다. 성도가 사람이 두려워서 진리를 양보하면 영적 생명의 역사가 중단되어 흑암을 만납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모세는 바로 왕을 한 번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한 번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포로 생활하면서도 바벨론 왕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사자굴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비난과 학대와 멸시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쫓겨나고 감옥에 갇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보다 크시고 전능하신 분임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8:13에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를 너희가 두려워하며 무서워할 자로 삼으라”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 그분만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두려워하는 것의 지배를 받습니다. 두려워하는 것의 종이 됩니다. 히브리서 2:15에 보면 사람들이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동안 마귀의 종노릇 합니다. 죽이겠다고 위협하면 무서워서 마귀가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종살이하는 죄인들을 해방시켜 주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셔서 믿는 자들을 죄에서 해방시키고, 사망과 마귀의 세력을 멸하셨습니다. 세상의 권세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죽는 것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진리를 양보하지 말아야 합니다. 육신의 생명을 내놓고 신앙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살게 하십니다. 성도는 육신의 생명을 위해서 세상에서 살지 말고, 영의 생명을 위해서 영적 세계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죄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는 것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믿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고 세상의 쾌락을 기뻐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말씀을 어겨도 괜찮은 줄 알고, 죄를 지어도 괜찮을 줄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만큼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렇게나 살 수 없습니다.
벵겔이라는 신학자는 이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 외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 외의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 두려움을 이기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늘 당당했습니다. 아부하거나 타협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칼도 죽음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았고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까 그것이 두려울 뿐이었습니다. 여러분 사람들 비위 맞추려고 하다가 죄짓지 마십시오. 사람들 눈치 보다가 하나님께 버림당하지 마십시오.
32-33절에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믿는다고 시인하고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0:10에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 당당하게 “나 예수 믿습니다. 나 교회 나갑니다.”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 믿음을 쓰지 못하고, 양심을 쓰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사람들 앞에서도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진리를 바로 증거하고 그리스도와 진리를 나타내는 길을 걸어가면 그 사람의 인격이 하늘나라에서 주님 앞에 인정을 받습니다.
33절에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입으로든, 삶으로든, 예수님을 부인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 그리스도와 진리를 부인하는 생활을 하면 하늘나라에서도 그 사람의 인격이 인정받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사람 앞에서 신앙 양심을 바로 쓰고, 그리스도와 진리를 증거하고 나타내는 생활을 계속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가서 큰 자로 인정을 받고 상급을 많이 받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 것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반면에 두려워하라고 한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래야 경건하게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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