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23 주일오전예배 설교(마태복음 5장 38-48절/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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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0-08-23 14:50
조회1,54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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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대표적인 교훈이 산상수훈입니다. 그 중에서 핵심적인 말씀 한마디를 꼽으라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가장 많이 알려지고 가장 중요한 말씀이지만 가장 지키지 못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사랑을 명령하셨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다 명령입니다. 우리는 보통 내 감정, 내 느낌에 따라 사랑할 마음이 생기면 사랑하고 안 생기면 사랑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랑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과연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 말씀을 지킬 수 있을까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성령으로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셨습니다. 구약의 요셉도 자기를 팔아먹은 형제들을 용서하고 사랑했습니다. 다윗도 평생의 원수 사울을 용서하고 사랑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도 자기를 죽이는 원수들을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한국의 손양원 목사님도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양자로 삼았습니다.
1.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가?
사람들은 보통 원수가 생기면 그 원수를 미워하고 멀리하려고 합니다. 말도 안하려고 하고, 만나지 않으려고 하고, 관계를 끊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까?
첫째. 사람과 막히면 하나님과 막히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담을 쌓고 살면 하나님과도 담이 쌓입니다. 마태복음 5:24에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원수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예배를 드려도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은혜가 되지 않고, 기도의 문이 막히고, 찬송이 사라집니다.
둘째. 45절에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 말씀은 원수를 사랑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니고,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아들의 자격을 갖추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 자녀의 품성이나 인격이나 자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아들의 자격을 갖출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을 닮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처럼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닮은 아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되려면 원수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셋째. 48절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여 하나님을 닮은 성숙한 사람,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2.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는가?
첫째, 복수하지 말라. 38절에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구약시대에 이 말씀을 주신 것은 이 말씀을 가지고 복수하고 보복하면서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재판관이 재판할 때 공정한 재판을 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즉 죄지은 것만큼만 벌을 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가지고 복수해도 되는 것처럼 잘못 가르쳤습니다. 구약에도 성경의 강조점은 개인적으로 복수하지 말고 원수 갚지 말라는 것입니다. 레위기 19:18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잠언 25:21에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39-41절에 보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 하셨습니다. 즉 복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손해 보더라도 같이 싸우지 말라는 뜻입니다. 참고 인내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의 원리로 살라는 것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에게 그냥 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대해주셨습니다. 아무 공로가 없고, 받은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만약 주님이 우리를 법적으로 잘했나 못했나 따져서 법대로 대하신다면 아무도 주님 앞에 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받아주셨습니다. 이유 없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죄를 그냥 용서해주셨습니다. 이것은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성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로 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상대방이 잘해주면 나도 잘해주고, 상대방이 못 해주면 나도 잘못하겠다는 것은 법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법대로 하면 원수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죽여야 합니다. 그러면 나도 죽습니다. 그것을 초월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잘해주든 못 해주든 은혜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믿음으로 살 수 없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없습니다.
둘째,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4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여기에 보면 막연히 ‘악인’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쉬웠을 것입니다. 저 감옥에 있는 살인강도를 사랑하라고 하면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악인은 나에게 직접 피해를 입힌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 원수' '너희를 박해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직접 피해를 입힌 자입니다. 따라서 엄청난 원한과 분노가 지금 내 가슴 속에 쌓여있습니다. 그런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가장 어려운 일이 원수를 사랑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명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고난받으실 때 사람들에게 침을 뱉음을 당했습니다. 욕을 하고 저주를 들었습니다. 뺨을 맞고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재판정으로 끌려가서 거짓 증인에 의해 죄인으로 몰렸습니다. 억울하게 사형 판결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양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고통을 당하면서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저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 죄로 인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는 우리를 위한 기도입니다.
이 은혜를 깨달으면 우리 안에 있는 미움이 사라집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으면 원한이 다 녹아버립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용서하는 것은 내 마음으로는 못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십자가로 가까이 가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안에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원수가 불쌍하게 생각됩니다. 나를 핍박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불쌍해 보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은혜가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이 하시는 것처럼 하라. 하나님은 악인을 어떻게 대하십니까? 45절에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하나님께서 햇빛을 비춰주실 때 예수님 믿는 사람에게만 비춰주시고 안 믿는 사람에게는 안 비춰주시는 것 아닙니다. 또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실 때 선한 사람에게는 비를 내려주시고 악한 사람에게는 비를 내리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외가 있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에게 재앙을 내릴 때 햇빛을 비추지 않고 3일간 흑암 재앙을 내린 적이 있고, 아합왕에게는 3년 6개월 동안 비를 내리지 않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악인과 선인을 구분하지를 않고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려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일방적입니다. 차별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는 크고 위대한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이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상대방에 의해서 흔들리지 말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넷째.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46-47절을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사람은 보통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이것은 본능적입니다. 끼리끼리 사랑입니다. 누구나 내 자녀, 내 부모, 내 형제는 자연스럽게 사랑합니다. 그런 사랑을 한다고 상 받을 수는 없습니다. 가장 큰 죄인으로 여기는 세리도 그런 사랑은 합니다. 또 자기 형제에게만 문안합니다. 친한 사람끼리만 인사하고 교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시하는 이방인들도 그 정도의 사랑은 다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자기 형제에게만 문안한다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십니다. 이런 사랑은 너무나 계산적이고 이기적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랑은 이런 사랑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더 큰 사랑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믿지 않는 사람 흉내도 낼 수 없는 그런 고상한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이해관계를 초월한 차원 높은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아무 조건 없이 하는 사랑, 원수까지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복을 빌어 주는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원수 사랑은 차원이 높은 사랑이며 위대한 사랑입니다. 로마서 5:10절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원수를 위해서 내가 죽는 사랑, 원수의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47절에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예수님은 우리가 남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세리나 창기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남보다 더 나은 사랑을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왜 우리는 남보다 더 사랑해야 합니까? 왜 남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배운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모시고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사들도 흠모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기서 한번 생각해봅시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은 사랑합니까? 내 가족과 형제에게는 제대로 문안합니까? 예수님께서 세리도 다 한다고 했던 그 사랑, 이방인도 다 한다고 말씀하신 그 정도의 사랑은 정말로 실천하고 있습니까? 너무나 인간적인 사랑이고, 본능적인 사랑이고, 이기적인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이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던 그 사랑은 참으로 실천하십니까? 우리가 여기서부터 출발합시다. 나를 사랑하는 내 가족, 내 형제, 내 교인을 사랑해야 합니다. 나에게 문안하는 내 이웃, 내 친척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단계를 뛰어넘어서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물을 마시게 합시다. 그리함으로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읍시다. 또한 나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의 성품과 인격과 자격을 갖춥시다.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을 닮아갑시다. 이렇게 한다면 주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감화를 줄 것입니다. 세상이 참으로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대표적인 교훈이 산상수훈입니다. 그 중에서 핵심적인 말씀 한마디를 꼽으라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가장 많이 알려지고 가장 중요한 말씀이지만 가장 지키지 못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사랑을 명령하셨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다 명령입니다. 우리는 보통 내 감정, 내 느낌에 따라 사랑할 마음이 생기면 사랑하고 안 생기면 사랑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랑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과연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 말씀을 지킬 수 있을까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나 성령으로서는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셨습니다. 구약의 요셉도 자기를 팔아먹은 형제들을 용서하고 사랑했습니다. 다윗도 평생의 원수 사울을 용서하고 사랑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도 자기를 죽이는 원수들을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한국의 손양원 목사님도 자기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양자로 삼았습니다.
1.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가?
사람들은 보통 원수가 생기면 그 원수를 미워하고 멀리하려고 합니다. 말도 안하려고 하고, 만나지 않으려고 하고, 관계를 끊어버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까?
첫째. 사람과 막히면 하나님과 막히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담을 쌓고 살면 하나님과도 담이 쌓입니다. 마태복음 5:24에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원수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예배를 드려도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은혜가 되지 않고, 기도의 문이 막히고, 찬송이 사라집니다.
둘째. 45절에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 말씀은 원수를 사랑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뜻이 아니고,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아들의 자격을 갖추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 자녀의 품성이나 인격이나 자격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아들의 자격을 갖출 수 있습니까?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을 닮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처럼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닮은 아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 되려면 원수를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셋째. 48절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말씀은 원수를 사랑하여 하나님을 닮은 성숙한 사람,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2. 어떻게 원수를 사랑하는가?
첫째, 복수하지 말라. 38절에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구약시대에 이 말씀을 주신 것은 이 말씀을 가지고 복수하고 보복하면서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재판관이 재판할 때 공정한 재판을 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즉 죄지은 것만큼만 벌을 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가지고 복수해도 되는 것처럼 잘못 가르쳤습니다. 구약에도 성경의 강조점은 개인적으로 복수하지 말고 원수 갚지 말라는 것입니다. 레위기 19:18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잠언 25:21에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39-41절에 보면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 하셨습니다. 즉 복수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손해 보더라도 같이 싸우지 말라는 뜻입니다. 참고 인내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의 원리로 살라는 것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자에게 그냥 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대해주셨습니다. 아무 공로가 없고, 받은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무조건적으로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주셨습니다.
만약 주님이 우리를 법적으로 잘했나 못했나 따져서 법대로 대하신다면 아무도 주님 앞에 설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받아주셨습니다. 이유 없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죄를 그냥 용서해주셨습니다. 이것은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를 받은 성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로 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상대방이 잘해주면 나도 잘해주고, 상대방이 못 해주면 나도 잘못하겠다는 것은 법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법대로 하면 원수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죽여야 합니다. 그러면 나도 죽습니다. 그것을 초월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잘해주든 못 해주든 은혜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믿음으로 살 수 없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없습니다.
둘째,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4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여기에 보면 막연히 ‘악인’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렇게 말씀하셨다면 쉬웠을 것입니다. 저 감옥에 있는 살인강도를 사랑하라고 하면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악인은 나에게 직접 피해를 입힌 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 원수' '너희를 박해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직접 피해를 입힌 자입니다. 따라서 엄청난 원한과 분노가 지금 내 가슴 속에 쌓여있습니다. 그런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가장 어려운 일이 원수를 사랑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명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받아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고난받으실 때 사람들에게 침을 뱉음을 당했습니다. 욕을 하고 저주를 들었습니다. 뺨을 맞고 채찍질을 당했습니다. 재판정으로 끌려가서 거짓 증인에 의해 죄인으로 몰렸습니다. 억울하게 사형 판결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양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고통을 당하면서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저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 죄로 인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는 우리를 위한 기도입니다.
이 은혜를 깨달으면 우리 안에 있는 미움이 사라집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으면 원한이 다 녹아버립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용서하는 것은 내 마음으로는 못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십자가로 가까이 가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 안에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원수가 불쌍하게 생각됩니다. 나를 핍박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불쌍해 보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은혜가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이 하시는 것처럼 하라. 하나님은 악인을 어떻게 대하십니까? 45절에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하나님께서 햇빛을 비춰주실 때 예수님 믿는 사람에게만 비춰주시고 안 믿는 사람에게는 안 비춰주시는 것 아닙니다. 또 하나님께서 비를 내리실 때 선한 사람에게는 비를 내려주시고 악한 사람에게는 비를 내리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외가 있습니다. 애굽의 바로 왕에게 재앙을 내릴 때 햇빛을 비추지 않고 3일간 흑암 재앙을 내린 적이 있고, 아합왕에게는 3년 6개월 동안 비를 내리지 않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악인과 선인을 구분하지를 않고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려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일방적입니다. 차별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 않는 크고 위대한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이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상대방에 의해서 흔들리지 말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넷째.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46-47절을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사람은 보통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이것은 본능적입니다. 끼리끼리 사랑입니다. 누구나 내 자녀, 내 부모, 내 형제는 자연스럽게 사랑합니다. 그런 사랑을 한다고 상 받을 수는 없습니다. 가장 큰 죄인으로 여기는 세리도 그런 사랑은 합니다. 또 자기 형제에게만 문안합니다. 친한 사람끼리만 인사하고 교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멸시하는 이방인들도 그 정도의 사랑은 다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자기 형제에게만 문안한다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십니다. 이런 사랑은 너무나 계산적이고 이기적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랑은 이런 사랑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보다 더 큰 사랑을 하기를 원하십니다. 믿지 않는 사람 흉내도 낼 수 없는 그런 고상한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이해관계를 초월한 차원 높은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아무 조건 없이 하는 사랑, 원수까지 사랑하는 그런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복을 빌어 주는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원수 사랑은 차원이 높은 사랑이며 위대한 사랑입니다. 로마서 5:10절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원수를 위해서 내가 죽는 사랑, 원수의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47절에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예수님은 우리가 남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세리나 창기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남보다 더 나은 사랑을 실천하기를 원하십니다. 왜 우리는 남보다 더 사랑해야 합니까? 왜 남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배운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령을 모시고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천사들도 흠모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기서 한번 생각해봅시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은 사랑합니까? 내 가족과 형제에게는 제대로 문안합니까? 예수님께서 세리도 다 한다고 했던 그 사랑, 이방인도 다 한다고 말씀하신 그 정도의 사랑은 정말로 실천하고 있습니까? 너무나 인간적인 사랑이고, 본능적인 사랑이고, 이기적인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수님이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던 그 사랑은 참으로 실천하십니까? 우리가 여기서부터 출발합시다. 나를 사랑하는 내 가족, 내 형제, 내 교인을 사랑해야 합니다. 나에게 문안하는 내 이웃, 내 친척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단계를 뛰어넘어서 원수를 사랑해야 합니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물을 마시게 합시다. 그리함으로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읍시다. 또한 나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의 성품과 인격과 자격을 갖춥시다.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을 닮아갑시다. 이렇게 한다면 주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감화를 줄 것입니다. 세상이 참으로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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