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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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7 수요저녁예배 설교 (롬 7ㅣ15-25 / 신자의 내적 투쟁)(윤성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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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4-04-17 21:23 조회3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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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링크 : https://youtu.be/ilKDsXEmmVI?si=R7gcWx-zTW4A7SKu


14-25절은 현재시제로 기록되어 있고, 7-13절까지는 과거시제로 되어 있다.  

전체인 나, 중생한 나, 부패성에 해당되는 나가 있다. 

죄에 대해서 합리화하는 듯한 표현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제는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17)

죄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고 내 속에 거하는 죄가 짓는다고 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롬 7:19)

자기가 원하는 것은 선인데, 원치않는 악을 행한다고 했다. 분명히 잘못된 것인데 내 책임이 아니라 내 속에 거하는 죄가 문제라는 뉘앙스이다. 마치 자기에게는 책임이 없고 죄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처럼 보인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롬 7:24~25)

곤고하다고, 아무 희망이 없는 절망 상태를 표현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본문은 혼란스럽고 어려운 면이 있다. 


본문은 영이 아니라 몸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롬 7:5)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롬 8:23)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롬 7:15)

15절에 행한다는 것이 3번 나오고 그 다음 절에 계속해서 행한다는 말이 나온다. 몸으로 행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적 싸움이고, 갈등을 느끼는 부분에 있어서 뭔가 다른 존재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쉽게 생각해서 믿지 않는 사람도 마음에 갈등이 있다. '할까, 말까'라는 내적 갈등이 있다. 믿는 사람에게도 수준이 다른 면에서의 갈등이 있는 것이다. 죄에 미혹을 당해서 죄를 짓기도 하고, 한면으로는 절대 선을 이루고자 하는, 죄를 범하지 않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는데, 이 둘이 싸우고 있다. 

본문은 현재시제를 사용하고 있다. 사도바울이 현재 자기가 느끼는 것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과거에 죄에 대해서 갈등을 많이 느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은 후에, 나이가 많이 들은 상황에서 죄에 대한 갈등을 지금도 느끼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지금 느끼는 것을 우리도 느낄 수 있다. 정말 내가 구원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느끼는 갈등이 있다.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높은 수준의 뜻을 이뤄드리기 위한 갈등이 있다.

사도바울이 이런 문제로 인해 고민과 갈등이 많았다. 물론 갈등으로 끝나지 않고 25절에 하나님께 감사를 말하고 있고, 8장에서는 성령의 도움을 받아 영적 싸움을 해나가는 것을 말한다. 


14절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기에 신령한 것이고, 영적인 것이고,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다. 율법 안에는 하나님의 속성이 담겨져 있고 선한 목적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하게 받아들여야지 무겁게 힘들게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면이 있다.

"팔렸도다" 노예 시장에서 노예를 사고 팔고 할 때 팔렸다는 의미이다. 노예는 주인에게 가서 평생 종노릇을 해야 한다. 육신에 속하여서는 평생 종노릇을 하게 생겼다고 말한다. 어쩔 수 없이 죄의 종으로서 죄를 지을 수 밖에 없고 자기의 의지와 실력으로는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15절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만약에 우리가 술먹고 나쁜 짓 해놓고 나는 모르겠다고 하는 것과 같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데 뜻대로 잘 안된다. 노력은 하지만 꾸준하게 가는 것이 쉽지 않다. 죄를 미워하는데 계속 죄를 짓게 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에게 그것이 무슨 죄인지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바울도 그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이다. 왜 원하지 않는 죄를 계속 짓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우리와 똑같다. 참 성도는 말씀대로 살고 싶고 말씀을 잘 지키고 싶고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데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온갖 문제가 일어나고 시끌벅적하다. 왜 그렇게 되는가? 왜 내가 원하는대로 되지 않는가? 인간의 본성에 내재되어 있는 죄성때문이다. 죄라는 것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다. 인간이 이렇게 연약하다. 자기 속에 있는 죄성이 자꾸 죄를 짓게 만든다. 


16절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행하면" 죄를 짓게 되면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라고 했다. 율법은 하나님의 법이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기준이 된다. 죄를 죄로 드러나게 한다. 그래서 율법은 선한 것이다. 누군가가 잘못했는데 쓱 덮어주고 아니라고 하면 그것은 선한 것이 아니다. 의롭지 않다. 율법은 누군가 죄를 지으면 죄인이라고 정죄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것이다. 


17절

그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라고 했다. 내가 아닌 다른 뭔가가 있는데 내 속에 있는 죄가 나로 죄를 짓게 한다고 했다. 내부에 존재하는 죄의 세력에 나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든다는 것이다. 


18절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육신에는 선한 것이 없다. 육신은 살덩어리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육신을 가진 인간에게는 죄의 본성이 있다.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죄의 본성으로부터 해방받지 못한다. 죄가 자꾸 나를 죄짓게 하고 잘못된 길로 가게 하고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고 인간관계를 흐뜨러 뜨린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자를 가리켜 중생했다고 한다. 중생한 영 안에는 죄가 없다. 중생한 영을 따라 살면 선을 행할 수 있는데 그것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게 하는 죄의 본성이 있다. 육신으로 선을 행해야 하는데 육신에는 부패한 죄성이 있어서 육신을 불의의 무기로 사용하게 된다.

믿는 자는 우리 몸을 의의 병기, 의의 도구로 하나님께 드려서 쓰임을 받아야 하는데, 육신을 가지고 자꾸 죄의 본성에 사로 잡혀서 끌려 다니면서 종노릇을 하고 있다. 그래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라고 탄식한 것이다.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원하지만 선을 행하지 못하는 자신이 답답한 상황이다. 

신앙생활을 오래 했으면 우리가 그만큼 많이 변화되어야 한다. 1년에 주일오전예배만 따져도 52개 주제의 말씀을 배운다. 우리가 52가지를 고친다면 얼마나 많이 변화가 되었겠나? 10년이면 520개의 주제를 배운다. 그런데 별로 변화된 것이 없다. 


19절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것만 자꾸 한다. 그래서 어렵다는 것이다. 물에서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처럼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원하는 것은 물이 위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힘든 것이다. 속에 갈등이 없이 편하게 신앙생활 하는 것은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세상적으로 물질적으로 손해를 보더라도 믿음을 잘 지켜야 한다. 자존심을 양보하더라도 상대를 위해서 희생해야 한다. 내 자존심과 주장을 내세우고 나를 앞세우면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릴 수 없다. 

우리는 신자로서 마땅히 선을 행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욕구로 일어나야 한다. 그런데 자신의 의지와는 반대로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하고 있다. 내적 갈등이 심할수록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있다. 평범하게 살면 그냥 사는 것이다.

오늘을 돌이켜보면 내가 얼마만큼 하나님과 동행했을까? 하나님의 뜻을 이뤄드렸을까? 하나님께 충성하며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 얼마나 양심적으로 살고 있는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는가? 별로 생각하지 않고 왔다면 나도 모르게 시간 낭비하고 마귀에게 삶을 빼앗긴 것이다.

직장에서 일을 할 때에도 하나님이 맡기신 일이라고 생각하고 충성을 다하고, 사람을 만나도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면서 존경하는 등 믿음으로 살아가면 원치 않는 바 악을 행하는 것과 싸워서 승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 때 많은 저항이 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헤쳐 나가야 한다. 


20절

죄를 짓는 것은 내가 아니고 내 속에 있는 죄라고 했다. 완전히 구분하고 있다. 내가 아니고 죄다! 내가 아니라는 것은 거듭난 사람이 가진 중생한 영을 말하는 것이다. 중생한 영은 항상 선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간다. 그런데 부패성, 인간의 죄성은 자꾸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게 한다. 세상적인 것을 사랑하게끔 끌고 간다. 명예, 영광, 물질을 사랑하게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게 하는 것을 사탄이 역사하고 있다. 


21-23절

"한 법"이 나온다. 22절에도 "하나님의 법"이 나오고, 23절에도 "한 다른 법"이 있다고 했다. 우리 몸 자체가 죄 덩어리는 아니지만 때에 따라서는 유사하게 생각해도 된다. 자꾸 죄짓고 욕심대로 살고 싶고 편안함만 추구하려고 한다. 법이라는 것은 율법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세력을 의미한다. 지배하는 힘이다. 두 세력이 서로 지배하려고 싸운다. 주도권 싸움을 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몸이 어디에 사용되는가가 결정되는 것이다. 중생한 영을 따라 살면 선을 행하게 되어 있고 죄성을 따라 살면 죄를 짓게 된다.

지금 나를 지배하는 것이 무엇인가? 죄를 짓고 있다면 죄 아래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안살고를 떠나서 믿지 않는 자는 아무리 착하고 선한 일을 해도 하나님의 원수이다. 착한 일을 한다고 해서 그것을 인정받아서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4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원하지 않는 것을 행하는 것 때문에 너무나 곤고하다고 절망적으로 말하고 있다. 정말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사람은 죄를 지었을 때 탄식이 나올 것이다.

우리는 순수하지 못하다. 믿음을 지키려고 하지만 소고기에 마블링이 섞여 있는 것처럼 또 다른 마음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을 사도바울은 철저하게 깨달았기 때문에 절망 속에서 외치고 있다. 오죽했으면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을 썼겠나? 우리 중에 죄인 중에 괴수가 있는가? 바울은 자신의 내면을 살펴볼 때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얼마나 철저하게 회개했겠는가? 이런 마음이 없으면 적당하게 믿음생활을 하는 것이다. 

내적 갈등을 많이 느껴야 한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수 있을까? 나에게 맡겨주신 일에 충성을 다하고 한 말씀이라도 지키려고 노력하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을까? 사람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께 충성된 삶을 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이 사망의 몸에서" 죄에게 패배하는 절망 가운데서 외치고 있다. 죽을 때까지 이 싸움이 반복될 것이다. 그러니까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을지언정 죄와 싸워야 한다. 


25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절망적인 절규를 하다가 180도 바뀌어서 하나님께 감사를 하고 있다. 예수님으로 인해 모든 죄를 사함받고 구원받게 되었다. 우리에게 희망을 주실 수 있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24절의 한탄 속에서 구원해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님 밖에 없다.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중생한 영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려고 하고 죄의 본성은 죄의 지배를 받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죄를 짓는 것을 합리화하는 말씀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갈등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죄의 세력이 싸우눈데, 우리가 믿음으로 항상 승리해야 한다.

죄에게 지지 않는 방법은 오직 주님께만 있다. 주님의 사랑과 은혜와 보살핌과 동행해주심과 보혜사 성령님의 도우심을 충분히 알면 알수록,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추악하고 더러운지 뼈저리게 느낄수록, 그 은혜에 감격해서 승리의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사도바울은 아주 의지력이 강한 자였다. 그런데도 이런 고백을 하고 있다. 우리가 조금 뭘 한다고 해도 그게 다가 아니다. 어떤 말씀을 지킨다고 해서 괜찮고 좋은 믿음을 가졌다는 생각도 갖지 말아야 한다.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님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으로 우리 신앙이 점점 성장해 나가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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