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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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24 수요저녁예배 설교 (롬 8:1-17 / 영으로 사는 생활)(김희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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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4-04-24 21:35 조회29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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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링크 : https://youtu.be/sWe1tuZaraE?si=9uyiWk1aBUhpa2fg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신자의 내적 투쟁"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7장 19절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성도 안에는 새사람과 옛사람이 있습니다. 새사람은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주장을 받는 중생한 영을 가리키고, 옛사람은 부패한 육신의 소욕을 따르는 죄의 본성을 가리킵니다. 성도 안에서는 매일 매순간 이 둘이 갈등하고 싸웁니다. 그래서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전쟁터와 같습니다. 그런데 참된 성도라면 이 싸움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싸움이 없다면 참된 성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바울은 원치 않는 죄를 짓는 자신에 대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괴로워하며 한탄했습니다(24절). 성도에게는 이 절규가 있어야 합니다. 죄를 짓는 자신의 부폐성과 연약함으로 인한 한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24절로 7장을 마무리 하지 않고 25절로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성도에게는 24절의 절규가 있어야 되지만, 동시에 25절의 감사 찬송도 있어야 합니다. 24절의 절규가 가슴을 치며 괴로워하며 눈물을 흘리는 처절한 울부짖음이지만, 25절의 찬송은 이를 다 덮고도 남을 정도의 환희의 기쁨이 충만한 감사의 외침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모든 것을 다 덮습니다. 구원의 은혜가 덮지 못할 죄의 허물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은혜를 참으로 깨달은 자는 범사에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며 쉬지 않고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바울은 성도 안에 있는 옛사람의 소욕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습니다. 육신의 부패성, 죄의 본성의 존재를 인정합니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죄의 본성 존재 자체를 부정하면 오히려 죄에 대해서 대응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을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주장을 받는 중생한 영의 새사람으로 이겨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바울이 1절에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중생한 성도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받은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결코 없다는 것은 과거의 죄, 현재의 죄는 물론이고, 앞으로 짓게 될 미래의 모든 죄 까지도 다 해결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과거에 지었던 죄, 지금까지 짓고 있는 죄까지 용서받는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짓는 죄들에 대해서는 그때그때 죄를 고백하고 회개해야지만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혹시라도 죄를 지어놓고서 죄를 잊어버렸거나 회개하지 않은 채로 생을 마감하게 되면 그 죄를 용서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죄 때문에 지옥에 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천주교 같은 경우도 이런 식의 구원관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이 자기에게 달려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내가 믿고 내가 회개해야 구원을 받고 죄를 고백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라고 못을 박습니다. 이렇게 "결코 정죄함이 없는" 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와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에 기쁨으로 예배와 찬송과 기도와 봉사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결코 정죄함이 없는 구원이 아니라, 그때 그때 죄를 해결해야 되는 구원이라면 죄를 지을 때마다 죄책감에 빠지고 형편없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고 자신은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충성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서 오히려 교회와 멀어지고 믿음이 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마귀가 노리는 것이 이런 부분입니다. '너까짓게 무슨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너같은게 무슨 자격으로 봉사를 해! 너나 잘해!' 

그러나 완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자격이 있어서 구원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 실력으로 직분을 맡은 자도 없습니다. 바울도 자신에 대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한탄을 했습니다. 우리 중에 바울보다 더 나은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은 후로도 매일 매일 죄를 짓고 있고 오늘도 죄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계속해서 반복해서 죄를 짓고 있는 자신을 바라볼 때 우리는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인 것처럼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런 자격이 없고 형편이 없고 어리석고 연약한 나 같은 사람까지도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같은 사람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나까지도 불러주셔서 복용교회의 성도가 되게 하시고 이런 저런 모양으로 직분을 주시고 감당할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정죄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과 연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실 때 예수님 안에 있는 자로 바라봐야 되겠습니다. 다시 말해 완전히 죄 없는 자로, 의로운 자로, 하나님의 아들로 봐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나를 바라보지 말고, 예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나같은 사람까지도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주장을 받는 중생한 영의 새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부분입니다. 


2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결코 정죄함이 없는 이유를 말씀합니다. 

2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기서 말하는 "법"은 율법이 아니고 원리, 법칙, 권세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2절을 다시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권세와 능력이 죄와 사망의 권세에게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가 됩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는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그 죗값으로 죽어야 됩니다. 이 죽음은 육신의 죽음 뿐 아니라 영의 죽음, 지옥에서의 영원한 죽음까지를 포함합니다. 모든 인류는 이 죄와 사망의 권세에 억눌려서 고통당하고 두려워 떨면서 살아왔습니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두려움의 대상은 죽음입니다. 마귀는 이 죽음이라는 무기로 사람들을 괴롭혀 왔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생명의 성령의 권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죄와 죽음과 마귀의 권세를 다 이기시고 부활 승리하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서 완전히 깨뜨려 졌습니다. 전에는 죄와 사망과 마귀에게 종노릇하던 자들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마귀의 종노릇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렇게 죄와 죽음과 마귀에게서 해방된 자가 영을 따라 살아야 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3-4절 “[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간단히 말해서 율법이 못한 것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못한 것이 무엇일까요? 4절 끝에 보면 율법의 요구가 나와있습니다. 율법의 요구는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육신의 소욕을 따라서 죄를 짓지 말고 성령님의 인도와 주장을 따라, 중생한 영의 새사람의 소망을 따라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하는 것이 율법의 요구입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삶의 지표와도 같습니다. 율법에는 하나님의 의롭고 선하신 거룩한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율법의 요약은 십계명이고 십계명의 대강령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육신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는데 실패했습니다. 부패한 죄성을 가진 육신으로는 모든 계명을 지킬 수 없을 뿐 아니라 단 하나의 계명도 완전히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율법으로 인해 정죄받고 죄의 형벌인 육신의 죽음과 영적 죽음인 지옥형벌을 받아야 하는 형편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실패한 일을 하나님께서 해주셨습니다. 그 방법은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의 죄를 정하신 것"입니다. 독생 성자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육신의 죄를 정"하셨습니다. 육신의 죄를 정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정죄받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에게 우리의 모든 죄로 인한 유죄 판결이 내려졌고, 사형이 선고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 때문에 정죄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렇게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대신 정죄받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4절에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게 하려고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목적이 단순히 우리의 구원이 아닙니다. 우리를 거룩하고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려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롭고 선하고 사랑이 넘치는 거룩한 삶을 살게 하려고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이 땅에 사시는 동안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해주시기 위해서만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된 자가 살아가야 할 거룩한 삶의 모범도 보여주셨습니다. 이 진리를 깨달은 자는 육신을 따르지 말고 영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5-6절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성도가 죄악된 본성을 따르면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런데 성도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에 사망의 형벌을 받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죄를 짓는 그 순간만큼은 영이 죽은 죄인같은 상태가 됩니다. 마치 잠을 자고 있는 자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영적 무능의 상태가 됩니다. 반대로  성령님을 따라 살게 되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릴 수 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주장을 받는 중생한 영을 따라 살면 생명과 평안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삶이 활기가 차고 보람이 되고 마음에 기쁨과 만족이 넘치는 상태가 됩니다. 


7-8절 “[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8]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육신의 죄악된 소욕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죄악된 결과를 낳을 뿐입니다. 혹시라도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는 것이 있다면 완전히 착각하고 있는 것이니까 얼른 그만두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자기 생각에 이게 옳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생각이 아무리 옳은 것 같다고 느껴지고, 기도 응답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도 말씀에 맞지 않으면 잘못된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절대로 말씀에 맞지 않는 감동을 주시지 않습니다. 내가 가진 어떤 생각이 성령님의 감동인 것 같다는 기분이 강하게 들어도 말씀에 맞지 않으면 그건 내 고집 아니면 마귀가 주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내 생각, 성령님의 감동이 아닌 내 생각만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영을 따라 살수 있는 자, 영의 생각을 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인지 가르쳐줍니다. 


9-11절 “[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9절에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11절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은 모두 성령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 안에는 성령 하나님이 내주하십니다. 성령님이 내주하지 않는 자는 절대로 구원받은 자가 아닙니다.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을 주라 믿을 수 없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습니다. 성령님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릴 수 없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없습니다. 성령님의 내주하심은 구원의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10절에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이라고 했는데, 부활하신 주님은 승천하셔서 지금 하늘보좌에 앉아 계시는데, 어ᄄᅠᇂ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실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님을 통해 신성으로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10절의 말씀대로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자는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이 된 자,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심으로 그리스도께서 안에 계시는 자가 되면 죄의 소욕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은 것이 되고, 영은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하여 영원토록 살게 됩니다. 


그리고 11절 끝에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죄의 소욕을 따라 살게 되면 육신이 죄의 도구가 되고, 사망의 종노릇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주장을 충만히 받아 살게되면 사망의 종노릇을 하던 몸이 점점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게 되고 성화를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받았으며, 성령님의 내주하심으로 인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구원의 확신을 가진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다시 한번 강조해서 말씀합니다. 


12-13절 “[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바울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가 빚진 자라고 말합니다.

누구에게 빚을 진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의 빚을 진 것이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빚을 진 것이고, 성령님의 내주하심에 빚을 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을만한 일을 한 것이 없고, 성령님을 마음에 모시기에 한없이 더럽고 부족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와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 빚을 어떻게 하면 갚을 수 있을까요? 

우선 분명하게 해야 되는 것은 우리가 육신에게 빚을 진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육신에게 빚을 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육신대로 살 의무도 없습니다. 육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육신의 소욕대로 죄를 짓고 산다고 해서 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죽는다고 한 것은 영적 능력을 잃고 영적 생명력을 상실한 자처럼 영적인 잠을 자고, 영적으로 병든 상태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그 순간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육신에게 빚진 자처럼 육신을 따라 살지 말고, 오히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합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라고 했습니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주장을 받는 중생한 영으로 육신의 소욕을 제어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려고 하면 안됩니다. 내 의지와 내 생각과 내 고집으로는 몸의 행실을 죽이지 못합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라는 것은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주장을 잘 받되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께서 내가 평상시 읽고 배웠던 말씀이 생각나게 해주시고, 예배시간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감동하시고, 곁에 있는 사람들과 사건들을 통해 감동하십니다. 성령님은 매 순간 우리가 몸의 행실을 죽이고 믿음으로 승리하기를 원하시고 끊임없이 감동하십니다. 하나님의 감동에 우리가 반응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와 주장을 바르게 인식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감동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해 버리면 믿음의 바른 길로 갈 수 없습니다. 


골로새서 1장 29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사도바울이 자기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주장을 따르기 위해 힘을 다해 수고하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언제나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주장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를 가리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바른 믿음인지,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느냐?’를 잘 따져보면 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고 말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예배도 드리고, 찬송도 부르고, 기도도 하고, 봉사도 하는데 만약에 교회생활 말고, 평상시 생활 가운데 성령님의 인도와 주장을 전혀 받지 않고 있다면, 성령님의 감동을 받는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면, 하나님의 뜻과는 아무 상관없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닐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아들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15절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도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을 가리켜 "종의 영"이 아니고 "양자의 영"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는 예수님과 연합하여 모든 죄를 용서받고 모든 율법적 요구에서 놓임을 받아 이제 더 이상 죄와 율법의 종노릇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가리켜 "양자의 영"이라고 부른데에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져 있습니다. 양자가 되었다는 것은 입양되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입양되었다는 것은 아무도 하나님의 친자식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지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필연적인 부자관계가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래 우리는 영적인 고아들이고, 죄의 노예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입양받는 입장에서 나를 입양해 달라고 요구할 수 없습니다. 입양은 전적으로 부모 입장에서 일방적으로 비싼 대가를 지불하는 법적인 행위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들이 양자의 지위를 얻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들의 신분은 주어지는 것이지 자기가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자동차를 널리 대중화 시킨 헨리 포드를 가리켜 자동차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논리입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그렇게도 말할 수 있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받은 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자에게만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붙여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렇게 구원의 확신을 가진 자,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자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대개 어린 자녀들은 아버지라는 호칭보다는 "아빠"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합니다. 아빠가 아버지에 비해서 더 친근한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본문에서 아빠는 아람어로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아빠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는 파파라고 하고, 일본에서는 빠빠라고 합니다. 이렇게 다 비슷한 발음을 하는 것은 사람의 본능적인 부분인 것 같습니다. 이병규 목사님은 에덴동산의 말인 듯 하다고 하셨습니다. 

어린 아기가 본능적으로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는 것과 같이 성도는 중생한 영의 본성으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부르짖는다는 표현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이 표현을 사용한 것입니다. 참된 성도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뿐 아니라 큰 소리로 외칩니다. "아빠! 아버지!" 하나님을 아버지로 확실하게 믿는 사람만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예담이가 다른 남자 어른을 보고 아빠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저한테만 아빠! 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압니다. 단순히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신학적으로,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알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쁨으로 예배드릴 수 있고, 자발적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16절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기 때문입니다. 참된 성도는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령님의 인도와 주장하심이 느껴지는 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확실하게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끔 강하게 감동하시고, 죄악된 생각이나 행동이 나올 때 양심에 강하게 가책을 주시는 것을 통해 성령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느낍니다. 잘못된 길로 가려고 할 때 그 길로 가지 않도록 막아주시고, 선한 길로 가려고 할 때 그 길로 인도하시고 이끌어주시는 경험을 할 때마다 성령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성령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과 감동을 느끼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된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17절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하나님의 자녀된 자는 하나님의 상속자라고 말씀합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장자가 상속자였습니다. 부모가 여러 자녀를 사랑한다고 해도 상속자가 가문의 이름을 이어가고 재산의 가장 큰 몫을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 모든 성도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상속자라고 부릅니다. 구원받은 모든 성도가 상속자이기 때문에 더 많이 상속받으려고 싸우거나 경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야곱와 에서의 불상사가 성도에게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성도 한사람 한사람을 위해서 준비되어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상속물이 너무나 크고 영광스러워서 각자가 자신이 하나님께 가장 많은 상속을 받은 것이라고 느낄 정도일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의 말씀이 이어서 나옵니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우리 가운데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자 상속자로서 영광스러운 기업을 기대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난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연단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버지들은 항상 자녀들을 단련시킵니다. 부모는 자녀를 단련시킬 때 나중에 훨씬 더 큰 고난을 초래하게 될 행동을 하지 않도록 가벼운 고난을 먼저 허락합니다. 그래서 집안에서 잘못하는 것들이 있으면 그 잘못을 지적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해주는 일을 합니다. 

히브리서 12장 8-10절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좋은 아버지는 사랑으로 자녀를 단련시킵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허락하시는 단련을 통과하는 것은 힘겨운 일이지만 이것은 성도만 누릴 수 있는 영광스러운 특권입니다. 

17절을 다시 보면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받는 고난 중에는 그리스도의 형제이기 때문에 함께 겪는 고난이 있습니다. 

2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신 목적 가운데 하나는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비록 양자이지만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심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그분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점점 닮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한 가족이 된 자로서 같은 고난을 당하면서 점점 더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성격과 태도를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처럼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으로 사는 생활을 하기 위해 더욱 힘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주장을 잘 받아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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