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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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12 수요저녁예배 설교(롬 11:1-2 / 이스라엘과 이방인 구원)(윤성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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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4-06-12 21:41 조회29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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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링크 : https://youtu.be/OcnnvnWdTWA?si=bBid-5NlO0UNmDU1


로마서를 통해 지금까지 배운 내용은 어찌 보면 다 알고 있는 내용들이다. 초신자 같은 경우는 잘 모른다 하더라도 신앙의 연조가 있는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과 주님이 이루신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것을 잘 알고 믿고 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과 이방인 성도들에게 있어 구원의 교리를 잘 이해하기 어려웠다.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상당히 어려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잘못된 율법관에 대해서 바로 잡아주기 위해서 가르쳐주실 때마다 많은 반대에 부딛혔고 심한 박해와 고난을 당하시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도바울이 이 문제를 깊게 다루고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신앙을 정립할 수 있게 되었다.

구원에 대한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이단에 넘어가기 쉽다. 


1절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버리셨느냐?" 이스라엘이 불순종하는 죄를 지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셨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내용을 끝까지 이루어 가신다.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예로 바울이 자신을 들어서 증언을 한다. 바울은 성도를 핍박하므로 예수님을 핍박하는 죄를 지었다. 그럼에도 주님은 바울을 불러서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세우셨다. 바울은 참 이스라엘 백성이다. 그는 정통 이스라엘 혈통의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이다. 베냐민 지파라고 한 것은 남 유다에 속했다는 것을 가리킨 것이다. 특별히 베냐민은 가나안에서 출생했다. 그리고 초대 왕인 사울이 베냐민 지파 출신이다. 그러므로 자부심이 상당히 강한 지파였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도바울을 들어서 남은 자로서의 이스라엘의 약속을 이루어가신다고 했다. 


2절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이 내용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8장 내용을 살펴봐야 한다.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29~30)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들, 미리 정하신 자들이 있다. 미리 아셨다는 것을 예지라고 부르고, 미리 정하신 것은 예정이라고 부른다. 미리 아셨다는 것은 이 사람이 믿을 것인지, 안믿을 것인지를 안다는 것이 아니다. 앞으로 이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안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미리 아신다는 것은 사랑하는 관계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아담이 하와와 동침했다는 말을 히브리 원어로 "야다"라고 하는데, 알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본문의 "알다"에 해당되는 단어는 헬라어이기는 하지만 히브리 단어로 하면 "야다"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미리 아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의미이다.

예정은 미리 정한 것인데,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기로 결정하셨다는 것이다.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엡 1:5)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자를 창세 전에 예정하셨다. 이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예를 들어서 한 남녀가 결혼해서 한 아이가 태어나게 되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부모는 여러가지를 준비한다. 방을 꾸미고 옷을 사고 장난감도 미리 마련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어떤 성격을 갖고 어떤 꿈을 가지고 살지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뱃속에 있는 아이를 사랑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예정과 운명을 혼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예정은 농부가 씨를 뿌리고 가꾸는 수고를 많이 하고 하나님께 맡긴다. 하나님이 햇빛을 비춰주시고 비를 내려주시고 자연재해를 막아주시면 농사가 잘 될 수 있다. 내가 열심히 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운명은 다 하나님께 맡겨 버리는 것이다.

내가 책임 지고 노력하고 힘써야 되는 면이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정해진대로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예정에는 선택과 유기가 있다. 예정은 구원과 관련된 용어이다. 하나님께서 구원할 자를 특별히 선택하셨다. 유기는 내버려둔다는 의미도 있고 어떤 사람을 구원하지 않기로 정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택한 자, 남은 자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신다.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셨기 때문에 세상 끝날까지 그 민족을 버리지 않으신다. 그 민족을 통해서 해나가시는 하나님의 일이 있다. 그 민족이 다 구원받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선택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선택이라는 용어를 쓴다. 이 사람의 자격이나 공로나 믿을 것 같아서 선택하시는 것이 아니다. 전혀 믿을 것 같지 않은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택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서 어떤 영향도 줄 수 없다. 

“[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2]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1~13) 


2절 하반절에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했는데,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 또 하나의 증거를 들어서 말하고 있다. 


3절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고발한 내용이다. 첫째, 선지자들을 죽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겠다는 강퍅한 마음이다. 둘째, 제단을 헐어 버렸다. 바알 신을 숭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제단은 헐어 버렸다. 얼마나 이 사람들이 타락하고 하나님 앞에서 악한 지를 짐작할 수 있다. 


4절

칠천 명을 남겨두셨다고 했다. 엘리사는 자기 혼자 남은줄 알고 내 목숨도 찾나이다 라고 절망적인 말을 하는데, 하나님은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라고 말씀하셨다. 당시에 상당히 많은 숫자이다. 중요한 표현은 "나를 위하여"이다. 구원역사는 하나님이 주장하시고 역사하시는 것이지 사람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하나님이 이루어가신다. 당시에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당시에 왜 바알을 섬겼을까? 바알은 다산과 풍요를 주장하는 신이다. 바알을 잘 섬기면 농사가 잘 되게 해서 잘살게 해준다고 믿었다. 그러면 하나님은 다산과 풍요의 복을 주시지 못하는가? 이스라엘은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다 배워서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알을 섬기고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들을 죽이고 제단을 헐어버리는 죄를 지었다. 

우리는 세상적 풍요를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물질적 축복만 바라고 믿음생활을 하고 있다면 영적으로 바알을 섬기고 있는 것이나 다름 없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있는가? 절대 아니다. 사실은 재물을 더 섬기는 것이다. 

믿는 자들이 미신적인 것에 많이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무당을 찾고 점을 보러 다니는 사람이 많다. 어떤 사람은 차에 성경과 십자가를 두고 이것이 사고를 예방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미신을 믿는 자이다. 

세상적으로 잘되기만 한다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신앙을 버리는 자들이 되면 안된다.

북 이스라엘은 매우 타락하고 변질된 곳인데 그 안에도 칠천명의 순수한 신앙을 가진 자들이 있었다. 다른 교회 안에도 순수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쉽게 판단하고 정죄해서는 안된다. 


5절

"은혜로 택하심" 인간의 행위나 공로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이 명백하게 반복적으로 말씀하는데도, 지금도 믿음 뿐 아니라 뭔가를 해야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과 주권적인 선택을 근거로 해서 택함 받아 구원받게 되는 것이다. 


6절

구원은 인간의 공로나 자격과는 상관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엡 2:8~9)

은혜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으로 결정해서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믿음은 인간적인 반응이다. 그런데 믿음 조차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다. 구원에 대해서는 100% 하나님의 은혜이다. 내가 믿고자 하는 마음과 생각까지도 하나님의 선물이니 얼마나 감사한가! 

구원에 조건이 있다면 구원받을 수 있는 자는 한 사람도 없다. 

믿음이 약하면 약할수록 사람을 보고 시험에 빠지지만 믿음이 강하면 강할수록 주님을 바라보고 참고 견딘다. 

만약 구원이 행위에 기초한다고 한다면 더 이상 은혜일 수 없다. 내가 무엇인가를 행해야 도와주겠다고 한다면 순수한 은혜가 될 수 없다. 


7절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했다고 했는데,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고자 하는 것을 말한다.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31]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롬 9:31~32)

믿음을 의지해야 되는데 행위를 의지했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8절

불순종했기 때문에 점점 더 완악해지고 영적으로 점점 무지하게 된다. 


9-10절

밥상은 율법과 전통을 의미한다. 율법의 의식과 제도를 통해서 의를 얻으려고 했었다. 그러나 그것인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고 말았다. 


11-12절

이스라엘의 넘어짐은 궁극적 멸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전해지게 되었다.

이스라엘로 하여금 시기하게 해서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하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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