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목사님설교

20231015 주일오전예배 설교 (창세기 16장 7-14절 /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느냐)

페이지 정보

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3-10-15 16:55 조회552회 댓글0건

본문

유튜브 동영상 링크 : https://youtu.be/jH8FjGyy3cU?si=el9rPIv3_zO_wZ3Z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겠다.” 말씀하셨고 “네 자손을 하늘의 별들처럼 많아지게 하겠다” 약속하셨습니다. 아들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아들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사래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불안했습니다. 사래는 자기는 아이를 낳을 수 없을 것으로 단정합니다(2절). 사래는 인간적인 꾀를 냅니다. 자기 몸종 하갈을 아브람에게 첩으로 주어서 아들을 낳으려고 했습니다. 사래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인간적인 수단을 써서 아들을 낳으려고 했습니다. 아브람도 그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하갈이 아브람의 첩이 되었습니다. 

하갈은 쉽게 임신했습니다. 하갈이 임신하자 자기 여주인 사래를 멸시했습니다. 하갈이 교만해진 것입니다. 자기가 종인 것을 잊어버리고 주인을 멸시했습니다. 그러자 사래는 하갈을 학대하기 시작했고 학대를 견디다 못한 하갈은 도망칩니다. 하갈의 입장에서 보면 원통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갈이 먼저 첩이 되겠다고 한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시킨 일입니다. 그런데 여주인 사래가 자기를 학대하고 아브람도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하갈은 어디에 가서 호소할 수도 없습니다. 하갈은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이것도 하갈의 잘못입니다. 자기 주인을 멸시한 것도 잘못한 것이고, 도망친 것도 잘못한 것입니다. 하갈이 교만해져서 자기 주인을 멸시하고 회개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하갈처럼 자기 위치를 떠난 사람은 누구나 광야와 같이 쓸쓸하고 곤고한 자리에 떨어집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겸손해야 합니다. 하갈은 홧김에 집을 나왔지만 갈 곳이 없었습니다. 쓸쓸하고 적막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갈은 광야에서 방황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11절에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다”고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7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그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학대를 당하고 쫓겨난 하갈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아브람의 하나님으로 믿고 있습니다. 하갈은 종이며 버려진 존재였습니다. 그런 하갈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8절에 “사래의 여종 하갈아” 여호와의 사자는 하갈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그녀의 신분이 ‘사라의 여종’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갈의 신분과 위치를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너는 사래의 여종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갈은 여종이라는 신분이 싫어서 도망쳤지만 하나님은 그녀가 여전히 여종임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은 모든 인생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네가 어디서 왔으며” 지금까지 어디서 살다 왔느냐는 질문입니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느냐는 질문입니다. 어디에서 뭐하다고 왔느냐는 질문입니다. 여러분 어디서 왔습니까?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어디로 가느냐” 어디로 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디로 가려고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려고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여러분 어디서 오셨습니까?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오셨습니까? 지금 어디로 가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묻는 질문으로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연히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의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다가 하나님이 부르시면 언제라도 돌아가야 합입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고 있다면 다행이지만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면 돌이켜야 합니다.

하갈은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말은 ‘어디서 왔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어디로 가느냐’는 질물에는 대답이 없습니다. 도망자는 갈 곳이 없습니다. 모든 인생의 문제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광야로 떠돌아다니는 하갈은 마치 동생을 죽이고 방황하는 가인과 비슷합니다. 아버지 집을 떠난 탕자와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하갈을 그냥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억울한 마음, 애통한 마음, 분한 마음을 이해하십니다.


2.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라

9절에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살길을 알려주시고 문제 해결의 방법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 말을 듣는 하갈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죽으면 죽었지 다시는 그곳으로 가지 않겠습니다.’ 이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돌아가면 사래가 학대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곳이 하갈이 있어야 할 곳입니다. 자기 주인 사래에게 복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주인을 비난했던 것을 회개하고, 다시는 주인을 멸시하지 말고 주인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하갈은 종입니다. 노예입니다. 노예가 도망치다 잡히면 죽습니다. 평생 도망 다니며 숨어 살아야 합니다. 또 아이를 낳으면 그 자식도 노예입니다. 집에 돌아가서 자식을 낳아야 아브람 자식이 됩니다. ‘서자’ 이기는 해도 그것이 낫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자리를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주인에게로 돌아가는 말은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참된 행복은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원래 위치는 어디입니까?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그 자리가 인간의 위치입니다.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는 말씀은 하갈이 원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하갈이 듣고 싶은 말은 ‘네 여주인 사래에게 복수해 주겠다.’ 이런 말을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자기를 학대하는 여주인에게 돌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순종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순종해야 살 수 있습니다. 힘들고 자존심 상하지만 하갈은 돌아가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면서 하갈은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고 성질도 죽였을 것입니다. 

말라기 4:6에 보면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다시 보내겠다고 하시면서 그 엘리야가 와서 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돌아가야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복입니다. 그렇게 사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께 복종한 삶입니다. 히브리서 5:8-9에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하갈이 주인에게 돌아가서 복종할 때 하나님이 복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워 놓은 위치에서 자기 주인에게 잘 복종하고 종으로서 도리를 다하면 하나님께서 하갈의 씨에게도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약속의 자녀가 아닐지라도 세상에서 받는 물질적 축복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11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 하갈에게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이름은 이스마엘로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그 뜻은 ‘고통에서 해방하였다’라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하갈의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신음과 탄식과 고통을 들으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지극히 크고 넓은 사랑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도 사랑하지만 하갈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도 사랑하시지만 이방인들도 사랑하십니다. 

하갈이 낳는 아들은 약속의 아들이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4:23에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여종 하갈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본 부인인 자유 있는 여자 사래에게서 난 이삭이 약속의 자녀가 됩니다. 이스마엘에게는 신령한 복, 영적인 복은 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은 육신의 자녀입니까, 약속의 자녀입니까? 갈라디아서 4:28에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우리는 아브람의 믿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믿는 성도는 약속의 자녀입니다. 

12절에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이스마엘과 그 자손들이 들나귀 같이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육신적으로, 세상적으로 번창하고 사막에서 들나귀 같이 살아갈 것입니다.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이스마엘은 이스라엘 맞은편에 살면서 대항하며 살 것을 가리킵니다. 불신앙으로 얻은 것은 복이 되지 못합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람에게 절대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근심이 되고, 괴로움이 되고, 고통이 됩니다. 


3.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13절에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하갈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갈은 버려진 존재요, 소망 없는 존재요, 아무리 노력해도 복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갈도 만나주셨습니다. 하갈은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습니다. 하갈은 미천한 종에 불과한 자신을 만나주시고 말씀해 주신 것에 대하여 감격하였고 이 사건을 기념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라는 단어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뵙다니, 나 같은 죄인에게도 하나님이 찾아오시다니, 하나님이 나를 만나주시다니.’ 그런 감격에서 나온 말입니다. ‘여기서’라는 말도 중요합니다. 여기는 광야 사막 땅입니다. 아무도 없는 적막하고 쓸쓸한 곳입니다. 하갈은 그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갈은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분노도 다 풀리고,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 그 집으로 돌아갈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감격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14절에 ‘브엘라헤로이’는 ‘나를 살피시는 살아계신 이의 우물’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생명을 주십니다. 하갈은 집으로 돌아갔고 아브람과 사래는 그녀를 받아주었습니다(15절). 이것이 바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살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나님 만나면 모든 방황이 끝납니다. 우리를 살피고 찾아와 만나주시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