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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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0 수요저녁예배 설교 (롬 7:1-14 /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김희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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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
작성일24-04-10 21:38 조회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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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링크 : https://youtu.be/sJ-0gCCKkp0?si=eS0PQW-RFxJMdbSS


로마서 71-14절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김희신 목사)

 

오늘 증거할 말씀의 제목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 입니다. 누구를 섬긴다는 것입니까? 분명히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영의 새로운 것은 무엇일까요? 영의 새로운 것이 뭔지 분명하지 않을 때에는 그 반대의 의미를 가진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영의 반대말은 육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것의 반대말은 오래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목은 하나님을 섬길 때 육신의 오래된 것으로 섬기지 말고,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겨야 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면 육의 오래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본문은 율법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길 때 율법이 아니고 다른 것,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겨야 된다는 것이 오늘 말씀의 제목이 나타내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영의 새로운 것이 무엇인지, 잘 배워서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1절에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편지를 수신하는 로마교회 성도들을 향해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모든 성도는 한 가족입니다. 우리는 주 안에서 모두 형제, 자매입니다.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형제들"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하나되게 하심을 믿는 신앙고백의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보통 교회 안에서 성도 간에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다. 직분과 직책으로 누군가를 호칭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오히려 직분이 없는 경우에만 다른 말로 부르기가 어색하니까 형제, 자매라고 호칭을 합니다. 우리가 반드시, 강제적으로 형제, 자매라는 말을 사용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우리의 마음에 함께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을 바라볼 때 형제, 자매라는 인식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맺어진 혈연관계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가족입니다. 육신적인 혈연관계보다 훨씬 더 친밀하고 더 강한 결속력으로 묶여진 가족 관계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을 향해 "형제들"이라고 부르면서 "너희는 그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질문이 아닙니다. 당연한 것을 의문사를 사용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법이 사람이 살 동안만 효력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날도 어떤 큰 범죄를 지은 사람이 경찰이나 검찰에 의해서 범죄 사실을 조사 받다가 그 사람이 죽게 되면 '공소권 없음'으로 결론이 나게 됩니다. 법으로 그 사람의 죄를 물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바울은 법의 효력, 법의 구속력을 설명하기 위해서 한가지 예를 듭니다.

2"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

부부의 혼인 관계는 법적인 구속력을 갖습니다. 사랑하는 두 남녀가 결혼을 한다는 것은 법적으로 부부가 되었음을 공표하는 것이고, 결혼하는 순간 법적인 효력을 갖게 됩니다. 부부는 배우자 간에 서로만 사랑하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배우자 외에 다른 사람은 사랑하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만약에 결혼을 한 사람이 배우자 외에 다른 이성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법을 어기는 것이고,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부부는 당사자 간에 사랑해서 결혼을 합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는 순간 이 결혼은 당사자 만의 약속이 아니라, 모든 사람 앞에서,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약속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결혼의 법적인 효력이 소멸되는 조건이 있습니다.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배우자 중 한 사람이 죽게 되면 그 결혼이 갖는 법적인 효력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배우자가 살아있는 상태에서는 절대로 배우자 외에 다른 이성을 사랑하면 안됩니다.

하지만 배우자가 죽게 되면 법적으로 그 결혼 관계는 끝난 것이기 때문에 다른 이성을 사랑하고, 재혼을 한다고 해도 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러한 결혼법에 따르면 3절에 기록된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녀가 되지 아니하느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율법이 말하고 있는 결혼법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것입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바울의 서신을 읽는 사람들 중에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결혼법의 원리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바울이 정말로 말하고 싶은 것이 바로 4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사랑하는 로마 교회 형제 자매여! 제가 진짜로 말하고 싶은 것이 이것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우리가 전에는 율법과 결혼한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어주심으로써 구속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때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과의 결혼 관계가 파기된 것입니다. 이제 더이상 율법이 우리와의 결혼에 대한 효력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율법과 결혼한 우리는 죽었습니다'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동시에 우리는 다른 이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새로운 신랑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 이십니다. 누군지 아시겠습니까?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신랑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결혼했고, 예수님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감격에 차서 이 기쁜 소식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아세요?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부라고요! 우리를 괴롭게 하고, 우리를 찔리게 하고, 우리를 슬프게 만들었던 전 남편과는 사별했습니다. 우리의 새신랑은 전남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으신 분이에요! 우리를 위해서 죽어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에요! 우리가 그분의 신부가 될 자격이 전혀 없지만 그분께서 우리를 죽음까지 불사한 사랑으로 신부로 맞이해 주셨어요. 그런데 아직도 전 남편을 잊지 못하고 있고, 새 신랑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있지 못하는 것이 말이 됩니까? 현실을 직시하세요! 정신을 차리라고요! 우리는 주님의 신부에요!'

 

그리고 우리가 주님의 신부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 주님이 우리를 신부로 맞아주신 목적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과 결혼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5절에 보면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라고 했습니다. 전에는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었습니다. 사망을 위한 열매는 죄악의 열매입니다. 죄의 삯이 사망이기 때문에 죄악의 열매는 곧 사망을 위한 열매가 됩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 율법의 배우자가 되어서 살아갈 때에는 이 율법이 우리의 죄의 정욕을 자극했습니다.

율법은 총 613가지 항목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라"는 명령이 248가지, "하지 말라"는 명령이 365가지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우리의 죄의 정욕을 자극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 모든 사람에게는 죄악의 부패성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성과 육신의 연약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짓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래서 죄를 공부하고 연구하고 연습하지도 않았는데 태어날때부터, 아기때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죄를 잘 짓습니다. 어떻게 보면 죄를 짓기 위해서 태어나고 존재하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이렇게 죄악의 부패성의 본능에 충실한 사람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고, 하라고 하면 하기 싫어하는 본성을 가지게 됩니다. 율법이 우리의 죄의 정욕을 자극했다는 것은 율법이 하지 말라고 하면 악착같이 더 하고, 율법이 하라는 것은 악착같이 하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우리의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이럴 때가 많지 않았습니까? 공부하라고 하면 하기 싫고, 뭐 만지지 말라고 하면 더 만지고 싶습니다. 인류와 조상 아담과 하와를 보십시오. 선악과 먹지 말라고 하니까 기어코 먹어 버리지 않습니까? 이렇듯 죄악된 인간과 율법의 결혼관계는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분들이 농담으로 그런 말을 합니다. '우리 남편은 로또야!'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에는 로또만큼 대박이라는 뜻인가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하는 말이 "안 맞아도 너무 안맞아!" 그러는 겁니다. 죄악된 인간과 율법은 맞을래야 맞을 수가 없습니다. 죄악된 인간이 율법을 지킬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율법과 결혼한 사람은 율법에 자극을 받아 계속해서 죄를 짓고, 율법을 계속해서 그 사람을 정죄합니다. 그래서 죄악의 본성을 지닌 인간은 계속해서 사망을 위한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 예수님과 결혼한 자는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새신랑 되시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위한 열매만 맺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결혼한 사람은 신랑을 배우게 됩니다. 마치 결혼한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닮아가게 되는 것처럼 예수님과 결혼한 신부된 성도는 신랑되시는 예수님을 본받아 하나님을 위한 열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영광의 열매를 많이 맺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결혼한 자는 예수님의 나무에 접붙여진 나무가지와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맺으시는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앞의 내용을 정리해서 다시 말씀합니다.

6"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해서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합하여 우리를 얽매고 있었던 죄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과의 결혼 관계도 끝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때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하지 않습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의 새로운 것이 무엇일까요?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주장을 받는 중생한 성도의 영"을 가리킵니다(이병규 목사님). 성도가 중생하기 전에는 죄의 정욕이 그 영을 지배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킬수가 없고, 사망을 위한 열매만 맺었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중생한 이후에는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와 주장을 받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영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비로소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까지 바울이 증거한 말씀을 들을 때 오해가 생길 여지가 있습니다. 율법이 악한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에 바울이 추가적으로 설명을 합니다.

 

7"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바울은 율법이 죄가 아니라고 강력하게 말합니다!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절대로 율법은 죄가 아니다. 율법은 잘못한 것이 없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바울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합니다.

율법이 아니었다면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했을 거라고 말합니다.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니라" 십계명의 열번째 계명이 "탐내지 말라"입니다. 이 계명의 가르침이 아니었다면 자신이 탐심을 알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율법의 전문가였습니다. 당대 최고의 율법학자인 가말리엘에게서 율법을 사사받은 율법의 최고 엘리트였습니다. 율법에 있어서는 세계 최고의 인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리고 가말리엘에게서 배웠다는 것은 율법을 가르칠 자격과 권위를 갖추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랬던 그도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탐내지 말라"는 계명의 진정한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는 율법의 문자적 의미에만 치중했고 그 안에 담겨진 참 뜻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십계명의 참 뜻을 가르치신 내용을 예수님을 믿은 후에서야 배우게 되었고 계명의 문자적, 표면적인 의미를 넘어 그 안에 담겨져 있는 사랑의 참 의미까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남을 죽이는 것만 말씀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이에게 화를 내고 욕하고 미워하는 것까지 살인이고,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도 육체적 간음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성을 보고 음욕을 품는 것 까지 해당된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죄악의 본성을 지닌채 율법을 바라볼 때에는 율법의 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악용하면서 살았다면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용서함을 받은 이후에는 율법의 참 뜻을 깨닫고 율법 안에 담겨져 있는 참 진리와 사랑을 실천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8-9"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죄악의 본성이 계명에 대한 반발심으로 더 많은 죄를 짓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고 했는데, 율법이 없었다면 죄를 깨닫지 못했고, 죄를 짓고 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람을 미워하고, 욕하고, 화를 내면서도 그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기 때문에 6계명을 지켰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성을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고 생각으로 간음죄를 다 지어놓고서도 육신으로 간음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에 7계명을 지켰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율법의 참된 의미를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자기는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다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율법에 있어서 자기만큼 잘 지킨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우월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라고 했습니다. 계명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되었을 때 자신은 완전히 부패한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율법을 잘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고 칭찬받고 구원에 이를줄 알았는데 실상은 완전히 죽은 상태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어서 말합니다. 10-11"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도다"

계명을 가리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참 기능은 죄를 깨닫게 하므로 회개하게 만들고, 참 구원주 되시는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생명에 이르게 하는 의롭고 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있어 그 계명에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죄의 본성이 계명에 대한 반발심으로 죄를 짓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을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도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것은 바울은 분명하게 자기 자신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이 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게 대하여, 나를 속이고, 나를 죽였도다" 바울이 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과 죄에 관한 일반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의 경험담이고, 바울이 분명하게 깨달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도 율법에 대한 반발심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바울도 죄악에게 속아서 계명을 악용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바울은 율법의 전문가요 권위자였습니다. 그는 율법을 아는 면이나 지키는 면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 자신감이 있었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오해했습니다. 율법의 참된 의미와 기능과 목적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과 복음 앞에서 자신의 부끄러운 것까지도 드러내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율법이 갖는 참된 의미에 대해서 결론적으로 말씀합니다.

12-14"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우리는 바울이 가르쳐주고 있는 율법의 참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절대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왜 율법이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합니까? 이 율법을 주신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율법이 우리에게 사망이 되는 것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율법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내가 범한 죄가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 율법이 없었다면 우리는 죄를 깨달을 수도 없고, 죄를 지으면서도 바울이 착각한 것처럼 오히려 자신에 대해서 의롭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착각을 하면서 사는 사람은 절대로 예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율법은 신령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의 도구로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참 의미를 깨닫고, 율법을 통해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졌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본받아서 하나님을 위한 열매를 많이 맺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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