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05 주일오전예배 설교 (욥기 9:24-35 / 유일한 답이 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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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복용교회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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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동영상 링크 : https://youtu.be/_-k1V4z-I7c?si=802Rx04iXUWHW6De
(설교요약)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 듯 보입니다. 욥은 “세상이 악인의 손에 넘어갔고 재판관의 얼굴도 가려졌다”(24절)고 탄식합니다. 정의는 흐려지고 억울함은 쌓이는데, 우리의 날들은 “경주자보다 빨리” 사라지는 듯합니다(25–26절). 바쁘고 지친 일상 속에 “왜?”라는 질문만 늘어날 때, 우리는 표정을 고치고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를 추스르려 합니다(27절). 그러나 곧 한계를 실감합니다. 결국 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거리를 바라보며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를 찾습니다(32–33절). 본문은 자기 해법의 한계, 하나님과의 거리의 자각, 유일한 길이신 중보자로 우리를 이끕니다. 이 여정은 단지 교리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기도와 선택을 바꾸는 삶의 방향 전환입니다.
1. 자기 해법의 한계: 얼굴빛을 고쳐도, 잿물로 씻어도(27-31절)
우리는 먼저 자기 해법을 꺼내 듭니다. 표정을 펴고 생각을 정리하며 더 선하고 의롭게 살겠다고 결심합니다. 그러나 욥은 “내 불평을 잊고 얼굴빛을 고쳐도”(27절) 근본 변화가 일어나지 않음을 봅니다. 표정은 바뀌어도 마음은 따라오지 못합니다. 이어 그는 관건이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아니라 “주께서 어떻게 보시느냐”임을 고백합니다(28–29절). 하나님 앞 의롭다 하심이 없으면 모든 수고는 헤벨(헛됨)입니다. 그래서 “눈 녹은 물과 잿물”(30절)이라는 극단을 듭니다. 가장 순결한 물과 가장 강력한 세정제를 다 동원해도, 하나님 앞 의를 만들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께서 나를 개천(구덩이)에 빠지게 하시리니 내 옷이라도 나를 싫어하리이다”(31절). 자기 정화는 죄의 뿌리를 뽑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계를 인정하고, ‘내가 보기엔’이 아니라 ‘주께서 보시기에’로 기준을 바꾸며, 숨김없는 회개로 나아가야 합니다. 더 나아가 그 회개는 감정적 후회에 머물지 않고, 말씀 앞에서의 재정렬(시간·말·관계의 우선순위)로 이어져야 합니다.
2. 넘을 수 없는 거리의 자각: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다(32절)
자기 해법의 막다른 길에서 욥은 창조주–피조물의 존재의 거리를 직면합니다. “하나님은 나처럼 사람이 아니시니 내가 그에게 대답할 수 없고 함께 들어가 재판할 수도 없다”(32절). 또한 죄로 인한 관계의 거리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지 못합니다. 이 거리를 부정하면 하나님을 내 취향의 작은 신으로 만들거나, 반대로 절망 속에 주저앉게 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처럼(눅 18:10–13),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이는 큰 소리의 변론이 아니라 가슴을 치는 자복으로 섭니다. 이 자각은 겸손(내 판단 대신 주의 판단), 진실(자기 변명 대신 회개), 소망(거리가 끝이 아님을 믿음)이라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를 붙들고 밤새 계산하기보다, 먼저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는 예배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때 마음은 낮아지고, 입술은 간구로 열리며, 발걸음은 순종의 첫걸음을 떼게 됩니다.
3. 유일한 길, 중보자: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33-35절)
욥은 “우리 사이에 손을 얹을 판결자”를 갈망합니다(33절). 징벌의 막대기가 거두어지고 두려움이 사라질 때에야 담대히 말할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34-35절). 이 탄식과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자 참 사람이시기에 양편을 동시에 붙드실 유일한 중보자이십니다. 둘째, 십자가에서 우리가 받아야 할 징벌의 막대기를 친히 담당하심으로, 우리는 정죄의 두려움 대신 자녀의 담대함을 얻었습니다. 셋째, 그분은 지금도 대제사장으로 우리를 위해 항상 간구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히 4:16),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히 10:19)을 얻었습니다. 이 복음은 삶을 바꿉니다. 기도의 방향이 해명과 항변에서 중보 의탁으로 바뀌고, 양심의 고소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셨다”는 복음 앞에 잠잠해집니다. 관계에서는 중보자의 길(기도-경청-진실한 대화)로 화해를 시도하며, 고난은 정죄의 증거가 아니라 연단의 도구로 새롭게 해석됩니다. 나아가 일상에서 우리는 하루 한 번 욥 9:33과 히 4:16을 낭송하며, 한 사람의 이름을 정해 중보함으로 이 말씀을 습관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결론
우리는 자기 의와 자기 판결, 자기 해법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의와 판결, 하나님의 해법을 붙듭니다. 오늘도 세상의 풍파보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그리스도의 의와 중보를 의지하여 억울함과 두려움 속에서도 담대히 서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 사이에 손을 얹으신” 주님을 의지하여, 예배에서 받은 은혜를 삶으로 이어가며, 가정과 일터에서 복음의 흔적을 남기는 한 주를 살아가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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